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진
새롭게 평가된 38세에 타계한 천재화가
이인성(LEE INSUNG 李仁星 1912-1950)
이인성의 형성은 선천적인 자질과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이룩되었다. 일찍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인정받았고 후천적인 교육은 주로 도쿄화단 주변에서 받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가정 형편상 진학하지 못하고 서동진이 경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일하며 그림을 배웠다. 1931년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도일하여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았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하여 크레용 회사에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전에 꾸준히 출품하면서 작가의 위치를 높여갔다.
가을 어느 날 1934년
일제강점기간중 1930년대 우리 서양화단은 가장 활발한 그룹활동과 다양한 조형사상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야수파, 표현파, 추상미술 등의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전반이 없는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상이한 유파의 혼재현상이 일어났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17세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천부적 재능과 신선한 표현 감각을 발휘한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특선을 거듭하여, 천재화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1937년부터 1944년의 마지막 선전까지는 가장 성공적인 위치의 추천작가로 참가하였다. 1932년 전일본수채화회전을 비롯하여 1933-1935년의 제국미술원전, 1938년의 문부성미술전, 1933,34년의 광풍회전에 잇달아 입선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이인성 예술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경주의 산곡에서 1935년
해방후 이화여대 강사로 1948년 개인전(동화화랑)을 가졌고 국화회화연구소를 개설하였다. 1949년 1회 국전에 심사위원을 역임했지만 한국전쟁때 38세로 타계하였다. 수복후 혼란 중에 순경과 사소한 시비 끝에 총탄을 맞았다. 화가로서 영광을 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하여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하였으며 죽음마저 애석하게도 비명에 갔다. 사후에는 1972년 유작전(서울화랑), 1977년 미발표작전(문화화랑), 2000년 작고50주년전(호암갤러리). 2012년 탄생100주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있었다.
계산동성당 1930년대
이인성을 '향토적 서정주의' “한국의 고갱”이라고 부르며 인물초상에는 눈을 감은 그림이 많다. 이인성이 정립한 한국미는 향토성의 주제에 형태적인 것과 색감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강하며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로 인상주의 회화에 경도하여 감각적인 면에서 수용하였다. 원형적 구심감각에 도달한 그의 조형은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느껴진다. 색감은 건조된 감각의 조화를 바탕으로 다색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이 역시 향토적인 색감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붉은 색은 우리의 향토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던 것 같다.
해당화 1944년
이인성의 향토적 서정주의 한국적인 특징을 양식화 시켰으며 국전을 중심으로 후배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수채화에도 뛰어나 수채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유동적인 속도감과 세련된 감각을 여지없이 나타낸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는 소장한 자료 목록이 A4 9매, 스크랩북 3권이 있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 논문들이 나오고 대구에 이인성기념사업회(대표 이채원)가 있으며 1999년 이인성미술상(대구미술관 주관)도 제정되어있고 새롭게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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