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연중 상설전시
서울시립미술관 2층 천경자 상설전시실
한국화, 드로잉 등 30여점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1998년,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천경자(千鏡子, 1924~ ) 화백은 시민과 후학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60여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온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그 기증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천경자 상설전시는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93점의 작품 중 최근 몇 년간 미공개 되었던 작품 30여점을 선보인다.
천경자 인물사진(사진 김정희 소장)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는 꿈과 사랑, 환상에서 비롯된 정한(情恨)어린 스스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하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은유한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식물로 표현되거나 상관없이, 그림은 나의 분신”이라고 말하는 천경자 화백의 작품 세계는 마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전시는 이처럼 자전적(自傳的)인 성격을 가지는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자기고백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환상의 드라마’, ‘드로잉’, ‘자유로운 여자’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새로운 주제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화백의 작품 기증이 지닌 참뜻이 다시 한 번 빛나길 바라며, 앞으로도 지속적 연구를 통해 다각도로 재조명될 천경자 상설전시에 대한 관람객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기대해본다.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와 해외여행지에서 본 이국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자마이카의 여인곡예사>(1989)와 같은 작품으로 구성된 섹션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에는 작가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린 다양한 모습의 여인들이 자리한다.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짙은 한의 정서는 천경자에게 있어 슬프지만 달콤한, 인생으로서의 매력이었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에서 ‘달콤한 한’이 깃든 그녀의 인생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환상의 드라마
“작품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미래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
‘환상의 드라마’ 섹션은 작가의 꿈과 환상, 동경의 세계를 표현한 자전적 성격의 채색화 작품으로 구성된다. 젊은 시절의 지독한 가난과 사랑의 상처로 인한 뼈아픈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그렸던 천경자의 대표작 <생태>(1951)로부터 안정된 생활의 행복감이 깃든 화사한 파스텔 색조의 그룹 인물화 <여인들>(1964), 그리고 말년의 고독이 느껴지는 환상적인 분위기의 대작 <환상여행>(1995), <황혼의 통곡>(1995)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추억과 오늘의 꿈, 미래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구성된 이 섹션은 시기에 따른 작가의 감정 변화가 녹아든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드로잉
‘드로잉’ 섹션은 화려한 채색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천경자의 색다른 모습을 조명한다. 작가는 하나의 선을 그을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과 추억이 되살아나 그림 그리는 것이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없이 즐거웠다고 말한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빠른 선으로 그려낸 드로잉 작품과 <생태>의 스케치 과정을 가늠해볼 수 있는 <뱀 스케치>(연도미상), 남태평양 여행지에서 그린 자화상 <아피아시호텔에서>(1969)와 같은 작품들에서 순간을 포착한 선의 생동감과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다.
자유로운 여자
‘자유로운 여자’ 섹션은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1984)를 포함한 다수의 수필집과 천경자 작품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9), 해외 스케치여행의 과정을 그림과 함께 담아낸 『아프리카 기행화문집』(1974) 등의 출판물을 선보인다.
글 쓰는 일은 작가에게 맺힌 한을 풀어내기 위한 일종의 ‘푸닥거리’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가 남긴 많은 책들은 당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를 만큼 그림 못지않은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학과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문학예술인 천경자’가 들려주는 감각적이면서도 솔직한 언어 속에 삶과 예술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열정이 녹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