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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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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문화역서울 284
최.정화_총,천연색 總,天然色 
09.04 - 10.19
오프닝 09.03 오후 5시 
문화역서울 284(구서울역사), 광장일원


▪ 관람시간  10:00am -~07:00pm(월요일 휴관)  *폐관 1시간 전 입장 마감
▪ 관람료     무료(플라스틱 뚜껑)


-분야 : 복합예술문화행사 (미술,디자인, 공예,설치,수집,  학술, 공연, 이벤트)
-참여 작가 : 최정화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문화역서울 284
-협력: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쌈지, 평창아트, 박여숙화랑, 周大福 Chow Tai Fook Collection(홍콩),
          필립스코리아 

* 전시 관람시 필히 플라스틱 뚜껑을 지참해주십시오. 색다른 사건이 벌어질 것입니다.


최정화_가슴(연지동 사무실)_2014


■ 폐허로부터
이번 전시는 수만 가지 세상사의 일들이 압축된 곳이자 일시적인 만남들과 헤어짐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는 (구)서울역사(문화역서울 284)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속세의 많은 삶들이 잡동사니처럼 서로 이질적으로 뒤섞여 독특한 시공간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 공간의 속내를 더 깊이 사유하고, 그 응축된 양상과 혼돈을 자양분으로 삼아 이를 한바탕 축제의 시끌벅적한 꽃들을 피우려 한다. (구)서울역사는 낯선 이방인들이 정처 없이 스쳐지나가면서 일시적으로 공존하는 덧없는 시공간의 한 자락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속에는 외세에 의해 변주되고 다시 급격한 성장을 거쳐야 했던 한국 근대성의 어설프고 서투른 모습, 혹은 짧은 기간 동안 압축적인 발전을 거듭해야 했던 단단하고 치열한 모습들 또한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서구식 근대화와 다른 한국적이고, 아시아적인 근대성의 전형적인 풍경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서구의 근대화처럼 체계적이고 정합적인 이성과 합리성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고, 성장과 개발중심의 근대화, 속도의 근대화는 결국 빨리빨리, 대충 대충의 독특한 근대 문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른바 버내큘러 문화(vernacular culture)가 결합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를 그저 서구중심의 시선으로 부정적으로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엉성하고 서툴지만 그 속에서도 치열하고 성실한 삶의 진지함과 소중한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이지만 주변부, 관문이지만 변두리이기도 한 이곳은 그래서 비근대성의 근대성, 그리고 동시대성이 뒤섞여 있어 적나라한 우리의 근대화, 아시아 근대성의 어떤 모습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를 마치 폐허에서 꽃처럼 피어나 생명으로 화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또한 이 공간을 관통하고 있는 아시아 근대성의 논리를 새롭고 의미 있게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한 복판 위에 작가 최정화라는 문화예술의 씨앗 혹은 또 그의 아시아적이고 동양적인 미학에 전염된 숱한 꽃들을 더하는 것과도 상통한다.


최정화_가슴(연지동 사무실)_2014


■ 작가 최정화
최정화는 그동안 이러한 아시아적인 근대성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것, 곧 생활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허름하지만  활력 넘치는 삶의 미학으로 전화시켜 왔다. 작가의 전매특허 같은 주문들인 ‘빠글빠글, 싱싱, 생생, 짭뽕, 섞어찌개, 활활, 날조, 날림, 색색, 엉터리, 부실, 빨리빨리, 와글와글’ 혹은 ‘치밀하게 엉성함’이 이를 말해준다. 큰 기교는 서투르게 보인다는 동양의 경구처럼, 이를 서양의 완벽함과는 차이를 지닌, 그 자체 오롯한 생명을 가진 것으로 재생시키고 재활시켜 예의 그만의 생활의 미학을 고수해 온 것이다. 이를테면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미학,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아름다움이라는 동양의 정신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온 것이다. 비록 서구의 것을 모방하기에 급급했고, 그 어설프고 조악함을 숨길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정 붙이고 교감해온 세월의 두께를 긍정하고, 그 인공적인 자연스러움을 뻔뻔하게 찬미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깊은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고단한 삶의 여정이, 우리의 지난한 근대화의 각고의 땀들이 배어있다. 작가가 치밀한 서투름이라 말한 것은 이런 우리 식의 근대화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이자, 이를 생산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려는 소망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를 활력과 생명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 일상적인 삶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에게서 아시아 근대성의 어떤 가치와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늘의 자연과 땅의 인공을 매개하여 이를 다른 식으로 자연(의 이치)으로 화하려 하는 동양적인 가치 말이다. 그런데 그 빛깔이 만만치 않다. 이를 총천연색의 다기함과 화려함으로 꽃피우려했으니 그럴 법도 할 것이다.   


최정화_가슴(연지동 사무실)_2014


■ 총천연색
이번 전시의 주요 화두인 총천연색은, ‘총, 천연색’ 완전한 자연 그대로의 색이라는 뜻으로, ‘천연색’을 강조한 말이다. 천연색은 자연의 색을 이르는 말이기에, 자연 본연의 이치에 닿으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총’의 개념을 덧대는 순간, 속세의 문화, 인간 세상과 만나게 된다. 총(總), 다시 말해 체계를 만들고, 종합하여, 전체의 합을 구하려는 인간의 인위적이고 문화적인 논리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인공적인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 자연보다 더 한 자연의 색을 구현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심오한 자연 본연의 색에는 온전히 이르지 못하니, 총천연색은 과잉과 결핍,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아우르지만, 그도 저도 아닌 것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총천연색 개념은 자연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자연이고, 인공마저 자연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특수한 상황을 의미한다. 늘 부족함과 넘침으로 어수산하기만 한 지금, 여기, 한국의 특별한 풍경과 연결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인공 속에서 자연을 구할 수밖에 없는 지금 시대의 특수한 맥락과 그 문화적 빛깔을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공자연마저도 자연으로 기능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최정화식 작업도 바로 이런 두 겹 사이에서 작동한다. 인위적인 것을 통해 자연을 발(發)하려 하고, 지극히 자연적인 것으로 인위적인 이 시대의 문화의 결을 드러내려 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두 겹을 역설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작가는 일찍이 인위적인 플라스틱을 통해 이 시대의 가장 인공적인 것이 실은 가장 이 시대의 가장 자연스러움임을 간파했다. 그렇게 최정화는 이 두 겹을 넘고 넘어, 감히 통(通)하려 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연으로 향한다. 다만 그 출발이 순수한 자연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속세의 인공이고, 일상의 가벼움이고 값쌈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작가가 작업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는 난지도가 그런 것 일게다. 난(蘭)과 지(芝), 곧 그윽한 향기가 난다는 난초와 지초를 가리키는 난지도(蘭芝島)가 현재의 인공 쓰레기 더미라는 사실, 썩지 않는 인공조차 결국은 썩어, 우리 문화의 자양분이 되는 그런 현실을 작가는 일찌감치 알아채고 이를 자신의 작업의 원천으로 모셨던 것이다. 인공이 한번 그 생을 다한, 그래서 인공의 연장이겠지만 동시에 자연에 버금가는 그 인공에서 최정화는 다시 자연을 향해 총천연색의 화두를 던진다. 따라서 이 총천연색을 그저 자연을 향한 총천연색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과 사의 순환이 한 겹 더 내재해 있는 생명의 총천연색, 그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총천연색으로 품어낸다. 그렇게 총천연색은 우리 내 가녀리고 팍팍한 속세의 삶이 온전히 녹아있는 색들이고 그 속에서 저 자연의 찬란함과 생명을 담으려 하는 야무진 욕망의 색이다. 생과 사의 삶이 관통하고 있는 색이며, 결국은 무수한 빛깔로 분광되지만 다시 한 줄기 빛을 이루고 마는, 무색의 색, 생명으로 다시 화(化)하는 색인 것이다. 


최정화_가슴(연지동 사무실)_2014


■ 인공의 색, 정신의 색
지극히 많음이, 눈부신 화려함이 결국은 하나이고, 오만가지 삼라만상의 색이 결국 자연이다. 총천연색은 그런 면에서 물리적인 자연의 수만 가지 색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정신을 담은 색이기에 그 갖가지 다름을 말할 수 없는, 무색의 색이다. 겉은 화려할 지라도 그 속은 그 갖가지 구별조차 무의미한 마음의 색이다. 비록 자연에 다다르지 못하고, 자연을 담으려는 노력이긴 하지만, 그래서 덧없고, 허무하긴 하지만 그 인공과 모조의 세상조차 다시 현실의 삶으로 긍정하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거짓, 인공의 세계가 비록 가짜라 할지라도 그 가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숱한 이들의 다양하고 화려한 세계를 깨닫는 것이다. 마치 수 만 가지 분광으로 다양한 색으로 존재하지만 결국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의 삶을 비추는 저 ‘빛’처럼 말이다.  


최정화_가슴(연지동 사무실)_2014


■ 꽃
우리의 삶을 비추고 있는 것은 찬란한 빛이기도 하지만 생의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의 내용적 얼개를 꽃으로 풀어가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순간 피었다가 다시 지는 꽃은 생에 가장 찬란한 시간, 공간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 무상함과 덧없음의 깨달음을 전한다. 한낱 아름다움도 이와 같을 터,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심미적인 삶을 공감케 하려는 최정화 또한 이러한 생의 찰나적이면서 영속적인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전시 또한 꽃(의 개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의 개념적 내용과 배치는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잡화엄식(雜華嚴飾), 곧 삼라만상의 꽃들로 공간들을 개화시키는 것과 같은 구조를 취하려 한다.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함을 이르는 화엄(華嚴)은 불법이 광대무변하여 모든 중생과 사물을 아우르고 있어 마치 꽃으로 장식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잡화(雜花)라 해서 갖가지 꽃들을 그 경중을 두지 않고 함께 어우르고 있음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허접한 꽃들의 웅성거림이겠지만 세상은 이로 인해 빛이 나고 생명으로 거듭나는 법일 터이니 말이다. 그 기저에 온전한 삶의 치열함이 있고 깨달음으로 향한다면 결국 무한한 세상의 진리는 화려한 꽃처럼 피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번 전시에서 동양적이고 아시아적인 가치를 새삼 주목하려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서구적인 것만이 아닌 동서양의 모든 가치들의 다양성을 용인하고, 그 자체의 조화와 완성을 중시하려는 방향성이 필요한 시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비록 특정한 시각에서 보자면 비루하고 남루하고, 서투르고 투박할지라도 그 내면의 가치의 의미를 소중히 하여 이를 최선의 아름다움으로 꽃 피워내려는 그 마음을 품어내려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꽃은 심장이며, 마음에 다름 아니다. 작가 작업도 매한가지이다. 이름 없는 꽃들마저도 세상을 환하게 하고 있음을 진즉에 간파하여 이와 더불어 세상의 숱한 꽃들로 화(華, 花, 和, 化)하려 했던 작가이기 때문이다. 


최정화_가슴(연지동 사무실)_2014


■ 생생활활
작가는 불자처럼 수행하듯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 작가 특유의 형형색색의 화려함과 장엄함이 지혜와 광명이 가득 찬 아름다움의 세계, (부처의) 깨달음과 가르침에 대한 형상화로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겉은 겸손하게 속은 건강하게”라는 작가의 경구처럼 가장 세속적인 것들이 가장 성스러운 것들과 연결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서로 원인이 되고 연결되어 있기에 부단히 이어진다. 비록 겉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일지라도 각각의 것들은 서로 원인이 되어 무한한 연관관계를 가지기에 조화를 이룬다. 조화란 결국 자연의 이치일 터, 갖가지 형상과 색들은 곧 만물이 갖고 있는 존재의 긍정성, 그 생명성과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라 하여, 꽃이 만개해 있는 절정의 상태, 그 화려함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든 꽃조차 생명, 곧 생로병사, 삶의 과정을 품은 것이기에 오히려 생명은 시들고, 죽어있는 것조차 다시 살리는 것, 재생의 의미를 포괄한다. 최정화가 주목하는 지점이다. 곧 최정화식, 생생활활(生生活活)인 것이다. 최정화는 이렇게 생생활활, 우리 내 평범한 삶은 물론 인공의 것들조차 다시 재생시키고, 생명으로 거듭나게 한다. 꽃은 그렇기에 심장이고 마음이며 불꽃이며 생명이다. 그리고 총천연색은 숱한 이들의 삶이 엮어가는 치열한 몸부림이고 외침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고, 허접한 꽃들이 엮어내는 변화무쌍한 축제이다. 그러한 무궁무진의 변화로 도약한다.        


최정화_가슴(연지동 사무실)_2014


■플라스틱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플라스틱만 하더라도 그렇다. 일상 곳곳에서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이 시대의 변화무쌍한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플라스틱은 대량화된 반복과 복제, 성형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인공적이고 복제적인 측면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렇게 빠른 성장신화를 써야했던 우리에게 너무나 딱 이었던  플라스틱은 힘겨운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대량생산의 방식으로 비교적 손쉽게 대강대강 삶의 긴박한 필요마저 대신하면서 그럴듯한 자본주의 겉치레를, 값싸고 동시에 쓸모 있게 만들어 냈던 추억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뿐인가. 형형색색의 그 현란한 인공 빛깔은 힘겨운 삶의 속내와 상관없는 화려함마저 더했으니 가히 플라스틱은 이질적이고 혼성적인 우리 시대의 역설을 여러 측면에서 드러낸다. 작가는 이러한 플라스틱을 통해 인공이 자연을 대체하고, 서구의 근대화 과정과 지역(locality)의 토착성이 혼종된 한국식 자본주의, 압축 근대화라는 것을 간파하면서 이를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이에 대한 추억의 감성을 되살리면서 유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플라스틱을 날것이라 명명하면서 이를 마치 가공하지 않은 자연처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재생의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자연의 생태계가 아닌 상품의 생태계에 존재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재활용함으로써 상품의 세계도 자연처럼 순환하게 하는 것이다. 성형시절, 인공시대에 대한 작가만의 독특한 깨달음인 셈이다. 가짜와 인공조차 생명과 자연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것. 그 무모함에서 이 시대의 우스꽝스러운, 하지만 깊이 있는 진정성마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최정화_레이디스 앤 젠틀맨_FRP, 도장, 가면_가변크기_2000


■ 당신의 마음이 나의 예술
깨달음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애써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가는 일상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갖고 있는 의외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포착한다. 평범한 것들이 품고 있는 색다른 아름다움과 그 즐거움을 기꺼이 누리고 향유하는 것이다. 작가 스스로 이들 평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즐기고 찬미하면서, 그 천진난만한 느낌들을 자연스럽게 공감시킨다. 예술은 고상한 것이 아닐뿐더러 속되고 평범한 것들과도 유리된 특별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속된 범부의 삶마저 흔쾌히 끌어안는 것이다. 노숙자라해서 예외일 수 없다. 비루함이 그저 비루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찬란함이 그저 찬란함으로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 같이 호흡하고, 공감하고, 깨닫게 되는 공공성의 의미를 진작부터 간파했던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나의 예술’이라고 입버릇처럼 되 뇌이면서 말이다. 

■ 속세의 절 그리고 정화(淨化, 正化)
작가는 이처럼 시각적인 찬란함에 그치지 않고 어떤 깨달음을 통한 그 본원적인 의미를 다시 소생시키려 한다. 갖가지 시간대와 공간성이 서로 뒤섞인 문화역서울 284 역시도 숱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엷은 인연으로 얼기설기 모였다 사라지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어떤 깨달음 또한 비롯될 수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 혹은 아시아 근대성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기도 할 것이며,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또 다른 우리의 현실임을 주목하는 것이다. 덧없음의 공허함 자체를 인정하면서 이를 다시 생명으로 재생시키고, 정화시키는 것, 마치 속세의 절처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 이번 전시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가짜와 모조의 인공세상 속에서도 자연의 이치를 담으려 하고, 이를 다시 생명으로 재생케 하려는 것, 총천연색이 담고 있는 뜻 깊은 속내는 결국 이런 깨달음으로 향한다. (구)서울역사의 혼종성의 공간은 이렇게 오래된, 그러나 새롭기만 한 미래를 향해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 기차의 종착역이 또 다른 시발의 기점이듯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저 근대성의 서울역이 아니라 내밀한 속내와 다층적인 의미의 비근대적이고, 탈근대적인 서울역으로 다시 회귀하고 재생할 것이다. 작가의 깨달음처럼 어제는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고, 그래서 내일은 어제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번 행사를 통해 숱한 이들의 무수한 소망들을 꽃으로 피우게 하여, 속세의 찌든 때마저 감히 ‘정화’시켰으면 하는 야무진 꿈마저 꿈꿔 보려는 것이다.

민병직전시감독


최정화_가슴(연지동 사무실)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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