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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이 그리고 있는 세상
최형순(미술평론가)
왜 인형인가
인형이어서 더 극적이다. 왜 인형인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작가 황효창의 답이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기에 더 독한 패러독스를 내뿜게 된다. 황효창의 인형그림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다. 어리고 귀엽고 착하게 생긴 인형이 소주 병 속에 들어가 있다. 술독에 빠진 인형이라니 기가차기 그지없다. 술로 밖에 말할 수 없던 암흑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말해준다. 인형의 입에 X자가 그어진 마스크가 씌어 있다. 인형의 입조차 틀어막은 그 권력이란 참으로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다. 개명하지 못했던 시대를 그렇게 견뎌온 7, 80년대, 그의 그림이 보여주었던 풍경들이다.
그의 인형은 오늘도 우리에게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이 여전히 감추어져 호도되고 있는 곳에서도, 촛불민심의 불길이 타오르려 할 때의 터질 듯한 긴장 속에서도 그의 인형그림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뻔한 것 같은 인형이 보여주는 미세한 표정 변화에서 읽게 되는 감정들이기에 그 효과는 훨씬 강하다. 사람처럼 표정을 바꿀 수 없는 인형,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는 인형에 미세한 표정과 행동을 입혔다. 사람 대신 인형을 그린다는 것은, 은유, 환유법 같은 문학적 수사법이 꼭 필요한 이유와도 다르지 않다. 직접적인 서술보다 비유를 통한 수사법이 훨씬 큰 효과를 내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 효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 대해 묻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인형들에 대해서, 그의 그림 자체의 뻣뻣한 기술을 혹시 지적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오늘의 미국미술을 열었던 그랜트 우드(Grant Wood)의 인물 그림이 ‘아메리칸 고딕’으로 불렸음을 상기해보자. 그것은 기법의 미숙함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였다. 세련된 르네상스에 앞선 시대인 중세의 고딕이 처음엔 미개함을 의미했지만, 20세기에는 고유함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게르만 일파 고트족의 미술인 고딕은 20세기 독일표현주의에서는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이었고, 히틀러의 퇴폐예술억압을 통과하며 더욱 강해졌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거의 세계 모든 곳에서 신표현주의의 물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유연한 기교보다 강렬한 고딕적 그림의 효과가 황효창의 인형과 오늘날 그의 그림 경향으로 읽히고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우리도 의미 있는 가치의 예 하나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형들의 의미
이번 작품전은 ‘인형그림’과 또한 ‘리얼리즘의 기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오늘의 인형이 보여주는 작품세계가 있다. 우리 역사의 5월(五月) 주제와 관련된다. 무자비한 폭력과 부당한 권력에의 저항 상징이 된 5월임을 짐작할 수 있다. 부도덕한 권력에 맞서 살을 에는 겨울밤을 녹였던 촛불의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다. <꺼지지 않는 촛불>이 바람 불면 꺼질 촛불이라는 터무니없는 폄훼 앞에서 오히려 굳건하다. 이 때의 인형은 강인한 철갑 같이 결기를 드러내는 모습이다. 그것이 비로소 평화의 희망 <비둘기>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촛불을 들고>는 의심의 여지없는 작가입장을 내보이고 있다. <촛불 든 두 사람>을 비롯해 가장 낮은 곳을 지키는 제주의 동자석뿐만 아니라 익명의 모든 이들이었을 <희망의 촛불>을 든 그 모두는 당시의 우리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모름지기 작가는 홀로 있는 개인이 아니다.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황효창 역시 우리의 현실을 줄기차게 말한다. 그는 이른바 해방둥이다. 고단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았다. 우리의 광복햇수만큼이 그가 살아온 인생의 깊이다. 그걸 인형으로 지금도 풀어내고 있다. 우리는 예술이 이런 것이라고 믿는다. 온 몸을 던져 살아낸 작가의 삶이 그대로 예술이라고 믿는다. 예술이 어떤 혈통을 타고나서 귀족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예술의 자격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술성을 담아야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면 그것이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게 또한 리얼리티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아니다. 미화한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거칠고 가슴 아픈 현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미술(美術)이라고 오해하지 않을 일이다. 진선미, 위악추가 모두 예술의 대상이고 희로애락 어느 것도 미술의 대상 아닌 것이 없다. 아름다움이란 그 예술이 빚어내는 감동의 크기에서 찾아야할 일이다. 그걸 담고 있는 인형그림이기에, 그의 5월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정신을 만나볼 수 있게 된다.
표현적 리얼리즘
표현적 리얼리즘은 춘천 구석구석을 담아왔던 이전 그림들과 함께 볼 수 있다. 그가 매일 걷고 산책하며 생각했던 그의 주변이다. 이번 전시는 ‘오월’의 몇 가지 중의적 뜻과도 무관하지 않다. 앞서 살폈듯 민주화를 위한 항쟁인 5.18 혁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5월에 여는 전시이기에 그렇다. 특이하게는 그가 사는 마을의 이름도 바로 ‘오월리’다. 물론 오월(梧月)의 한자 뜻은 따로 있다. 오동나무 또는 그 나무로 만든 거문고라는 뜻과 달, 또는 달빛이라는 뜻이니 풍류와 예술성을 가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이 오월리의 마을 구석구석을 담은 기록이자 역사니 그게 또 리얼리즘이 아닐 수 없다. 표현적이라는 것은 소위 고딕적인 현대의 표현주의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격하고 거칠고 될수록 간결하게 표현한다. 기교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충족되면 바로 붓을 놓아 긴장감이 가득한 그림이 되고 있다.
그렇게 담은 그림들은, 그의 마을을 한 번이라도 가 보았다면 다 알 수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 집>으로부터 <카페 ‘오월에’>까지 자주 <산책>을 나간다. 대략 5리 길, 내려가는 길은 대략 30분이 걸린다. 풍광 좋은 그 길을 따라 도착한 카페 그림에는 작가 부부가 함께 앉아 있다. 거기엔 그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있다. 춘천댐의 물길이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잔잔한 수면을 이루는 끝, 호수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산기슭으로 잔잔한 수평선을 만들어내는 물가의 가장 풍경 좋은 곳에 자리한 카페다. 거기엔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가 큐레이터를 자임하고 불러오는 작가들의 전시가 이어진다. 그곳에 들러 카푸치노 한 잔의 여유를 갖는 것이 꽤 오래된 즐거움이 되었다. 그 길에서 기록하고 있는 리얼리즘이다. 내려오는 길에 만나는 <언덕 위 버섯집>, <산내들 가든> 같은 음식점, 그리고 <강변 마트>는 산골과 사람들을 잇는 고리가 된다. <산골의 빈 집>이나 <겨울 숲>은 일탈과 얕은 치부도 담아내는 넉살을 읽게 한다. 그렇게 카페에 도착하면 그 앞에 마련된 쉼터에서 <가족 나들이>의 정겨운 풍경이 이어진다. 겨울이면 그 카페는 <겨울의 강변>을 준비하고, 밤의 산책길은 오동나무와 달이 있는 <보름달> 풍경을 빚어놓는다.
황효창과 예술세계
예술이 감동이어야 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억지를 쓰듯 쥐어짜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통하는 지점을, 제대로 살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삶과 예술은 무척이나 닮아있다. 그와 함께 한 문인들이 그걸 잘 말해준다. 가정이 있는 사람은 그를 만났을 때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시다보면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라는 소설가 이외수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밤새 술을 들이키다가 새벽녘, 오페라 문 앞에서 그가 곤하게 잠들어 있다. 쪼그린 채 잠든 그의 겨드랑에 투명한 날개가 돋는다.’ 시인 윤용선은 그림을 그리듯 그를 묘사하고 있다. 친구와 술은 그의 삶이 예술이게 하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후배들이 모여든다. 다음세대가 주변에 없는 사람이 좋은 기록으로 남을 수 없음을 그가 계산해본적도 없을 터이다. 세상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는 법, 그것은 분명 그의 예술세계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아티스트토크
2018년 6월 2일 오후 4시
진행 : 최형순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