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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ris Disembo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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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치미술
Hubris Disembodied



초대일시
opening
2011. 12.3 토요일 5pm.

관람가능시간 및 휴관일
9 am - 6 pm


전시서문

Hubris Disembodied


뜨거운 햇볕에 녹아 내린 날개처럼 덧없이 스러진 이카루스의 꿈. 태양에 닿고자 하늘 높이 오르고 올랐지만 한 순간 날개를 잃고 바다로 떨어져 포말처럼 사라진 이카루스. 그는 순리를 거역하는 무모함과 오만함의 상징인 동시에 이상을 좇아 운명과 겨루다 비극적 종말을 맞고 마는 낭만적 영웅의 전형이다. 이런 역설적 가치와 평가 들이 공존하기 때문일까. 이카루스는 ‘예술’하는 이들의 이상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지나친 자신감’, 자만’, ‘오만함’ – 우리말은 차치하고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들로도 옮기기 힘들기에 라틴어 문화권에서도 있는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 등을 뜻하는 라틴어 hubris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그 사전적 의미 이면에 조금만 절제할 수 있었더라면, 조금 더 넓고 멀리 볼 수 있었더라면, 조금 더 신중하고 현명하게 행동했더라면 자만, 오만의 결과를 피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 안타까움, 그리고 무엇보다 애정이 살포시 감춰져 있는 역설적 단어이고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hubris를 지난 5~6년 동안 시도했던 서로 다른 네 가지 작업들을 이어주는 키워드로 삼아 자신의 작가 정신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젊은 예술가 강석호의 시각적 비망록이 바로 'Hubris Disembodied'이다.

더 높은 목표, 더 많은 성취를 좇느라 뒤를 돌아보고 주변의 얘기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 현대인들. 더 높은 가격, 더 높은 명성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나를 알리고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과 소통에는 소홀한 오늘날의 예술가들. 강석호의 개인전 'Hubris Disembodied'는 그런 이카루스의 후예들을 은근히 짓누르는 예술적 심문이고 그들의 야무진 꿈의 그늘에 가려있던 것들을 들춰내 일깨우는 예술적 비판이자 자신의 나아갈 바를 밝힌 예술적 선언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처럼 되지 말자고, 그리 되면 아니 된다고 스스로를 벼리며 작업해 온 작가의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노력의 소산이다.
하지만 비판의식으로만 똘똘 뭉친 가시 돋친 질책이나 자만과 오만의 소치를 꾸짖기만 하는 성난 힐난은 아니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애정을 담아 창작하고 해학적으로 갈무리한, 시적 깊이가 느껴지는 visual narrative이다. 보는 이를 사색과 자기성찰로 이끄는 이야깃거리들을 켜켜이 쌓는 작업을 photo-documenting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회화적인 동시에 조각적이지만 회화도 조각도 아닌, 설치이고 퍼포먼스이면서 사진이기도 한 다매체 예술이다. 그렇다고 경계를 허문다거나 ‘통섭적’으로 모든 것들을 아우른다는 미명 아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뒤섞는 요즘의 ‘잡탕식 예술’로 오인해서는 안될 일이다. 비싼 값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화려하고 예쁘기만 한 작업, 얕은 꾀와 빤한 상혼으로 예술을 상품화 한 ‘감각적인’ 작업 들과 그 궤를 달리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그런 오만함과 뻔뻔함을 예술로부터 떨어내고 ‘진정성’으로 속이 꽉 찬 창작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작가의 솔직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다각적 모색이고, 그 흔적들의 콜라주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뭔가 거창하고 그럴싸한 아이디어, 신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기법이나 귀를 홀리는 자극적인 ‘말빨’ 없이도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신의 영역 #1'과 '신의 영역 #2'이다. ‘발견’도 ‘발명’만큼 경이롭고 감동적인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들이기도 하다. 아라비아 사막 한 가운데 오롯이 홀로 서 있는 나무. 그 나무의 처절하리만치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저만치 떨어진 곳에 모래를 뚫고 올라와 얼만큼 더 뻗어 나간 뿌리. 그리고 그 앞으로 지나가던 사막의 배, 낙타가 남겨놓고 간 가장 원초적인 삶의 흔적. 로켓을 타고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땅에 천착하는 생명의 신비는 여전히 경이로움을 날카로운 통찰력과 시적 감수성으로 담아낸 수작이 '신의 영역 #1'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토록 경이로운 생명의 힘과 의지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음을, 존재의 덧없음을 작가 특유의 시적, 지적 감수성의 필터로 걸러내 보여주는 작품이 '신의 영역 #2'이다. 이렇게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생명의 두 양상, 존재의 두 단계를 나란히 보여주는 이유가 무얼까. 아마도 답은 '신의 영역'이라는 제목에 있는 듯하다. 신의 상징이기도 한 태양. 그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던가. 삶과 죽음, 존재와 스러짐, 경이로움과 덧없음, 생명이라는 소우주와 태양계를 포함하는 무한의 우주. 이 모두가 신의 영역에서는 늘 있어 왔던 그저 그런 것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hubris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임을, 태양에 도달하지 않고도 태양을 품을 수 있는 길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 아닐까.




채집한 오브제들을 나무 테이블 위에 설치했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 #2'과 짝을 이루는 '고장 난 브레이크 #2'. 하지만 두 작품의 공통점은 외형적 설치 조건과 기법이 같다는 것뿐이다. 제목부터 노골적인 '고장 난 브레이크 #2'에는 팔심 좋은 투수가 온 힘을 다해 뿌리는 직구 같은 정직한 힘과 비판의지가 실려 있다. 작가 특유의 ‘필터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던지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어쩌면 '신의 영역 #2'와는 태생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민족과 국토의 분단, 남북의 군사적 대치, 종전이 아닌 휴전의 상황 등등 한국전쟁의 여파와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에겐 전쟁무기와 군사장비의 잔해들이 시적, 예술적 승화의 대상으로 비쳐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GOP – General Out Post, 휴전선 상의 남방한계선을 뜻하는 용어로 일반전초라고도 한다 – 에서 군생활을 할 때 비무장지대를 드나들며 채집해 둔 것들이 작품의 소재라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들을 펼쳐 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데올로기의 맹신이 가져온 소통의 단절과 파괴적 충돌,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낳은 ‘어둠의 자식’ 대량살상무기의 사용, 그리고 그런 참화를 빚어낸 인간의 자만과 어리석음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고장 난 브레이크'라는 위트 있는 제목을 통해. 그리고 전쟁의 부스러기들 사이에 버터나이프를 슬며시 놓아두고 선글라스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도록 배치함으로써.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욕심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눈부신 물질문명을 일궈낸 인간지성에 대한 자만을 멈추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깨지고 부서져 뒤죽박죽되어 버리는 참담한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 보라며 찡긋 윙크하는 듯한 선글라스에서 시선을 돌리면 '고장 난 브레이크 #6'가 눈에 들어온다. 언뜻 Marcel Duchamp의 유명한 작품 'In Advance of a Broken Arm'의 눈삽을 떠올리게 하는 '고장 난 브레이크 #6'. 'Hubris Disembodied' 최고의 문제작이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부러지고 삭아버린 삽 한 자루에 '고장 난 브레이크'라는 제목을 붙인 작가의 의도는 과연 무얼까. 또 hubris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 Duchamp의 눈삽을 두고 언어학적 근거를 들어 남근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고장 난 브레이크 #6'는 생산이라는 순기능을 할 수 없게 된 부러진 남근을 상징한다고 봐야 하는 걸까.
혹 남근이 상징하는 조절되지 않는 공격적 성향과 그 위험성을 고장 난 브레이크에 비유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hubris의 산물 한국전쟁, 휴전, 휴전선, 분단, 그리고 뒤늦은 통일 노력을 뭉뚱그려 ‘삽질’에 빗대어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냉소적이지만 엄중한 경고일 수도 있겠다. “우리 ‘삽질’ 좀 그만 합시다!”

대지미술, 설치미술의 대가 Christo와 그의 아내 Jeanne-Claude가 미국 미주리주 캔사스시티에 있는 Jacob Loose Park에 설치했던 1978년 작 'Wrapped Walkways'를 연상시키는 연작 '고장 난 브레이크 #1'과 '고장 난 브레이크 #5'에서는 묘한 흥이 느껴진다. 아니 짜릿함이라고 하는 편 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휴전선. 그 남방한계선 GOP 철책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통로를, 그것도 몇 킬로미터나 되는 긴 구간을 방수처리 한 색색의 천으로 뒤덮는 행위. 굳이 대지미술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거창하고 놀랍도록 신선하며 뼛속까지 짜릿한 큰 스케일의 작업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작업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매체가 이 작업에 대한 기사들로 도배되다시피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마도 예술가 강석호의 작업이 아니라 ‘육군장교’ 강석호가 지휘한 동원 작업의 성과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니고 GOP에서 벌인 일이었으니 그 사실이 외부로 알려졌다간 대한민국 육군의 수뇌부가 문책을 당할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그런 일을 벌인 사실만으로도 육군장교 강석호는 소위 ‘영창감’이었음이 분명하고.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hubris가 빚어낸 어처구니 없고 참담한 결과물 중 하나인 GOP에서 벌인 ‘금지된 장난’이었기 때문에 이 연작에서 짜릿함,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싶다. 더 짜릿한 것은 그 ‘금지된 장난’의 산물이 GOP를 덮어버린 땅 위에 뜬 무지개란 사실이다. 40일간의 대홍수가 끝나고 맑게 갠 하늘에 뜬 무지개는 하나님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약속의 징표였다고 한다. 당신의 형상을 본떠 만든 인간을 당신의 손으로 없애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 그렇다면 예술가, 아니 육군장교 강석호도 땅 위에 무지개를 띄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약속하려 했던 것일까. 혹 다시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날렵한 호흡 #1 – Presto>, <날렵한 호흡 #2 – Vivace>, <날렵한 호흡 #3 – Vivacissimo>, 그리고 <네 걸음 이어진 호흡 – Andante>까지 넉 점의 <호흡> 연작 역시 예술가 강석호가 육군장교로서 땅 위에 남긴 흔적의 기록이자 완성도 높은 사진작업이다. 흥미로운 것은 몹시 회화적인 이 작품들이 동양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는 사실이다. <날렵한 호흡 #3 – Vivace>와 <네 걸음 이어진 호흡 – Andante>가 특히 그런데 용트림하며 뻗어 오르는 노송을 굵은 붓으로 쳐 나간 듯하고 설중매를 쳐 놓은 듯도 하다. 동양화에서 운필이 호흡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감안하면 작가 자신도 수묵화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악에서 사용되는 나타냄말을 부제로 붙인 것도 눈에 띄는데 붓 놀림 속도에 따라 획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처럼 <호흡> 작업에서도 속도와 느낌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려 했다는 점이 재미나다. 언뜻 사혁의 <고화품록>에 등장하는 ‘화론육법’ 중 기운생동과 골법용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탈리아어로 된 음악용어에서 ‘화론육법’이 연상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하지만 <호흡> 시리즈는 기법상 액션페인팅에 가까운 작업이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눈 내린 어느 날 아침 제설작업에 동원된 병사들이 눈밭 위에 남긴 발자국, 빗자루 끈 흔적 들로 이뤄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호흡>의 실제 작업(?)을 한 병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지휘자의 명을 따른 것뿐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정작 놀라운 것은 그 수많은 어지러운 흔적들에서 이런 작품들을 이끌어 낸 작가의 통찰력과 예술적 기지, 그리고 섬세한 감수성이다. 문득 이런 작업을 두고 현대미술의 영원한 화두 ‘autonomy of art’ – ‘예술의 자율성’쯤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 를 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autonomy of art’를 논한다는 게 지독한 오독에서 기인한 ‘삽질’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의 ‘자목적성’, ‘자율성’ 등을 논의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호흡> 연작이 ‘autonomy of art’에 닿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작품들을 이번 전시에 포함시킨 작가의 의도는 무얼까.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hubris의 비극적 결과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임을 감안하면 그 전쟁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과 일 들에 대한 작가의 체험 자체가 hubris와 연관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GOP 통로를 천으로 뒤덮는다든가 전쟁의 잔해들을 채집하는 행위를 희망의 싹을 찾으려는 실존적 노력인 동시에 hubris에 대한 예술적 비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설작업을 포함해 군복무 중에 하는 모든 일들을 hubris를 상징하거나 연상시키는 것들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일까. 병역의 의무 자체, 군생활 전체를 hubris로 해석해도 되는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작가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흔적> 시리즈를 이번 전시에 포함시킨 것일까. 혹시 hubris를 떨어내려는 노력이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hubris를 떨어낸 상태에서 한 작업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

문득 ‘autonomy of art’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로 유명한 아도르노 (Theodor Adorno) 의 명저 <미학 이론 (Äesthetische Theorie)>의 첫 구절이 떠오른다.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그러고 보니 <날렵한 호흡 #1>은 수묵화가 아니라 어디선가 보았던 쟝 뒤뷔페 (Jean Dubuffet)의 ‘앵포르멜 (Informel)’ 작품을 닮은 듯도 하다. 아도르노의 명제처럼 <호흡> 연작에 관한 한 아무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한 듯하다. 그런데 ‘자명하다’는 표현이 그토록 단정적으로 사용된 아도르노의 명제 또한 hubris의 산물은 아닐까. 아니면 그 명명백백한 명제를 부정하고 거스르려 하는 것이 hubris일까.




'날렵한 호흡 #1 – Presto', '날렵한 호흡 #2 – Vivace', '날렵한 호흡 #3 – Vivacissimo', 그리고 '네 걸음 이어진 호흡 – Andante'까지 넉 점의 '호흡' 연작 역시 예술가 강석호가 육군장교로서 땅 위에 남긴 흔적의 기록이자 완성도 높은 사진작업이다. 흥미로운 것은 몹시 회화적인 이 작품들이 동양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는 사실이다. '날렵한 호흡 #3 – Vivace'와 '네 걸음 이어진 호흡 – Andante'가 특히 그런데 용트림하며 뻗어 오르는 노송을 굵은 붓으로 쳐 나간 듯하고 설중매를 쳐 놓은 듯도 하다. 동양화에서 운필이 호흡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감안하면 작가 자신도 수묵화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악에서 사용되는 나타냄말을 부제로 붙인 것도 눈에 띄는데 붓 놀림 속도에 따라 획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처럼 '호흡' 작업에서도 속도와 느낌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려 했다는 점이 재미나다.
언뜻 사혁의 '고화품록'에 등장하는 ‘화론육법’ 중 기운생동과 골법용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탈리아어로 된 음악용어에서 ‘화론육법’이 연상된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하지만 '호흡' 시리즈는 기법상 액션페인팅에 가까운 작업이라고 해야 옳을 듯싶다. 눈 내린 어느 날 아침 제설작업에 동원된 병사들이 눈밭 위에 남긴 발자국, 빗자루 끈 흔적 들로 이뤄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호흡'의 실제 작업(?)을 한 병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지휘자의 명을 따른 것뿐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정작 놀라운 것은 그 수많은 어지러운 흔적들에서 이런 작품들을 이끌어 낸 작가의 통찰력과 예술적 기지, 그리고 섬세한 감수성이다.
문득 이런 작업을 두고 현대미술의 영원한 화두 ‘autonomy of art’ – ‘예술의 자율성’쯤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 를 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autonomy of art’를 논한다는 게 지독한 오독에서 기인한 ‘삽질’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의 ‘자목적성’, ‘자율성’ 등을 논의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호흡' 연작이 ‘autonomy of art’에 닿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작품들을 이번 전시에 포함시킨 작가의 의도는 무얼까.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hubris의 비극적 결과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임을 감안하면 그 전쟁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과 일 들에 대한 작가의 체험 자체가 hubris와 연관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GOP 통로를 천으로 뒤덮는다든가 전쟁의 잔해들을 채집하는 행위를 희망의 싹을 찾으려는 실존적 노력인 동시에 hubris에 대한 예술적 비판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설작업을 포함해 군복무 중에 하는 모든 일들을 hubris를 상징하거나 연상시키는 것들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일까. 병역의 의무 자체, 군생활 전체를 hubris로 해석해도 되는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작가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흔적' 시리즈를 이번 전시에 포함시킨 것일까. 혹시 hubris를 떨어내려는 노력이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hubris를 떨어낸 상태에서 한 작업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 문득 ‘autonomy of art’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로 유명한 아도르노 (Theodor Adorno) 의 명저 '미학 이론 (Äesthetische Theorie)'의 첫 구절이 떠오른다.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그러고 보니 '날렵한 호흡 #1'은 수묵화가 아니라 어디선가 보았던 쟝 뒤뷔페 (Jean Dubuffet)의 ‘앵포르멜 (Informel)’ 작품을 닮은 듯도 하다.
아도르노의 명제처럼 '호흡' 연작에 관한 한 아무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한 듯하다. 그런데 ‘자명하다’는 표현이 그토록 단정적으로 사용된 아도르노의 명제 또한 hubris의 산물은 아닐까. 아니면 그 명명백백한 명제를 부정하고 거스르려 하는 것이 hubris일까.




'Hubris Disembodied'의 백미 'Trans-Society #1'는 아직 진행 중인 작업의 중간보고 혹은 완성될 작업의 ‘프리뷰’쯤 되는 작품이다. 오래된 영한사전 한 권을 산에서 채집해 온 흰개미들과 함께 플라스틱 상자 안에 넣어두고 사전을 먹이 겸 집 삼아 살아가는 흰개미들이 남기는 흔적, 그리고 흰개미들에 의해 변형되고 있는 사전의 모습을 기록하는 작업. 이 실험적인 작업이 어떤 모습과 상태의 최종 결과물로 남게 될지 자못 기대된다. 그렇다고 'Trans-Society #1'의 작품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완성될 작품보다 완성도가 높을지도 모르겠다. 거의 전적으로 흰개미들에게 달려 있는 이 실험적 작업의 결과와는 달리 작가의 의지와 의도를 원하는 만큼 드러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Trans-Society #1'은 스스로를 ‘상대적 절대자’로 규정지은 작가의 ‘개념미술적 실험’의 설명서인 셈인데 개념미술에 있어서 설명서가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다. 개념미술의 대가였던 솔 르윗 (Sol LeWitt)의 정의에 따르면 개념미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아이디어인 반면 실제 작업은 도식적, 기계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흰개미들이 하고 있는 작업과 그 결과보다 작가의 아이디어가 잘 기록된 설명서 'Trans-Society #1', 그리고 아이디어의 집약인 제목 'Trans-Society'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횡단’, ‘초월’, ‘변화’, ‘이전’ 등을 의미하는 영어의 접두사 ‘trans’를 ‘사회’를 뜻하는 ‘society’와 연결시켜 만든 신조어 ‘trans-society’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생각은 무얼까.
영어를 우리말로 풀이해 옮겨 놓은 영한사전은 근본적으로 ‘trans’라는 뜻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전은 그 자체로서 다중적인 society이다. 생각의 집적인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들과 그 단어들이 인쇄된 종이의 집합, 즉 지적, 언어적, 물리적 society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흰개미 작업’에서 사전이라는 다중적 society는 그것을 갉아먹고 거기에다가 길을 내고 집을 짓고 살아가는 흰개미들에 의해서 생물학적 society의 일부가 되는 동시에 본래의 의미와 기능, 존재가치가 변질되고 변화된 일종의 초월적 society가 된다. 작가가 생각한 ‘trans-society’는 바로 이 초월적 society가 아닐까. 상대적이긴 하지만 절대자인 작가의 생각대로 진행되지만은 않는, 작가의 생각을 기계적으로 수행하기만 해야 할 흰개미들의 본능적 삶의 의지가 개입될 수 밖에 없는 작업. 그렇다면 이 개념미술적 실험은 ‘반 개념미술적’ 의도에서 시작된 것일까.
아니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는 개연성까지 미리 생각하고 작업을 생각한 작가의 생각 자체가 아이디어인 ‘반전 개념미술’인 것일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것을, 그러니 hubris를 떨어내고 인간의 유한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리라.



“예술은 행복에의 약속이다 (promessedubonheur)”라는 스탕달 (Stendhal)의 말이 있다. 처절하게 고민하고 한결같이 노력하는 젊은 예술가 강석호의 개인전 'Hubris Disembodied'는 그 약속을 실현하고 실천하겠다는 또 하나의 약속이다.
김영준(Art 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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