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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 감각전

  • 전시기간

    2015-08-29 ~ 2015-10-31

  • 참여작가

    김창열, 방혜자, 진유영, 신성희

  • 전시 장소

    퐁데자르

  • 문의처

    02-733-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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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 감각(Primus Sensus),

프리마 마테리아(Prima Materia) 이후



심은록(SIM Eunlog 미술비평가, 감신대 객원교수)



존재의 뿌리 그 자체들이, 

만질 수 없는 감각의원천들이

서로 뒤엉켜 있다는 

이 가장 신비한 사실을

나는 당신께번역해주려고 애쓰고 있다.

 -세잔-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많은 문화예술 행사가 개최되는 의미있는 올해에,퐁데자르서울 갤러리가 개관하게 되었다. 2008년 파리에서‘에스파스 5에뚜왈’ (Espace 5 étoiles, ’퐁데자르’의 전신)이 개관된지 거의 7년 만이다. ‘퐁데자르’(Pont des arts)는 불어로 ‘예술의 가교’를 뜻하며,‘예술과 관련된 다양한 교류가 이뤄지는 중간지대, 그리고 이를 가능하도록 하는 ‘매개자 역할’을상징한다. 이름 그대로, 파리와 서울의 퐁데자르 갤러리에서 프랑스와 한국, 유럽과 아시아의 좀더 활발한 예술 및 문화 교류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퐁데자르‘서울’ 갤러리의 개관전 <근원적 감각>(Primus Sensus)에는 재불작가 4인, 김창열(KIM TschangYeul), 방혜자(BANG Hai Ja), 진유영(TCHINE Yu Yeung), 신성희(SHIN SungHye)가 초대된다.사실 재불작가라고 한정 짓는 것이 부당할 정도로 이들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과 세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이들의 화업은 평균 반세기를 넘어선다. 50여년이 넘게 전업작가로 작업을 해왔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은오로지 한 주제, 즉 김창열은 ‘물’(물방울), 방혜자는‘빛’ (그려진 빛), 진유영은 ‘그려지지 않은 빛’과 ‘생명’, 그리고 신성희는 공간의 ‘누아주’ (nuage 엮기)에 전념해 왔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박사 논문을 쓸 때,짧게는 3,4년, 길게는 10여년 동안 한 주제를 연구하고 학위를 받는데, 이들은 반 세기 넘게한 주제를 다뤄왔다. 처음에는 이들의 주제를 프리마 마테리아 (Prima Materia 근원적 물질)로 묶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보아오면서 느낀 것은, 세잔이 말하듯이, 이들 네 작가의 프리마 마테리아에는 이미 예술가의 감각과 존재의 뿌리들이 뒤엉켜져 있으며(근원적 감각), 이들은 그 신비를« 번역 »[작품으로 재현]하고 있는 중이었다.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병행 행사로 시작해서 올해 초까지 거의 2년 동안 개최된 « 프리마 마테리아 »[2013.5-2015.2]라는 흥미로운 전시가 있었다. 고대 철학에 의하면, 프리마 마테리아의 대표적인 4원소는  물, 공기, 땅, 불을 의미하며, 인간과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고대 그리스어로 ‘아르케’(arche)라고 한다. 프랑수아 피노의 미술관인 푼타델라 도가나에서 개최된 이 전시는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가난한, 빈약한’ 미술)와 일본의 모노하(Mono-ha. ‘Mono’는‘사물’, ‘ha’는‘그룹’을의미)를 비교하는 전시였다. 


이 전시를 보면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사이에 중요한 미술운동이었던 랜드아트, 쉬포르/쉬르파스,등이 함께 연상되고 비교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 미술 운동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횡포를 중단하고,‘프리마 마테리아’[근원적 물질]를 존중하자는 것이다. 자연이나 세계를인간의 개념으로 동일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려는 운동이었다.


하지만,메를로 퐁티는 나와 세계의 뿌리가 공존하고, 나의 신체는 이 세계의 깊이를 감각으로 느낀다고 했다. 이처럼 프리마 마테리아와 예술적 지각이 분리될 수 없게 섞인 것이 ‘프리무스 센수스’[Primus sensus근원적 감각]이다. 사실 고대 이오니아 철학자들이 ‘아르케’(arche)를 말할때도, 순수 물질이라기 보다는 지각이나 감각이 이미 포함된 지각화∙감각화된 물질이었고,이에 대한 감각은 ‘프리무스 센수스’이었다.



이러한 바탕하에, 메를로 퐁티는 어떤 행동의 동기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말한다. 즉, 내가 저 꽃을 그리고 싶다면 그 꽃에 동기가 있는 것이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육화된 주체는 이처럼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 꽃’에 있다. 나의 후각은 이미 저 꽃의 향기에 취해 있고, 나의 촉각은 꽃의 부드러움을 향유하고 있다. 꽃에 취해 있을때 누군가 나를 건드리면 소스라쳐 놀라며 다시 내 자신으로 돌아오는 연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마티에르를 볼때,이 마티에르는 우리의 감각과 분리할 수 없게 섞여 버린다. 이것이 바로 근원적 감각이다. 양자물리학에서는 관찰자의 현존에 의해, 그리고 관찰자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실험 결과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파장과 입자의 두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는 광자(光子)의 « 파장-입자의 이중성 »(dualité onde-particule ou onde-corpuscule)때문에, 관찰자는 자신의 실험 유형에 따라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세잔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질과 감각과의 밀접한 관계는 가장 큰 신비였으며 그래서 이를 ‘번역’해서, 즉 자신의 그림으로 보여 주려고 했다.



김창열, 방혜자, 진유영, 신성희도 이러한 신비를 번역하며, 깊이 잠들어 있던 우리의 감수성을 일깨워 예술을 향유하게 한다. 이 예술의 “향유”를 통해, “타인의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감수성” (임마누엘 레비나스)을 자극하고 발전 시킬 수 있게 한다.또한 이들의 작품들을 보면서, 정말 현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문제가 무엇인지 등을 물으며, “현대예술에 대한 진지한 관계를 가지게 되고, 이 시대에 대한 책임감”(발터 벤야민)을 상기하게된다.   




김창열, 2015, 캔버스위에 아크릴릭, 오일, 73x106.5cm


김창열 : 물방울, 감각적 이데아


뒤샹의 ‘변기’(<샘>), 워홀의 ‘캠벨 스프캔’, 뷔렌의 ‘8.7 cm 스트라이프’, 등.어떤 작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오브제가 있다.그 반대도 마찬가지다(vice versa). 이는 오브제 뿐만 아니라 색깔도 마찬가지인데, ‘클라인 블루’하면 이브 클라인이 떠오르고, ‘우트르느와르’(Outrenoir)하면 피에르 술라쥬가 떠오른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이데아하면 플라톤이 떠오르고, 아르케로서의 ‘물’하면 탈레스, ‘신의 죽음’하면 니체가, ‘인간의 죽음’하면 푸코가 떠오른다. 정신분석학에서 프로이드 하면 팔루스(phallus)가 떠오른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자신 만의 독특한 오브제,색깔,개념 등을 인식시키는 것은,예술,문화,사상사,등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기억되게 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들 중의 하나다. 즉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다. 물론 이처럼 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김창열’하면 누구나 바로 떠올리는 것은 ‘물방울’이다. 그래서 이우환은 김창열 작가가 “물방울이라는 하나의 메타포를 가지고 시각적으로 미술사에 남는 일을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평했다.


대동강변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창열의 프리마 마테리아는 ‘물’이다. 그는 이를 개체화하고 환영(幻影)화하여‘물방울’로  표현한다. 프랑스 화단에 그를 알린 최초의 물방울 작품 <밤의 사건>(Évènement de la nuit, 1972)을 보면, 프리마 마테리아에서 어떻게‘형태’(forme)로 그리고 ‘감각’으로 물방울이 태어나는지 잘 드러난다. <밤의 사건>에서는, 거대하고 무거운 물질의바다, 혹은 끝없이 깊고 어두운 메트릭스(matrice자궁, 모체)에서 한 방울의 형태로 물방울이 실제인듯 환상인듯 떠오른다. 인류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가 느꼈던 근원적 감각이 재현되고 있다. 탈레스는 물을 세상의 가장 근원적인 물질인 ‘아르케’라고 보았다. 우주도 인간도 사물도 모두 물을 근원으로 생성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니체는 그리스 철학은 ‘물’과 ‘매트릭스’로 시작된다고 했다. 바슐라르는 인간의 심층적인 상상 세계를 물질의 한 속성으로 파악, '물은 완벽한 시적 실제'라고 썼다. 동양에서도 노자는 '물'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이러한 다양한 발상을 모두 반영하면서, 김창열의 물방울은 모든 마티에르[모래, 나무, 마대, 등] 위로 흐르면서 감각을 선사한다. 그의 물방울은 세상의 이치를 시적(詩的)으로 노래하는 천자문 위를 흐르면서 ‘하늘’(天)이라는 글자 위에 놓여 궁창의 물이 되기도, ‘땅’(地)이라는 글자 위에 놓여 바다가 되기도, ‘사람’(人)에 놓여 삶의 희노애락을 쏟는 눈물 방울이 되기도 한다.


김창열의 물은‘사물’[phusis (φυσις)자연,physique  물리학]이자 동시에‘사물바로 다음에 오는’지각이나 인식[meta phusis(méta ta phusica)자연 뒤에, métaphysique형이상학]이다. 그는이러한 세상의 근원적 마티에르[감각 혹은 지각화된 물질]인 물에서 방울형태(형태화)가떠오르면서,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실재같은 환영(幻影)으로부터, 환상적인 '시적 실제'로, 그리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공’ 혹은 ‘무’로 까지그 신비를 다양하게 ‘번역’해 내고 있다.


70년대, 일본 ‘이케나바’ 잡지에 실렸던 김창열의 에세이는 “영웅은 여자를 좋아하고, 호걸은 술을 좋아하고, 바보는 물을 좋아한다.”라고 시작한다. 땅(현실)만을 쳐다보는 자들의 관점에서 보면,'바보는 물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이 맞다. 최초의 서구 철학자인 탈레스는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떨어졌다. 이를 본 영리한 트라키아 하녀는« 하늘의 이치는 알려고 하면서 바로 앞의 우물은 보지 못한다 »고 비웃었다. 이 일화를 말하는 플라톤(『테아이테토스Theaetetos』) 역시 평생 이데아만을 바라보며 걸은 사람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다 감옥이라는 우물에 떨어지기도 했다. 김창열이 미술을 시작할 그 당시는 더했지만 지금도 ‘바보’가 아니면 예술을 할 수 없다. 땅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별과 같은 예술만 바라보고 평생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예술이라는 별을 바라보고 평생을 걷다보면,실제로 화가의 몸은 수없이 우물에 빠져 다치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예술가들은 마침내 자신의 예술을 통해, 땅만 쳐다보는 영리한(?) 사람들에게 가끔은 하늘을 쳐다볼 수 있도록 한다. 김창열의 예술은 우리 시대의 아프로디테 우라니아 (Aphrodite Ourania 천상의 아프로디테, 플라톤『향연』)처럼 에로틱한 이데아, 감각적 이상과 같다. 비록 현대 예술이많이 대중화되고 세속화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여전히 지고한 이상을 가지고 매진하는 김창열과 같은 화가들이 있어 다행이다.

–심은록(SIM Eunlog 미술비평가,감신대 객원교수)




방혜자, 2013, 빛에서 빛으로(Lumière née de la lumière), 95x65.5 cm


방혜자 : 체험하는빛과 근원적 자연 색감


방혜자의 예술적 마티에르는 ‘빛’이다. 그는 일곱살 때 시냇가에서 놀다가 시냇물 바닥의 조약돌에 비친 빛, 물풀들의 움직임을 신비롭게 만드는 빛, 물위에 어리는 햇빛을 보며, 이 신비한 빛의 아름다움을 ‘번역’하고(그리고) 싶다고 느꼈다.그가 그린 첫 유화 작품인 <서울 풍경>에서부터 빛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비록 단 한 점의 작은 빛이었지만, 충분히 시선을 끌고 오랫동안 집중해서 보게 만드는 강렬한 등장이었다. 이러한 한 점의 빛이 점점 더 커지더니, 이제는 화면 전체에 빛(all overlight)만 가득하다. 신기한 것은 어두운 먹으로 그려진 검은 색조차도 빛의 한 구성원이 된다. 검은 색이 빛의 결여인 어두움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을 더욱 더 화사하고 부드럽게,더 리듬있고 다이내믹하게 보여주는 역할을하고 있다. 더욱이 방혜자는 천연 재료 만을 사용하기에 빛은 더욱더 자연스럽다. 작가는 그가 사용하는 천연의 물감들을 쇼베 동굴과 라스코 동굴이 멀지 않은 곳에서 구하고 있으며, 그 자신 또한 쇼베 동굴이 멀지 않은 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쇼베 동굴이나 라스코 동굴 벽화를 인류의 최초의 예술행위로 보고 있다. 이 최초의 예술가들이 동굴에 그림을 그리도록 예술적 본능을 자극한 것 중에는 그 주변에 널려있었던 아름답고 강렬한 색감도 포함될 것이다. 쇼베 동굴벽화나 라스코 동굴벽화의 색감은 오늘날 보아도 여전히 신비스러움을 간직하는 시적, 초월적, 근원적인 생명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이 색감을 보고 있노라면, 서구신화에서 ‘땅(가이아)’에서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성서에도 인간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이해가 될 만큼, 그처럼 생명력이 넘쳐 거룩함마저 느끼게 한다. 


방혜자는 최초의 인간을 매료했던 이러한 근원적인 자연의 색감을 마티에르로 사용하면서, 빛을 그린다.이 빛은 시냇물 위의 찰랑이는 빛부터, 빛으로 된 우주의 형태까지를 포함한다. 사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우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천체물리학자들이 그의 그림을 보고 우주 형태와의 상당한 유사성에 놀라고 감격해서 알려준 사실이다. 프랑스 천체물리학자인 다비드 앨바즈 (David Elbaz)는 수 회의 특강을 통해 우주의 형태가 얼마나 방혜자의 그림과 비슷한지를 설명했다. 특히 우주 위성 사진과 작가의 그림을 비교 했을 때, 어느 것이 우주 사진이고, 어느 것이 작가의 작품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방혜자는 위의 시냇물에서의 첫 빛의 체험 이후에,또다른 체험을 했다. 꿈 속에서 그는 큰 화폭에 바다를 그리고 있었는데, 바다의 물결이 출렁이고, 그 위에 햇빛이 비추면서 은빛이 물결에 실려 찬란하게 퍼져나갔다. 그는 이 빛을 그려나가고 있는데, 옆에서 또 다른 하나의 손이그 빛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깨어났어도 꿈은너무나 생생했고, 그 빛의 충만한 감각을 잊을 수 없었다. 빛은 작가를, 작가는 빛을 그린다. 그는 우리가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모두는 빛에서 왔으며 빛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오늘날과 같이 «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 »의 시대에,작가는 모든 존재가 빛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그의 예술을 통해 그 빛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심은록(SIM Eunlog미술비평가,감신대 객원교수)



진유영, Peinture et lumiere, 1012 a copy



진유영, 그리지 않은 빛과 화소분실 주조법


진유영은 ‘빛’을 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는 빛이 드러난다. 마치 제임스 터렐이 미술관 벽이나 천장에 커다란 창문을 뚫어 공간을 보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예를 들어, SAN미술관의 스카이스페이스 Skyspace, 호라이즌룸Horizon Room). 터렐은 공간 그 자체에는 어떠한 장치도 하지 않는다. 다만 공간을 전혀 새롭게 지각할 수 있도록 창문이나 문을 만들고 여기에 장치를 할뿐이다. 하지만, 그는 자연 그 자체, 공간 그 자체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으로 볼 수 있게한다. 마찬가지로 진유영도 빛을 제외한 모든 것을 그린다. 그럼으로써 ‘빛’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나무가지와 나뭇 잎을 그리면서도,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그리지 않는다. 그런데 관람자는 그 빛을 좀더 잘보려고 눈을 얇게 뜨고 바라보거나, 혹시나 그의 손위로 그 빛이 드리워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자신의 손을작품 가까이에 대어보기도 한다. 진유영의 그림을 보고 난 후, 길거리로 나와가로수 잎 사이의 빛을 바라보면[하늘이 하얗게 보일 때], 나뭇잎 사이로 어떠한 색깔도 없이 무한한 깊이의 빛이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방법은 중세에 신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한 ‘부정신학’과 같은 방법론이다. 감히 신을 규정할 수 없으므로, 신의 속성이 아닌 것을 하나씩 하나씩 말함으로써 신에게 겸손히 다가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신은 선이다’라고 하면, ‘신=선’으로 규정짓는 것이 됨으로, ‘신은 악이 아니다’와 같이 말함으로써 신을 비-규정 하려는 의도다. 요즘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정의되고 단정을 하는 시대에 다시 요청되는 겸허한 방법론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이상적 방법론 외에도 실천적이며 테크닉적인 또 다른 방법론인 ‘화소분실 주조법’ (lost-DPI casting)을 개척했다.


진유영은 예술부문 최초의 국비장학생으로 프랑스에1969년에 도착했다. 당시 헤겔주의자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에 영향을 받아 회화의 위기가 만연했던 때였다. 그는 이러한 위기를 ‘회화의 확장’을 통해서 극복했다.즉, 그는 작품을 하기 위해, 우선 오브제를 디지털 카메라로 아주 가까이 찍고, 이 구조물을 포토샵을 사용하여 크게 확대한다. 이 확대된 작품의 사진에 아날로그 방법인 고전적 수채화 작업 혹은 색연필로 데생을 하고, 이 작품을 다시 촬영하고 포토샵 작업을 거치며 디지털화 한다. 이를 반복하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회화와 사진, 물체와 영상, 은유와 실재를 오가며 회화의 영역을 ‘확장’한다. 이 과정을 그는‘화소(DPI)’ 분실 주조법 (lost-DPI casting)이라고 부른다. ‘화소’분실 주조법은  ‘밀랍 분실 주조법’ (lost-wax casting)과 대비하여 만들어진 조어이다. 밀랍으로 모형을 만들어 진흙을 덮어씌운 뒤, 열을 가해 밀랍을 완전히 빼내고 그 공간에 쇳물을 넣어서 원하는 활자나 모형을 만드는‘밀랍주조법’ (lost-wax casting)과 그 방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밀랍을 빼는 대신, 여러 번의 디지털과 아날로그 작업을 통해 ‘사진’ 혹은 ‘화소’(DPI)의 흔적을 모두 사라지게 한다. 작가는 이처럼 죽음,무관심, 이기주의, 근대주의, 등을 상징하는 화소를 조금씩 조금씩 제거하고, 대신 그곳에 빛과 같은 생명체를 집어넣고 있다.

–심은록(SIM Eunlog미술비평가,감신대 객원교수)




신성희, 공간별곡, coton-acrylique, 100 x100 2007 



신성희, ‘누아주’ 그리고 ‘공간별곡’


신성희는 리듬을 가지고 공간을 엮는다.  4원소설을 종합한엠페도클레스도 기본적인 4원소를 서로 엮으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인간의가장 근원적인구조인 DNA조차도 엮여있는지 모른다.


봄 안산의 단원미술관에서<신성희, 고향에 오다>라는 회고전이 있었다. 수년 전, 어떻게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냐는 필자의 질문에, 신성희는 망설임없이 « [고향의] 자연덕분에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그의 고향 집은 수락산의 치맛자락과 맞닿아 있고 앞 쪽으로는 시냇물이 흘러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편의시설이나 교통, 혹은 상가가 가까이 있는 것이 현재의 좋은 주거 환경이라면, 작가에게 좋은 환경이란 예나 지금이나 무엇보다 산수가 유려하고 물 맑고 자연의 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산에는 계절마다 꽃피고 지며 사철 옷을 갈아입고, 봄에는 주변 논밭에 개구리가 울고, 여름에는 매미가 합창하며, 가을에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계절의 변화를 듣는다. 계절의 변화를 체감온도로 느끼고, 계절의 옷갈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계절이 변하는 소리를 들으며자랐다. 이러한 자연 풍경를 보고 듣고 만지면서, 마치 맛있는 음식을 보면 맛보고 싶듯이, 어렸을 때부터 그는 자신이느낀자연 풍경을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한다. 


메를로 퐁티가 말했듯이, 신성희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예술의 동기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에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파리가 아니라, 자연의 손길이 더 직접적인 전원 도시 지역에 아틀리에를 가진 것도, 결국 밖에 무수히 널린 예술의 동기를 추수하기 위해서였다. 햇볕이 화창한 어느날, 그는 아틀리에에서 ‘누아주’를 엮는데[작업을 하는데],창가로부터 들어오는 햇빛도, 내부에서 생긴 그림자도, 바깥에서 들리는 새소리도 함께 엮여 들어갔다. 또한 그만의 독특한 움직임과 리듬으로 매듭이 만들어 졌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분위기와작가의 몸의 리듬이 느껴지는 듯 하다. 그가 누아주라는 기법을 창안한 것은, 오랜 시간과 연구 끝에 만들어졌음에도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는 공간과 공간 속에 있는 꽃향기, 개구리 울음, 산의 그림자, 햇빛의 따스함, 신체의 리듬,등을 모두 엮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는 캔버스를 찢음으로써, 2차원적 회화에 실제의 3차원적 공간을 끌어들이는 최초의 시도를 했다. 날카로운 면도날 자국은 공간의 긴장감을 생성했다. 이는 ‘명료한 자아동일성적(la mêmeté)인 높음’에서 ‘애매한 타자적 깊이’로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었으며, 서양화의 마티에르[유화는 안료를 쌓아 올리기에 ‘높이’를 만듬]로는 불가능 했던 ‘깊음’을 최초로 도입했다. 폰타나가 고정관념을 찢듯 캔버스를 찢으며 만들어낸 구멍은 ‘높이’가 아니라 ‘깊이’였다. 그런데 신성희는 회화의 ‘깊이’ 만이 아니라, 아예 공간의 다층성과 다양성을 개입시키며,리듬도집어 넣었다.오랫동안 원근법에 종속되어 왔던평면회화로부터 벗어나, 그는실제 3차원적인 입체회화를 실천했다. 


신성희는 새로운 ‘누아주’(nuage엮음) 분야를 개척했다. 마티에르‘와’ 감각, 너‘와’ 나, 회화‘와’ 설치, 등에서 ‘와’(et/and)의 역할을 하며,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다른 세계를 엮는다.그는 여전히 자연과 예술의 공간을 엮으며 그의 예술별곡을 부르고 있다. 별곡은 중국의 가곡과 관련하여 우리의 가요를 이르던 말로, 원래의 곡, 즉 원곡(原曲)과 내용이 다르게 만들어진 곡을 지칭한다. 원곡인 회화는 2차원에 머물거나 아니면 원근법에 의해 3차원을 흉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성희는 이 원곡과 달리, 2차원적 회화에 3차원적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별곡’을 노래하고 있다.

-심은록(SIM Eunlog미술비평가,감신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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