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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화 :ONCE UPON A TIME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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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화_가배 – 무천_2020_캔버스에 유채_130.3x97cm


“내게 신화를 다루는 일은 오늘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같다.” – 최민화



최민화(1954년 서울 출생)의 개인전 《Once Upon a Time》이 갤러리현대에서 9월 2일부터 10월 11일까지 열린다. 본 전시는 최민화 작가와 갤러리현대가 함께 하는 첫 개인전이자, 그가 1990년대 말 처음 구상하고 20여 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동명의 연작 <Once Upon a Time>만을 모은 첫 번째 전시이다. 전시에는 60여 점의 회화와 40여 점의 드로잉 및 에스키스가 함께 선보인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도 잘 알려진 최민화의 작품 세계는 ‘민화’라는 그의 이름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1982년부터 본명 최철환 대신 ‘민중은 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최민화(崔民花)’라는 예명으로 작가로서 활동해 왔다. 그 이름처럼, 최민화의 작품 속 주인공은 언제나 ‘민중’, 즉 이 시대를 하루하루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 내던져진 그들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과 실존적 고민을, 인물화나 역사화라는 가장 오랜 회화의 장르로 캔버스에 포착했다. ‘잘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숨 가쁘게 진행된 근대화로 인해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부랑자’의 모습을 강렬한 색채와 표현주의적 붓질로 담은 <부랑>(1976-1988) 연작, 분홍색이 지배적인 화면 속 군상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권력을 향한 저항과 운동의 승리냐 실패냐의 기로에 놓인 인간의 조건을 성찰한 <분홍>(1989-1999) 연작, 민주화 투쟁의 뜨거웠던 역사적 현장을 대형 걸개그림으로 기록한 <유월>(1992-1996) 연작, 50대가 된 작가가 동시대를 함께 사는 청춘들이 도시를 방황하며 배회하는 유령 같은 모습을 회색빛이 강조된 쓸쓸한 분위기의 화면에 그린 <회색 청춘>(2005-2006) 연작이 이에 해당한다.

<부랑>, <분홍>, <유월>, <회색 청춘> 등 문제적 연작을 이어가던 최민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태국과 인도 등지를 여행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전통적 서사와 그에 걸맞는 상징적 이미지의 부재를 절감한다. 그는 <분홍> 연작을 마무리하던 1990년대 말부터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고대 시공간을 캔버스로 소환하는 새로운 연작 <Once Upon a Time>의 제작에 착수한다. 이 연작의 일면이 2003년 대안공간 풀(현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처음 공개됐다. 그는 <조선 상고사 메모>(2003-) 연작을 발표하며, 역사학자가 아닌 상상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화가의 창조적 관점에서 머나먼 옛이야기를 한국적 ‘도상’으로 만드는, 방대하며 무모할 정도로 야심에 가득 찬 작업에 돌입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작가는 <조선 상고사 메모> 연작에서 영화 홍보용 브로마이드나 상품 광고 포스터, 다른 사진가의 확대 복사한 사진 등 대량 생산된 이미지 위에 유화 물감으로 한국 상고사에 등장하는 웅녀와 해모수, <공무도하가>와 <서동요>의 주인공 등을 그려 놓았다. 이렇게 이미지를 전유하고 변용하는 포스트모던적 방법론은 <20세기>(2006-2007) 연작, <20세기 회화의 추억>(2008-2009) 연작 등으로 확장됐다. <20세기> 연작에서는 1937년 난징 대학살부터 1980년 광주 학살 현장까지, 20세기에 세계 곳곳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유명 보도사진을 마젠타 계열로 실사 출력하고 그 위에 유화 물감으로 색을 덧입혔다. <20세기 회화의 추억> 연작에서는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라 할 만큼 친숙한 영화 속 배우들의 이미지를 피카소, 베이컨, 달리, 워홀 등 20세기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정교하게 반복하는 유희적 그림 그리기를 시도했다. 21세기에 들어, 최민화는 인물화, 역사화, 풍경화 등의 장르로 구상회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심화하는 한편, 미술사와 대중문화에서 차용한 도상을 폭넓게 활용하며 메타 회화적 실험을 진행해 갔다. 그런 와중에도 <Once Upon a Time> 연작의 밑그림을 하나둘 발전시켰고,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 연작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후 <Once Upon a Time> 연작의 일부가 2018년 이인성미술상 수상을 기념해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천 개의 우회》에서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이라는 타이틀로 처음 선보였고, 갤러리현대의 이번 개인전에서 주요 작품의 실체가 비로소 공개된다.

최민화는 한국의 고대 이야기를 소재로 한 <Once Upon a Time> 연작을 통해, 한국인의 인문적 상상력의 영토를 무한 확장하는 새로운 타입의 도상을 제시한다. 작가는 고대를 제대로 읽고, 알고, 느끼고, 보기 위해서는 국경과 민족, 인종과 종교 등을 엄격히 구분 짓는 서구의 근대적 역사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덧붙여, 고대의 풍요로운 상징 형식과 심오한 문화적 유산들을 당대의 회화적 언어, 나아가 우리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 짓는 일이 이번 연작의 목표이자 제작 의도라고 설명한다. 그는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고조선에서부터 후삼국까지의 유사(遺事)를 모아 편찬한 역사서 『삼국유사』를 <Once Upon a Time> 연작의 서사적 뼈대로 삼았다. 역사서에 담긴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건국 신화, 그렇게 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을 먹여 살린 영웅의 탄생과 고난, 성장과 성공의 감동적 드라마, 생(生)과 사(死), 성(聖)과 속(俗), 농경과 유목의 삶이 혼재한 고대의 풍속과 생활문화, 희로애락이 깃든 인류 보편적인 흥미로운 이야기에 특별히 주목했다. 작가는 『삼국유사』 에 등장하는, 우리가 읽고 들어 익숙하지만, 시각적으로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주인공들을 도상으로 탄생시키기 위해 또 다시 회화적 실험을 감행한다. 그것은 최민화가 이번 연작에서 설정한 고대라는 시공간처럼, 동서고금의 경계가 해체된 이미지의 조합, 변주, 배치, 그리고 생성이라는 특유의 방법론이다.

최민화는 동서양의 신화적 종교적 도상들의 형체와 상징성을 다년간 연구했고, 1년에 1,2회 정도의 배낭여행을 떠나 본 광경을 내면화하며 수많은 드로잉과 에스키스를 완성해 갔다. 현재 진행형인 <Once Upon a Time> 연작은 동서고금을 대표하는 도상과 색감의 습합, 몇 개의 선만으로 캐릭터의 성격이나 장면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과감한 드로잉 테크닉, “그려진 여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그려지는 대상과 비워 둔 배경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구성 등의 시각적 특징을 지닌다. 우선, 관람객은 그의 화면에서 동서양 미술사의 수많은 전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최민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불화, 조선 민화와 풍속화, 도속화와 탱화 등의 한국 미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르네상스 회화, 힌두 및 무슬림의 종교 미술을 종횡으로 아우른다. 환웅이 웅녀에게 마늘과 쑥을 건네는 단군 신화의 장면이 이브가 사과를 먹자며 아담을 유혹하는 성서의 한 장면과 중첩되고, 달빛 아래 밀애를 나누는 조선 시대 남녀를 그린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이 신라 시대에 지어진 향가 <서동요> 속 선화 공주와 서동의 모습으로 인용 및 변주되며, 힌두 계열의 사원에 칠해진 색감으로 채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속 인왕산을 배경으로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 속 인물들이 한 화면에 놓이는가 하면, 르네상스 회화 속 근육질의 남성상이 민화를 장식하던 잉어, 거북, 복숭아, 소나무, 학, 오리, 산호초, 괴석, 연꽃, 영지, 사슴 등의 아름다운 길상문과 이물감 없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신세계가 목격되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주요 연작에서 내용과 형식을 단단하게 지탱하고 서로를 구분 짓는 장치로 분홍, 빨강, 회색, 마젠타 등의 특정 색채를 주도면밀히 활용한 작가답게, 이번 연작에서는 한국의 오방색 전통과 서양의 상대적 색채 개념과 달리 원심력을 갖고 퍼져나가는 힌두 문화의 문화적 색감을 혼성하여 투명하면서도 선명한 파스텔톤의 색감을 완성하였다. 캔버스의 물성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고 예리한 필선으로 물감을 엷게 칠하는 최민화만의 방식은 한국화의 세필 기법을 연상시키며, 마치 고대의 시공간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재생되는 분위기와 효과를 불러온다. 미술사학자 김계원은 <Once Upon a Time> 연작에서 최민화가 누구보다 고도의 필력(筆力)과 기예를 갖춘 작가 임을 증명한다고 평가하며, “<Once Upon a Time>을 관통하는 스타일이야말로, 작가가 역사를 형상화하는 방법론이면서 동시에 『삼국유사』를 현대적 언어로 번안하는 전략, 나아가 주제물의 동시대성을 확보하고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방안”이라고 해석한다.

1층 전시장에서 관람객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익숙하거나 낯선 신화적 인물들의 기념비적 초상을 만나게 된다.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간이 되길 바랐던 단군 신화의 웅녀와 호녀, 주몽과 동이, 대궁단인 등 낭만주의 초상화의 영웅처럼 손에 활을 쥔 남성미 넘치는 캐릭터들, 관음의 화신이 도와주어 성불(成佛)한 수도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달빛 아래 은밀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서동요>의 선화공주와 서동, 밤이 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산마루에 올라 애타게 기다리는 <정읍사>의 여인 등이 그 주인공이다. 신화적 의미를 강조하는 보석으로 장식된 이국적인 복장, 인물의 내면까지 드러내는 표정과 몸짓,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화면의 구도와 배경 등이 보는 이의 흥미를 자아낸다. 동서양 미술사의 다층적 문맥과 고도의 테크닉을 흡수한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능숙함과 거장다운 절제가 돋보이는 인물화들이다. 2층 전시장에서는 1층 전시장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하며, 고대의 시공간과 그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대서사의 장대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국가나 영웅적 인물의 탄생(환웅이 신시에 내려온 장면과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는 순간), 승리를 위한 치열한 전투와 고난(해모수 전투와 엄체수를 건너는 주몽과 그의 백성들), 강가에서 뱃놀이하거나 한가롭게 공후인을 연주하는 고대식 ‘풀밭 위의 점심식사’ 장면, 동서와 유목민과 농경민이 교류하는 시장과 동네 풍경, 소를 죽이는 카니발적 축제 현장 등이 그려진 작품들이 거리를 두고 자리한다. 근경과 중경, 원경 사이에서 몇 개의 겹을 이루듯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밀도 높은 화면 구성은 관람객에게 그림의 세부를 시간을 들여 감상하고 그 도상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지하 복도 전시장에는 최민화가 ‘민중적 시각’에서 흥미를 느낀 인물들의 모습이 자리한다. 물에 빠져 죽은 남편과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공무도하가>의 주인공인 백수광부와 백수광부의 처, 그들의 모습을 목격한 어부 곽리자고와 그 이야기를 듣고 노래로 지어 부른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 아내 여옥, 내면의 서러움을 격렬한 춤사위로 표현하는 <동동>의 여인, 유교, 불교, 도교 세 종교를 대표하는 도상들이 연꽃잎을 무대로 삼고 한자리에 모여 이러한 민중들의 애달픈 모습을 무심히 관망하는 듯한 <범망경> 등이 관람객을 맞는다. 지하의 안쪽 전시장에는 <Once Upon a Time> 연작이 진행된 지난 20여 년 동안의 타임라인을 확인할 수 있다. 화면 구성과 인물의 배치, 등장인물의 표정과 몸짓, 의복과 배경 처리 등을 무수한 버전으로 변주하며 도상학적 실험을 이어간 최민화의 오랜 미적 탐구의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질감의 종이와 캔버스, 나무판 등에 그려진 드로잉과 에스키스를 통해 만화, 퍼포먼스, 걸개그림 등으로 이어진 회화적 매체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방법론도 재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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