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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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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Kim-Tschang-Yeul 전
 2014. 2. 21 ~ 5. 6
2013. 2. 21(금), 오후 4시




김창열의 물방울과 회귀 

홍윤리 |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물방울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은 한국 현대작가들 중 서양화단에 뿌리를 내리고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국제적인 화가로서 그에겐 서양미술사 속의 영향관계와 여러 미학적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다니엘 아바디(Daniel Abadi)는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 유럽의 극사실주의 작가들이 제기한 문제인 작가들의 과도하고 무절제한 표현과는 달리 절제됨과 신중함을 김창열이 물방울 작품으로 보여주었다고 했다. 이우환은 캔버스의 마대를 무시하고 물방울을 강조하면 그림이 되고 반대로 마대를 강조하면 오브제로 화하는 아슬아슬한 관계 속의 절묘함이 그의 작품에 있다고 평가했고, 프랑스 누보 레알리즘을 이끌었던 비평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는 김창열 물방울 작품의 내외부 상관관계 속에서 창출된 질서가 어떤 상징적 기억을 환기함으로써 그것의 현존성을 강조한다는 ‘부재의 현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피에르 레스타니와 다니엘 아바디 등은 김창열이 동양적 미학의 정수를 서구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회화에 주입했다고 했다. 이외에도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의미들이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김창열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한 한국 역사 속에서 성장했으며, 한국화단의 앵포르멜 운동의 집단적 출현이었던 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의 창립회원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작품 세계를 전개했던 만큼 한국의 근현대미술사 속에서 주요한 작가이다. 

이번 전시는 한 작가의 조형적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대표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초대전이다. 노화가의 역사처럼 한국 역사의 굴곡 속에서 샘물 속의 생명수처럼 피어오른 물방울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의미와 조형세계를 살펴보며, 한국 현대미술의 현 위치와 방향성도 함께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것이다. 





물방울과의 조우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조각가 이국전의 연구소와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고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졸업하지 못했다. 그는 세계미술을 화집과 미술잡지 등을 통해 공부했고 현대미협 활동을 하였다.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 1965년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며 국제무대에 관심을 돌린 후 그는 1966년 록펠러재단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 체류했고 1969년 이후 파리에 정착했다. 
 
그가 ‘물방울 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3년 파리의 첫 개인전 이후이지만 물방울의 전조를 알리는 작품들이 제작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인 <무제>(1969) 등에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 주위로 겹겹이 곡선들이 둘러있다. 이들 작품은 물방울들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을 포착한 듯하다. 그는 평양의 대동강 상류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는데 생가 뒤쪽 산기슭의 세 곳의 바위구멍에서 샘물이 콸콸 용솟음치며 솟아올랐고 그 샘물은 일직선의 수로를 이루며 강물로 흘러들었다고 기억했다. 김창열은 유년시절 그 샘물 주위와 강가에서 물놀이하며 자랐는데 어린 시절의 이런 기억은 힘든 상황을 명민한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게 했다고 했다. <무제>(1969)의 형상은 그가 고향에서 보았던 샘물의 기억에서 연유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70년대 초 김창열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프랑스 파리 외곽에서 머물렀었다. 그의 집은 콘크리트 바닥에 흰 페인트 벽으로 마감되고 바람이 문틈으로 들어와 무척 추웠으며, 고양이들이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마치 마구간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머물며 제작한 <제전>(1971), <현상>(1971) 등은 마치 문틈에 겨울의 얼음이 녹아내리듯 한 표현이다. 물의 형상이 더욱 입체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난 이들 작품은 아침 또는 봄이 왔음의 의미 또는 과거의 어둡고 참담함을 넘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해내고 있음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그에게 물방울은 자신의 기억과 당시의 심경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상흔으로부터의 예술적 승화의 의미를 담고도 있다. 1958년 그는 현대미협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며 박서보, 나병재 등과 함께 앵포르멜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한국전쟁에 의한 파괴와 참극을 겪으면서 시대의 폭력 앞에서 좌절과 절망감을 비정형의 회화로 표현했다. 김창열은 어두운 색채로 화면을 가로지르며 작가의 행위로서 두텁게 발라진 물감의 흔적을 보여준 <제사>(1964), <제사>(1965) 등을 제작했다. 죽은 육신과 총알의 흔적 등 전쟁 이후 암담한 현실 세계를 이들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으로 15살 난 여동생을 잃고, 대학과 중학교 친구들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던 한국 현실에서 그 상처가 아물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는 당시 전쟁의 상흔을 작품에 담았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일종의 넋을 달래는 진혼의식이었다. 

전쟁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육화된 듯한 기존의 화면에서 1971년 그린 <제전>은 명확하게 정리된 선과 형상 그리고 밝은 색채의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흰색 액체가 흐른 듯한 물은 중요한 주제였다. 자연의 근원적 생성요소로서 생명의 원천이며, 존재의 모태이며, 태초부터 존재해온 모든 생명체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물은 과거부터 정화와 치유, 창조와 소멸, 순환과 흐름 등의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는 순수함의 이미지로 ‘정화’이다. 따라서 물은 종교의식에서도 사용되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죄악이나 불결함을 맑은 물로 씻어내는 의식이 거행되기도 했고, 힌두교에서는 갠지스 강물에서 목욕하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했으며, 한국에서도 첫새벽에 길은 우물물을 정화수라고 하여 재앙을 쫓거나 복을 기원하는 신령의 상징으로 보았다. 

작가 자신도 전쟁의 상흔을 물방울로 승화시켜 보려는 의식이 마음속에 작용했던 것 같다고 했고 작품 제목의 ‘제전’은 예배행렬 또는 제사의 의식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듯 당시 김창렬의 물은 영혼의 정화를 상징하는 의미로서의 물의 의미가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물은 신체를 정화하고, 영적으로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준다는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듯 그에게 물은 이전의 암담함, 어두운 터널 같은 상황을 지난 승화된 상징물이었다. 

<제전> 이후 그는 점차 물방울의 이미지에 가까워지는 <현상>(1971) 연작을 제작했고, 1972년 파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초대전으로 정평이 나 있던 살롱드메에 깜깜한 밤하늘에 생명수처럼 반짝이는 한 방울의 물방울인 <밤>(1972)을 출품했다. 그리고 1973년 파리의 첫 개인전에서 마포에 무리지어 있는 물방울을 그리면서 그의 ‘물방울’과 함께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물방울과 회귀
 
 그가 그린 물방울은 빛을 받은 흰색의 점, 반사광과 맑고 투명하게 보이는 그림자가 있다. 가상의 빛과 그림자로 만들어진 그의 물방울은 캔버스의 화면 위에 수정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며 마치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이런 그의 물방울은 현실의 물방울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방울의 이미지 또는 상징적 또는 관념적인 이미지인 아침이슬의 반짝이는 투명하고 깨끗한 물방울이다.  

물방울의 형태 또한 다양하다. 불투명의 흰색 액체에서 시작하여 밤하늘의 이슬처럼 곧 바닥에 떨어질 듯한 물방울, 무정형의 물방울, 스미고 흘러내리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물방울, 수정처럼 동그랗게 마대 위에 놓인 물방울, 이미 마대 천위에 스며든 흔적의 물방울 등 쉼 없이 다양한 물방울을 작가는 보여주었다. 

실제 물방울의 형상처럼 여러 모습을 가진 물방울 작품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바탕 화면과의 관계 속에 변화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바탕을 칠하지 않은 거친 마대의 표면을 사용하여 화면의 위쪽이나 모서리, 또는 화면 전체에 물방울들을 가득 메우기도 했으나 거칠거칠한 모래의 화면이나 물방울과 한자를 병치하거나 검정 먹으로 천자문으로 겹겹이 뒤덮인 어두운 표면 등에 물방울이 그려졌다. 맑은 물방울과 이런 대조적인 화면은 그가 그린 물방울을 더욱 맑고 투명하게 보이게 했다. 

그의 물방울이 유년기의 고향의 샘물과 맞닿아 있듯 화면을 이루는 여러 요소도 과거의 기억과 닿아있다. 1980년대 중반 그는 화면의 바탕에 한자를 도입했다. 종이에 스며들거나 공기 중에 일정 시간 후 증발할 그 순간의 물방울은 한자로 겹겹이 그려진 글씨 위에 또는 한자들과 나란히 병치되거나 하며 그려졌다. 동양 문화권에서 천자문은 자연현상에서 우주 만물과 인간사회의 근본적 형식을 노래한 시가라는 점에서 중요한 텍스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에게 한자는 유년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성장하면서 한자 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동양적 사유의 직접적 영향을 받아온 작가는 조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는데 그의 조부는 어린 손자 김창열에게 먹 가는 법, 붓 잡는 법, 획 긋는 법 등 서예를 가르쳤고, 네댓 살부터 천자문을 익히게 했다. 그는 어릴 때 종이가 새까매질 때까지 한자연습을 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회귀>(1989), <회귀>(1990), <회귀>(1991) 등을 제작했다. ‘회귀’라는 제목도 이러한 연유로 붙여졌을 것이다. 천자문을 그려 넣기 시작하면서 작품의 조형적 실험과 변화의 폭이 더욱 확장되었다. 작가는 쇠나 돌과 함께 유리 등을 이용해 화면 속이 아닌 입체의 물방울로 보이는 조형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2004년에 프랑스 국립 쥬드폼미술관에 초대되어 전시장 입구에 물방울 모양의 큰 유리를 천장에서부터 쇠줄로 매달아 길게 늘어드린 설치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특히, 천자문과 더불어 모래는 그의 고향이라는 공간 속의 인상 깊은 기억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의 고향은 대동강 지류로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는 어린 시절 모래사장에서 목욕도 하고 수영도 하고 씨름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실향민이었고, 또한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을 떠나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았었기에 그에게 고향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향을 둘러싼 자연 풍경과의 만남의 공간을 떠올리며 조형실험을 확장했다.

고향은 단순히 지리적 공간이 아닌 인간의 제자리이고 원초적 갈망이다. 고향에 안주할 수 없고 정신적 유랑민으로 내몰리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서 그의 고향은 삶의 시공간의 축으로 자신의 근원을 알도록 하는 정체성을 부여했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대한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 삶의 원동력 등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물방울은 생가 뒤편의 샘물이 있던 공간에 대한 기억이기도 했고 작가 자신의 근원, 과거와의 연결을 잇는 끈이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팝아트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한동안 방향감을 상실했고 무력감과 혼란의 연속인 상태였다고 기억했다. 현대미술과 자신의 예술세계와의 간극으로 인한 혼란스러움의 극복을 그는 ‘자기 근원으로의 회귀’에서 찾았다. 파리에 정착한 이후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위치, 과거의 기억 등을 떠올리며 자신을 찾는 행보를 시작했고 지속적인 변화 안에서도 이를 상기하며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며 

김창열처럼 한 가지 소재에 천착한 작가도 드물다. 그에게 물방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언어였다. 요컨대 자신이 살았던 전쟁의 흔적에서 승화된 한방울의 물방울이었으며, 현재의 자신을 포함한 그림을 보는 관객의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소재였고, 과거의 고향과 기억의 단편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물방울의 특징처럼 작가의 물방울은 대조적인 화면과 함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쟁의 망자를 위한 진혼곡이면서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정화, 추상과 구상, 거친 표면과 만지는 순간 없어질 듯한 연약함, 일루젼과 실재, 과거의 나와 원초적 순수함을 갈망하는 현재의 자신, 긴장감과 신선함 등이 한 화면 안에 결합하여 나타났다.  

수정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물방울과 더불어 이루어낸 그의 예술세계는 과거의 자유로운 동심의 세계를 반추하여 현재화했다. 과거 고향은 자신의 존재 이유였으며 자신을 의미했고 작품의 출발이며 중심이기도 했다. 현존이 과거와의 직접적 연장선에 있기보다 단절 속에 있을 때 더 강화될 수 있듯이 오랜 기간 타국생활로 고향에 대한 향수가 남달랐던 그에게 물방울과 한자, 모래 등은 시공간을 초월한 자유로운 과거 유년시절로의 회귀로서 작가의 심상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그는 고향과 유년시절 동심의 세계를 현존과 현존의식으로 부활시켜 자신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찾았다. 


주최  광주시립미술관
협조  국립현대미술관, 갤러리현대, 아트센터나비, 개인소장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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