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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 : 하얀 물 푸른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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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없는 논에 농부가 나타났다

임승훈(소설가)

  소설에는 세 가지 화법이 있다. 직접 화법, 간접 화법, 자유간접 화법. 대략 다음처럼 설명할 수 있다.

                지원은 “나는 김치찌개가 싫어!”라고 말했다. - 직접 화법

                지원은 김치찌개를 싫다고 말했다. - 간접 화법

                지원은 김치찌개가 싫다 – 자유간접 화법

  사실 작법적으로 살펴보는 건 이정도면 된다. 어차피 문자 매체의 화법이라는건 유럽어권에서 발달한 거여서, 한국어로는 프랑스나 영미권처럼 화법을 능수능란하게 구현하긴 힘들다.

 

  어쨌든 이 화법의 차이에 따라 서술자와 대상 간의 관계성이 조정된다(사실 수용자 역시 화법에 따라 관계가 달라진다). 직접 화법은 객관적 재현에 가깝다. 간접 화법은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자유간접화법은 객관적이기도 하고 주관적이기도 한 미묘한 경계에서 발화된다.


  화법을 언급한 이유는 최근 박선의 새로운 논 연작 때문이다. 얼마 전 박선은 인스타그램에 농부를 그렸다. 이전까지 그녀의 ‘논 연작’에는 농부가 부재했었다. “농부 없는 논이라니” 한 달 전 내가 이렇게 얘길 하자 박선 작가는 그런 피드백은 처음 받는다고 했다. 그럴 법 했다. 미술사에선 정물화나 풍경화가 오래 전부터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굳이 농부의 부재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가 있었다. 박선 작가가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작의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나는 초여름의 모내기 풍경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그리고 한 농부 할아버지의 느릿느릿한 호흡을 선과 색으로 표현한다. (중략) 나는 그의 노동의 제스처를 모방하여 붓으로 모내기를 하였다.


  이게 내 눈길을 끌었다. 농부에 대해 이렇게 할 말이 많은 작가가 정작 농부를 그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녀의 문장대로 이해해 보자면 그녀는 농부에 빙의된 채 붓을 놀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논 연작은 농부의 눈에 비친 세계였다. 일종의 1인칭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렇다면 농부가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보면 그녀가 그린 논의 조형성도 이해가 된다.


  본래 농지는 사각형으로 구획화되는 게 일반적이다. 수학적으로 명확한 사각형은 아닐 지라도 사각형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그게 농수나 동선의 확보하기에 더 효율적이며, 당연히 농지를 거래할 때도 매매 가치를 산출하기에 훨씬 용이하다.


  그런데 박선의 논은 그렇지 않았다. 논은 마치 반고체처럼 휘어지고 흐물거렸다. 때로 어떤 작품에서는 반고체가 아니라 반액체에 가깝게 형상화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종종 용천수가 대지로 쏟아져 넘실거리다 제 힘에 못 이겨 굽이치는 것처럼 그려졌다.


  그랬다. 이런 광경이야말로 농부의 눈에 비친 세상일 터였다. 논은 단순히 삼각 함수의 집합으로 설명할 수 없을 거였다. 농부에게 논은 비가시적인 위협과 불안, 역치와 또 그 이상의 역치가 거듭 펼쳐지는 초월적 시공간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초감각의 세계를 형상화할 때는 1인칭만한 게 없다. 나는 늘 소설을 쓰기 전에 시점을 고민한다. 시점을 결정하면 소설의 7할이 결정될 정도이다. 때로 어떤 이들은 1인칭 세계가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오만인 것처 말한다. 실제로 어떤 작품들은 그럴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1인칭은 그렇지 않다. 극도의 1인칭은 오히려 세계를 더 첨예하게 드러낸다. 왜냐하면 1인칭 화자는 세계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 존재를 둘러싼 사물들이 측량을 초월해 물활적 상태에 돌입하게 되고, 결국 화자와 적극적인 상호 작용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1인칭 세계에서의 감각화는 이를 테면 투명인간의 몸에 내리는 비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깨닫게 하는 것이다. 확실히 1인칭적 경험을 통과하고 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것보다 풍부하다라는 걸.

  그렇지만 이걸로 끝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비가시적인 시공간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깨닫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정량적인 질서를 습득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이를테면 3인칭적 관점에서 수립되는 세계 같은 것. 혹은 시점이 아니라 화법으로 칠 수도 있겠다. 간접화법의 건조하고 추상적인 정보들 같은 것 말이다.


  이 글이 소비되는 장을 고려했을 때, 이쯤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에 대해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일상에선 주관성을 비사회적이며 비실체적이고 비논리적인 느낌적 느낌으로, 객관성을 실체적이며 정확하고 물리적 감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관이야말로 실체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실체적 감각을 그러모아 추상화시킨게 객관이다. 세계는 이 주관과 객관의 결합 하에 온전히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선의 논에 농부가 등장한 게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앞서 그녀의 논 연작은 농부의 1인칭 시점에서 묘사된 주관적 세계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빙의 됐던 농부가 스르륵 빠져나가 작품 내부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 이 광경을 바라보는 화자는 누구란 말인가? 또한 논과 상호 작용하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사실 헷갈릴 것도 없다. 여전히 이 풍경은 논이다. 이 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경험하는 이도 여전히 농부일 것이다. 그저 바뀐 거라고는 이제 그 농부와 서술자가 분리됐다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시점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1인칭에서 3인칭으로.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작품이 완벽한 3인칭적 객관의 세계로 전환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박선이 그린 논은 구불구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 전보다 더 격렬하게 유동적이었다. 그러므로 농부가 합세한 새로운 작품은 다성적인 상태, 혹은 수행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농부와 논의 관계가 객관적으로 형성되고, 그들 세계와 작가는 다시 주관적 관계를 맺고 있다. 마치 자유간접화법처럼 객관과 주관이 동시에 작동하는 기묘한 공유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물론 나는 단순히 자유간접화법으로 비유된 현상을 박선이 마땅히 도달해야 할 도착지라고 여기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내가 주목한 건 농부가 없는 논의 풍경이었고, 그녀가 화자적 자의식을 노출하는 메타적 화법이었다. 그건 그거대로 꽤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부지불식간에 노출한 어떤 변모점에서 나는 젋은 예술가를 따라가는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됐다. 흥미롭지 않은가? 젊은 예술가가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과정을 실 시간으로 목격하는 것 말이다.

  이 글에 박선이 어떻게 반응할지 나도 모르겠다. 원래 그녀의 전시에 보낼 글은 전혀 다른 거였다. 나는 농부의 부재에 대해 길게 서술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 느닷없이 박선의 인스타그램에 농부가 나타났다. 그녀와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서 정확한 건 파악 하지 못했지만, 나 혼자 어떤 상상을 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였다. 만약 한 달 전의 내 “농부 없는 논이라니”라는 말에 그녀가 반응한 거라면?


  그래서 원래 썼던 글을 지웠다. 텅 빈 화면에 새로운 문장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건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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