삶/죽음 사이의 여백의 시공간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전시 전경
I. 들어가는 글
작가 최용대는 자연과 풍경을 그린다. 이 글은 그의 ‘풍경 아닌 풍경화’에 담긴 삶/죽음, 인간/자연, 검정/하양, 비움/채움의 대립항을 잇고 있는 ‘사이 세계’ 혹은 ‘공존의 세계’를 분석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과제 앞에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작가 최용대가 1992년 첫 개인전 이래 회화, 오브제, 설치의 조형언어를 통해 시(詩), 꿈, 자연, 인간과 관련한 주제들을 탐구하는 가운데 부단히 모색하고자 했던 작업의 근본적인 화두(話頭)는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 / 그림 그리기란 삶이라는 실존(實存)과 / 죽음이라는 삶의 부재(不在) 사이를 / 이어 주는 이음줄에 다름 아니다. / 하여 / 내 모든 그림은 /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들이다.” 1)
그가 6년간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가진 개인전 카탈로그에서 언급한 상기의 작가 노트는 2014년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그에게 하나의 화두처럼 간주되는 텍스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구상, 추상의 시기를 거쳐 일련의 숲 시리즈에 이르는 최근의 전시에 이르기까지 상기의 텍스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는 실존과 부재가 그리고 삶과 죽음이 대립하는 ‘사이의 세계’가 정초된다. 그의 표현대로 그것은 ‘이음줄’이자 ‘언어’의 세계이다. 즉 ‘이음줄로서의 언어’의 세계인 것이다. 작가 최용대가 “그림도 일종의 언어”2)라고 생각하거나 “그림이 또 다른 시적 언어라는 생각을 종종 해왔음”3)을 밝히고 있듯이, 그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매개하려는 ‘사이 세계로서의 그림’이란 ‘이음줄로서의 시적 언어’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La Foret 숲, 2012, Pigment, Acrylic on Canvas, 40X120Cm, 2 Pices
II. 삶/죽음 - 시적 언어의 세계 (1992-1999)
그가 1985년부터4) 본격적인 화업의 세계에 뛰어들었으니 그의 화업은 2014년에 이른 올해 어느새 30년을 맞이하고 있다. 그가 1993년 1월-1998년 12월까지의 프랑스 유학 시기를 거치는 동안 모색했던 창작의 세계는 유학 가기 바로 전 가졌던 1992년의 개인전5)과 유학 후 가졌던 1999년 개인전6)과 연동된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유학 기간 앞뒤로 1년씩을 포함한 기간을 그의 창작 세계의 1기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 1기의 시기에는 현실 세계로부터 부유하고 방황하는 20대 특유의 우울한 감성들이 작품 속에 절절히 배어 있다. 특히 작품 제목들에서 발견되듯이, 그의 예민한 예술가적 감수성은 시를 녹여 낸 그림들 안에서 지속적으로 꿈틀거린다. 〈시인의 침묵(沈黙)〉, 〈절망(絶望)의 시(詩)〉와 같은 제목에서처럼 현실에서 무력한 시(詩)일지라도 당시 그에게는 〈태양을 등진 해바라기〉와 같은 좌절과 곤경의 〈생(生)의 한 가운데〉에서 꿈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에게 '시'로 꿈꾸는 희망이란, 〈우울한 비상(飛翔)의 꿈〉으로 정초되는 것일지라도 언제나 〈나의 천사(My angel)〉를 찾는 과정이었기에, 다음처럼 희망의 메시지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든 근원적 힘이었다: 〈얘야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것만은 포기해선 안된단다〉,〈어둠 속에서도 날개는 자라나 끝내는 하늘로 날으리라〉.
한 시인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그가 우울하게 읊조린 한 편의 시는 더 이상 시가 없는 세상에 대한 울분과 좌절의 심경을 토로한다. 그는 띄어쓰기를 고의로 방기한 자신의 '시' 속에서 다음처럼 질문한다: '하여 / 남은 그대 / 무엇을 무엇으로 말할 건가.'7) 이렇듯, '피를 토(吐)한들 / 칼로 대항(對抗)한들 몸으로 쓰러진들 / 빌어먹을 놈의 어둠만 한층 짙어지고 / 확연(確然)해질 뿐”8)인 좌절의 세상에서 예술을 하기로 작정했던 20대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예술의 포기? 필경 그는 이 땅의 현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탈주해서 예술을 하고 싶었으리라.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프랑스 유학을 계획하게 되었던 일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게다.
당시 그의 작업은 구체적인 산문적 내러티브가 와해된 표현주의적 필치에 근간한 비구상 혹은 추상 계열의 작품들이었다. 마치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시적 세계처럼 말이다. 화면 안에 갈겨 쓴 텍스트들은 물감으로 이내 뒤덮이면서 읽을 수 없는 것으로 변환된다. 마치 쓰다가 지워 버린 '자신만을 위한 내밀한 일기'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텍스트는 〈절망의 시〉라는 제목처럼, 그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할만한 것들로 화면을 점유한다. 흘리고, 겹쳐진 물감 층이 형성시킨 비구상적 화면은 1990년대 한국 화단의 추상미술의 형식적 면모와 얼추 유사한 지형도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 속에서 '시적 회화'라 지칭할 만한 자신만의 내밀한 예술 세계를 펼쳐 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선보이기 된 계기는 그의 유학 기간 동안의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부터 연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유학 이후 국내에서 가졌던 1999년 그의 개인전에서, 그러한 흔적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유학 기간 동안의 작품을 선별하여 새롭게 준비한 7년만의 개인전에서, 그는 정제되지 않은 표현주의적 붓질로 토로하던 우울한 감성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성찰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조형적 실험의 세계를 새로이 선보인다. 그것은 여전히 시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지만, 지나온 세월을 둘러볼 만큼 여유를 가지게 된 장년의 시기를 맞게 된 작가가 도달한 ‘새로운 시’의 세계였다. 그것은 그간의 시어(詩語)로부터 모음과 자음을 분리하고 재배열한 시의 세계라 할 것이다. 그것은 순연(純然)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채 그것의 표현(expression)에만 골몰하던 젊은 날의 치기(稚氣)를 털어낸 후, 내면의 의식을 정제하고 기호의 형식으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제시(presentation)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도 표현주의적 비구상 양상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응집과 확산의 비정형화된 추상 언어가 기호의 양상으로 대치된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흑과 백의 대비와 더불어 분할된 화면의 쉐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가 등장하면서 '사이 세계'에 대한 모종의 관심이 비로소 그의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발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작가 최용대의 화두라고 평가했던 상기의 작업노트가 선보인 시기가 1999년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의 유학 시기를 중심으로 두고 있는 1기(1992-1999)의 시절은 '삶과 죽음 사이의 시적 언어'를 탐구하는 시기였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1992년을 중심으로 한 시기의 작품세계를 '배회하는 시적 언어'가 주도했다고 한다면, 1999년을 중심으로 한 작품세계는 '매개하는 이음줄의 시적 언어'가 주도했다고 좀 더 세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III. 인간/자연 - 공존의 사이 세계 (2000~2008)
작가 최용대는 2010년 자신의 작업을 정리한 한 텍스트에서 1999년 이후의 작업기를 “나 자신의 추상적인 내면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한 시기”9)로 정의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그의 2000년 이후의 작업기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말하는 시기’로 규정해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해, 2000년 이전은 ‘내면의 감성적 표현의 시기’라고 한다면 2000년 이후는 ‘조형적 실험의 실천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2000년 이전을 ‘표현주의의 시적 감성으로부터 구축주의의 시적 성찰로 변모하는 내면의 과정’을 펼쳐 보였던 시기라고 한다면, 2000년 이후를 ‘사이 세계를 매개하는 조형적 실험의 실천’을 구체화했던 시기라고 정의해볼 수 있겠다.
1999년 3회 개인전에서 단초를 보이고, 1999년 4회 개인전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조형 실험은 2000년 프랑스에서의 5회 개인전10)에서 ‘사이 세계’에 대한 구체화된 가시적 결과물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그것은 화면 분할의 쉐이프드 캔버스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구체화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 양자를 매개하는 공간으로 개입시킨 검은색(혹은 흰색)의 정방형(혹은 직방형) 캔버스였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올라서 있기도 하고 아예 검은색, 흰색으로만 구성되기도 한 이 캔버스들은 매우 단순해진 자연과 인간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사이 세계’를 창출한다.
유심하게 살피면, 이전의 표현주의 언어로 모색되던 자연의 풍경, 기호들은 나뭇잎을 닮은 단순해진 ‘나무’의 형상으로 대치되고, 이전의 표현주의적 형상의 인물이나 해골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는 단순해진 사람의 ‘손’ 형상으로 대치된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기호화된 이미지를 먹이나 안료로 그리기도 했지만, 아예 MDF로 깎아 만들어 부조의 방식으로 화면에 부착시키기도 했는데, 이러한 작업 방식은 나무(자연)와 손(인간)의 공존을 보다 선명하게 가시화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즉 나무와 손의 형상을 구성적이고 구축적인 방식으로 화면 배치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이미지를 기호화하고 다중의 메시지로 해석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꽃봉오리나 나뭇잎을 닮은 나무와 손의 형상들은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제유(提喩)의 방식으로 비유한 기호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며, 단순해진 형상만큼이나 그것이 함유하는 자연과 인간의 대표성으로서의 메시지는 보다 선명해진다고 할 것이다.
이미지 옆을 빼곡히 메운 텍스트 혹은 한 줄로 올린 텍스트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보다 더 강화한다. 그것들은 시, 소설, 철학 서적으로부터 발췌된 것들로 한글도 있지만 불어, 영어로 된 것들도 있고, 단어들만 무심히 던져진 채 쓰인 것들도 있어, 가독성을 필수적인 전제로 삼지 않는다. '의미의 읽히기'를 요청하는 텍스트도 있지만, 오히려 ‘의미의 읽히기’를 거부하는 텍스트조차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작품 속에 개입하는 일련의 텍스트는 오히려 '이미지'처럼 간주된다. 이미지가 다의성을 지닌 존재라 할 때, 이러한 최용대의 텍스트들은 우리로 하여금 고정화된 단의성으로부터 다의성의 세계에 접어들고 있는 ‘이미지화된 텍스트’로 보게 만든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텍스트조차도 다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대화의 창’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실제로 그는 관객이 제기하는 ‘작품에 대한 의문에 대해 설명하고 대화하는 과정까지를 작업의 완성’11)이라고 간주하지 않던가.
이러한 차원에서, 텍스트들이 뒤섞인 개별의 ‘나무들’ 사이에 개입하는 검은색의 빈 캔버스, 그리고 개별의 ‘손들’ 사이에 개입하는 흰색의 빈 캔버스(의 이미지)는 관객들에게 단절된 말들과 이미지로 인식되는 부분을 이어주고 재생하며 복원시킨다. 작가와 관객과의 실제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소통의 차원이 이러한 정방형, 직방형의 비어 있는 캔버스(또는 캔버스 이미지)로부터 발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캔버스들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복원하려는 ‘사이 세계’이자 ‘여백으로서의 대화의 창(窓)’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2010년도 설치 작품12)에서 선보인 실제의 나무에 매단 거울들은 이러한 비어 있는 캔버스들이 시도하고 있는 소통과 대화로서의 '창'의 개념이 보다 진화한 것이라 하겠다.
주지하듯이, 자연(自然)의 한자적 뜻풀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는 자연이 스스로 생성, 소멸, 치유되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자연이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한계 그 지점에서 나의 작업은 시작된다”13)고 말하는 작가 최용대의 발언은 그런 면에서 오늘날 인간에 의해 타자(他者)화된 자연을 복원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자연과 인간 사이를 공존의 것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그의 자연관이 ‘사이 세계’라는 독특한 자신의 작품관을 정초하게 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이 세계’는 자연/인간 뿐 아니라 이미지/텍스트, 운문/산문, 서양/동양, 평면/설치와 같은 다양한 대립항을 화해시키고 공유하게 만드는 범주로 확산하면서 결과적으로 하나의 범주적 덩어리의 세계인 ‘숲(La forêt)’에 이르게 된다.
La Foret 숲, 2012, Pigment, Acrylic on Canvas, 72.5X116.5Cm
IV. 검정/하양 - 숲(2009~ )
그에게 숲은 나무들이 지은 집이다. 그가 2010년 개인전의 부제로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숲”14)이라고 표기하고 있듯이 말이다. 숲은 중력에 순응하면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중력에 저항하면서 세워 올린 줄기로 열주(列柱)를 이룬 집이다. 그것은 땅에 직립한 채 ‘위로 자라는 나무(木)’라는 개별체의 자연으로부터 땅을 품으며 ‘옆으로 자라는 나무들(林, 森)’이라는 보편적 자연으로 자리 이동한다. ‘옆으로 자라는 나무’15), 그것은 숲에 대한 필자의 시(詩)적 은유이다.
특히 작가 최용대가 '숲'을 ‘포레(La forêt)’라는 불어로 표기한 것은 발음이 유발하는 쾌적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숲’에다 의미를 부여하려는 까닭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서너 그루로 간략히 표상된 숲은 검은색의 안료로 가득 메운 울창한 나뭇잎을 지닌 성하(盛夏)의 것으로 나타나거나 나뭇잎을 떨어뜨린 채 앙상한 가지들을 남긴 성동(盛冬)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전의 구성적 화면 속 검거나 흰 캔버스가 나무의 형상을 입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숲 연작은 비교적 큰 캔버스의 크기로 인해 장중(莊重)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전 작품의 미니멀하고 구성적인 화면에서 기호처럼 나타나던 나무들이 형상의 옷을 입고 출현한 이 숲의 이미지는 흑백의 대비로 인해 매우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숲이 품고 있는 검정색은 안료의 특성상 매우 질박하고도 선명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검정이란 죽음을 상기시키는 어둠처럼 ‘부재의 색’으로 간주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색을 다 포함하고 있는 ‘존재의 색’이자 모든 존재자들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다 수렴하여 꿈틀거리게 만드는 강인한 ‘생명의 색’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신의 작품을 두고 '이것은 풍경이 아니다. 이것은 실존이다.(It is not landscape, It is existence)'16)라고 단언하고 있지 않던가. 그곳에는 줄기와 잎이, 나무와 나무가, 주체와 타자가, 개별과 보편이 실존의 이름으로 함께 자리한다. 특히 그의 그림은, 피막 처리가 되지 않은 캔버스 천 위에 두텁게 겹으로 칠해 올린 날것의 안료적 속성과 더불어 안료를 최종적으로 고착시킨 투명 미디엄의 매재(媒材)적 속성이 서로 부딪히면서 상이한 것들을 하나로 끌어안게 된다. 양자의 물질이 빛과 어우러져 유영하는 빛의 반영적 효과를 만들어냄으로써 검은색을 하나의 '검정'으로 고착화시키지 않고 다양한 색층으로 변주해내기 때문이다. 안료의 입자들이 으깨지고 비벼지면서 캔버스 위에 여러 겹으로 올라선 까닭에 빛의 반사 각도에 따라 검은 숲은 때로는 투명한 검정으로, 때로는 불투명한 검정으로, 때로는 푸른빛의 검정으로, 때로는 회색빛으로 때로는 은빛으로 변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검은 숲은 2012년 개인전17)으로부터 다른 변모를 시도한다. ‘검은 숲’으로부터 ‘회색 숲’으로의 변모가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검정색의 안료로만 그렸던 그의 회화에 흰색의 아크릴 물감을 개입시키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검정색 안료와 흰색 아크릴물감의 이질적 물질감이 상호작용하면서 창출하는 효과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양자가 뒤섞이면서 만들어 내는 회색의 바탕면은 신비로운 마술적 효과를 창출한다. 그것은 ‘검거나 흰 세계’를 만들어 낸다. 순식간에 창조되는 그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안개가 뿌옇게 드리워진 풍경 또는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의 풍경 혹은 반대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의 풍경으로 인식하게 만들기에 족하다. 이와 대비되게, 미묘한 회색톤 위에 올라선 나무는, 이전 작품들에서 드러났던 무수한 나뭇가지들이 사라진 채, 그저 검은색 안료를 수직 방향으로 그은 한 줄기의 표식으로 보다 더 단순화된다. 이러한 나무들이 하나둘 여러 줄기로 화면에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숲을 형상화하게 되는 것이다.
전시 전경
V. 비움/채움 - 허물기로서의 붓질과 '여백 아닌 여백'
최용대의 최근 작업은 지금까지 우리가 앞에서 기술했던 작업 방식에 부가하는 일련의 몇 가지 작업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숲의 메타포’를 보여 준다.
먼저, 그것은 아크릴 물감과 미디엄을 섞은 안료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실행하는 ‘허물기 작업’을 통해서 발현된다. ‘허물기 작업’이란 무엇인가? 그는 마른 붓으로 물감과 안료가 굳기 전에 나무의 형상과 반대되는 수평적 붓질을 반복함으로써 검은 안료로 그려진 나무의 형상을 해체한다. 나무가 배경 속으로 잠입하고 배경이 나무의 내부로 침투하는 이러한 물감층의 교접현상은 개별체로서의 각각의 나무를 ‘숲’이란 개념으로 묶어 주는 효과를 드러내기도 한다. 각기 떨어져 있던 나무들이 마른 붓질을 통해서 서로의 속살을 나눠주고 받음으로써 ‘숲’이라는 공동체적 양상을 비로소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이러한 그의 ‘허물기로서의 붓질’은 이전에 구축되었던 안개가 자욱한 듯한 효과, 혹은 바람이 부는 듯한 효과를 보다 더 선명하게 구현할 수 있게 된다. 달리 말해, 그의 이러한 ‘허물기 작업’은 선명하게 ‘보이는’ 나무를 해체하고 흐릿하게 만들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자, 거꾸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유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어떤 이에게 그것은 단순한 심상(心像)의 풍경일 것이며, 어떤 이에게 그것은 인간 세계에 대한 메타포일 것이며, 어떤 이에게 그것은 주체와 타자 혹은 주체와 대상에 대한 철학일 것이다. 그의 회색 숲으로부터 유추되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은 관객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그 어떤 것으로 명쾌하게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다방향성을 지닌 것들이리라. 그 뿐인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부터 ‘보이는 무엇’을 발견하는 사건도 관객에게 저마다 다르게 나타날 게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어떠한 범주 속에 있는 것들인지를 상상해 볼 따름이다.
둘째로, 그의 작업에 있어 우리가 ‘허물기 작업’이라 부른 이러한 붓질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순간적이고 즉발적인 붓질을 폭발하듯이 쏟아부어야만 이러한 물감층의 교접 현상은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족할 만한 화면을 얻지 못할 경우, 그는 다시 화면을 지워내고 처음의 작업 과정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이러한 제작 방식은 그의 작업을 매우 빠르게 성취시키기도 하지만, 역으로 매우 더디게 하거나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기(氣)를 담아내어 일필휘지(一筆揮之)의 획(劃)을 이루는 것처럼, 그는 화면과 대면하는 자신의 즉발적 감수성을 폭풍과 같은 붓질에 실어 숲의 세계를 창출한다.
셋째로, 우리가 유념할 것은, 그의 작업에서 ‘숲의 구성요소가 아닌 무엇’이 개입함으로써 ‘숲’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는 역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숲 속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나무, 풀, 곤충, 동물, 흙, 공기, 빛, 바람 같은 숲의 거주자들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숲에 거주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가 앞서 ‘사이 세계’의 개념을 성취하는 것으로 평가했던 ‘검은색(혹은 흰색)의 정방형(혹은 직방형) 캔버스’와 같은 속성의 무엇이다. 그것은 바로 화면 아래 자리한 흰 색의 '여백 아닌 여백'이다. 여백(餘白)이란 사전적 정의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남은 빈자리'이다. 즉 행하기를 멈추고 남은 '비어 있음'의 공간이다. 우리는 최용대의 회화에서 아랫부분에 자리한 흰색의 공간이 무엇인가의 행위가 멈추고 남은 빈자리이면서 한편으로는 거기에 다시 흰색의 아크릴물감이 가득 채우고 있는 '충만함'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것을 '여백 아닌 여백'이라 부른다.
'비어 있음'과 '충만함'을 동시에 실천하는 이 공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던 '부재/존재'의 양면성이 동전처럼 맞붙어 있는 검정색에 대한 사유를 떠올릴 필요가 있겠다. 또한, 나무(자연)와 손(인간) 사이에 개입하는 검은 혹은 하얀 캔버스(의 이미지)를 떠올릴 필요도 있겠다. 부재/존재가 맞붙어있고, 대립항을 이어 주고 단절된 이미지와 언어들을 재생하고 복원시키는 이 '여백 아닌 여백'의 공간은 그런 면에서 '사이 세계’이자 작가와 관객을 만나게 하는 ‘대화의 창’으로 기능한다.
유추해서 생각해 볼 것은 다음과 같다.
하단의 흰 공간은 마치 눈이 가득 덮인 들판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을 비워 둔 동양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즉 '그리지 않은 것'으로 '그려진 결과'를 이끌어내는 동양화에서의 '여백'의 미학처럼 말이다. 최용대의 회화에서 '여백 아닌 여백'도 동양화의 '여백'과 유사하게 자리한다. 다만 이 공간은 자유로운 필치가 가득한 상단의 공간과 칼(刀)처럼 마주하는 화면 구성으로 인해 공간과 공간을 날카롭게 분할하는 절(切)의 공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상이한 지점을 노정한다. 물론 양자의 공간이 흐릿하게 이어진 작품들도 있지만, 대개의 작품이 이러한 분절의 공간을 확연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모종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특히 하단의 흰 공간은 '그리지 않은 것'으로 '그려진 결과'를 이끌어내는 동양화의 '여백'과는 상이하게 '그린 것'으로 '그려지지 않은 효과'를 이끌어내는 무엇이 된다.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는 흰색 아크릴물감을 거듭 쌓아올려 터럭만큼의 티끌도 용인하지 않는 순백의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공(空)의 공간으로 탈각시킨 이 하단의 흰색 공간은 따라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함유하면서 회색의 숲이 자리한 상단의 공간으로부터 이격한다. 마치 기차를 타고 뒤로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이들이 앉아 있는 공간과 풍경의 공간이 이격되듯이 말이다. 이러한 이격의 공간을 메우는 것은 바라보는 이들이 앉아있는 공간이 만드는 여백이다. 따라서 이 '여백 아닌 여백'의 흰 공간은 관객들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대화의 공간이자 그들 각자의 대답을 투영하는 티 없이 맑은 거울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관객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여기서 무리하게 규정짓지는 말자. 그것은 대개 쉬이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관객에게 각기 달리 보이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비움/채움', '부재/존재'와 같은 대립항들의 아이러니를 탐구하는 존재론적 미학에 기초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여백 아닌 여백의 공간', 그곳에서 최용대는 오늘도 '쉬이 보이지 않는 의미의 그물망'를 직조하고 있다. 더러는 빠르게, 더러는 느릿하게.
포스터
VI. 나오는 글 -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라고 하는 화두로부터 출발한 최용대의 작품 세계는 줄곧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한다. 그것은 표현주의적 화풍으로부터 오늘날의 '숲(La forêt)' 시리즈라는 정제된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동일한 관심사였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최근 작업의 특성을 '허물기로서의 붓질'과 '여백 아닌 여백'으로 규정했을 때, 그가 이것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숲의 메타포란 결국 무엇인가? 그가 “하나의 작은 숲을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18) 라며 토로한 바와 같이, 숲(자연)의 메타포는 우리의 인생(인간)이다. 거기에는 오늘날 인간으로부터 대상화된 자연의 모습을 복원하려는 작가의 소박한 자연관이 자리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공존을 도모하는 주체는 더 이상 인간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객체로 간주되는 자연이 들려주는 메시지에 우리가 귀 기울임으로써 가능해지기도 한다.
최용대의 작업은 회색의 숲으로부터 발원하는 '들리지 않는 메시지'와 '보이지 않는 무엇'을 찾는 것에 집중한다. 자연의 목소리를 내 안에 육화(incarnation)된 채로 듣고 이해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는 앙상한 나무에 붕대를 감고 거울을 매단 설치작품(2004, 2010)을 통해서 자신 안에 육화된 자연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 바 있다. 이제는 그의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와 그의 '여백 아닌 여백'이 요청하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해 우리가 화답할 때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숲에 기대어 서서〉라는 제목의 두 시에서 보여주는 시구들은 우리의 논의를 위해 음미해 볼 만하다.
'네가 오리라 / 기다리던 길 어귀에 / 너는 오지 않고 / 나무들 사이로 / 어둠이 오고 있구나./ (중략) /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것이 / 사람인지 아니면 / 사람의 마음도 모르고 / 유유히 흐르는 저 달빛인지...' 19)
“네가 떠난 자리 / 눈발이 날리고 / 눈 쌓인 들판 위로 / 나목들이 장승처럼 서 있다. / 네가 눈 날리는 숲에 있었는지 / 내가 눈 날리는 숲에 있었는지 / (후략)”20)
상기의 두 시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인간의 소통이란, 더 이상 주체와 객체 사이의 소통이 아니며, 주체와 또 다른 주체 사이에서의 대화와 소통으로 정의된다. 이처럼 주체와 객체의 벽을 허물고 양자를 주체간의 만남으로 드러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사이 세계'에 대한 조형적 구상은 그의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전한 미덕이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이야기하는 그의 '여백 아닌 여백'은 이러한 수평적 주체들 간의 상호 작용을 위해 마련해 둔 넉넉한 공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제 30년 화업을 정리하면서 다음 작업을 찾아 나서는 작가 최용대의 새로운 프롤로그가 이와 같은 미학적 바탕 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전개해 나갈지 자못 기대된다. ●
주석)
1) 최용대, 「작가노트」, 『CHOI YONG-DAE』, 3회 개인전 카탈로그, 조선화랑, 1999, 쪽수 없음.
2) 최용대,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숲」, 『La foret』, 12회 개인전 카탈로그, 갤러리 그림손, 2010, 쪽수 없음.
3) 최용대, 「비둘기와 그림자,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의 글쓰기」, 심언주의 시(詩) ‘프리즘’에 대한 평, 『詩眼』, 겨울호, 2005.
4) 여기서는 작가 최용대의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를 자신의 작품세계를 정초하기 위한 전개기로 규정하고 평가를 후일로 유보한다.
5) 최용대 1회 개인전, (1992. 11. 7~11. 15, 태백화랑), 2회 개인전, (1992, 관훈미술관)
6) 최용대 3회 개인전 (1999. 6. 1~6. 10, 조선화랑), 4회 개인전, (1999, 맥향화랑)
7) 최용대, 「시인(詩人)의 침묵(沈黙)」, 『CHOI YONG-DAE』, 1회 개인전 카탈로그, 태백화랑, 1992, 쪽수 없음.
8) Ibid.
9) 최용대,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숲」, 『La foret』, 12회 개인전 카탈로그, 갤러리 그림손, 2010, 쪽수 없음.
10) 최용대 5회 개인전 (2000. 1. 15~3. 19, La Nacelle, centre culturel d’aubergenville, 프랑스),
11) 최용대,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숲」, 『La foret』, 12회 개인전 카탈로그, 갤러리 그림손, 2010, 쪽수 없음.
12) 최용대, 〈La foret〉, 나무, 거울, 천, 철, 290x230cm, 2010.
13) 최용대,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숲」, Ibid.
14) 최용대,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숲」, Ibid.
15) 김성호, 「옆으로 자라는 나무 안으로 들어가기」, 『2013금강자연미술프레비엔날레』, 카탈로그, 2013, pp. 8-13. & 김성호, 「옆으로 그리고 비밀스럽게」, 『201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카탈로그, 2014, pp. 14-17.
16) 최용대, 「삶과 죽음 사이의 언어-숲」, ibid.
17) 최용대 13회 개인전 (2012. 3. 28~4. 10, 갤러리 그림손),
18) 최용대, 「무제」, 2011,『La foret-Choi, Yongdae』, 13회 개인전 카탈로그, 갤러리 그림손, 2012, 쪽수 없음.
19) Ibid.
20) Ibid.
출전/
김성호, 「삶/죽음 사이의 여백의 시공간」, 『최용대 전』, 전시 카탈로그, 2019. (최용대展, 2019. 7. 6~8. 28, 갤러리 오모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