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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 , 몽파르나스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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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 , 몽파르나스의 전설

2015. 6. 26 - 10. 4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3 층

이태리 리보르노 태생의 파리의 이방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는 35 년의 짧은 생을 살면서 400점이 채 못 미치는 유 화작품만으로 20 세기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에콜드파리 (Ecole de Paris) 의 대 표화가이자 파리 몽파르나스의 전설로 기록 된 화가이다 .

모딜리아니의 예술은 요절한 비운의 화가의 전형이다 . 10 대 소녀였던 그의 마지막 연인 잔느 (Jeanne) 와의 격정적 러브스토리와 비극적인 결말은 예술가 로서 그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삶의 고뇌와 예술적 번민에 찌든 채 35세로 마감한 짧은 생은 그로 하여금 반 고흐와 같은 요절한 천재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상식을 파괴한 독특한 인물 표현방식은 그를 신비에 가득 찬 예술가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영화 같은 그의 짧은 인생 이었지만 예술가로서 모딜리아니는 삶의 고통과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을 열정 적으로 느끼며 표현하고자 한 화가였으며 인간의 심오한 내면세계를 자신만의 양식을 통해 화폭에 담으려 했던 인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닌 휴머니스트 이자 인물화가였다 . 짧지만 강렬했던 모딜리아니의 삶과 예술을 그가 남긴 소수의 작품을 통해 만 난다는 것은 그를 둘러싼 신비의 베일을 벗겨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모딜리아 니가 예술을 통해 추구했던 인류애와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의미를 되새 겨보는 뜻 깊은 여행이 될 것이다.

국내 최초의 회고전으로 오랜 준비 끝에 마련된 이번 전시는 몽파르나스의 전 설이 된 비운의 화가 모딜리아니의 예술과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해보는 기회이 다 . 파리 시립미술관 , 피카소미술관 , 오랑주리미술관 , 그르노블 미술관 , 헬싱 키 아테네움미술관 , 미국 톨레도미술관 , 이스라엘미술관 , 멜버른 빅토리아 국 립미술관 , 오사카 시립근대미술관 등 세계유수의 20 여 공공미술관 소장작품 과 일반 관람객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개인소장 20 여곳을 포함하여 전세계 40여 소장처로 부터 모딜리아니 원화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이번 전시는 그가 남긴 그리 많지 않는 작품의 희귀성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작품가격에 비추어 볼 때 모딜리아니 전시사상 유례 없는 기념비적인 전시가 될 것이다 .


제 목 <모딜리아니, 몽파르나스의 전설> Amedeo Modigliani: Legend of Montparnasse
기 간 2015년 6월 26일(금) - 10월 4일(일)
장 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
주 최 서울경제
주 관 한국일보문화사업단
후 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주한프랑스문화원, 주한이 탈리아문화원, 한국미디어네트워크
미디어 후원 네이버
전시 커미셔너 서 순주 박사 (샤갈(2004, 2011), 피카소, 모네, 반 고흐 (2007, 2012), 르누아르, 고갱, 밀레 전시 커미셔너)
전시문의 1588-2618
인터파크 예매 1544-1555
단체관람 문의 02-724-2900



전세계 40 여 곳 유수의 공공미술관과 개인소장의 진품을 대거 모은 모딜리아니 회고전의 진수

국내 최초, 아시아 최대 규모 모딜리아니 예술의 정수를 한자리 일반인들에게 공개된적 없는 개인소장 작품 최다 전시

현존하는 모딜리아니의 유화작품은 400 여 점 채 안될 만큼 그가 남 긴 작품 수는 매우 적다 . 10 년간의 화가생활을 했던 19 세기말의 비운 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유화작품이 900여 점에 달하는 걸 보면 얼마 만큼 모딜리아니가 남긴 작품 수가 소량인지를 가늠할 수가 있다 .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전시기획자들에겐 엄청난 도전 이며 어떤 대가의 전시보다 어렵고 복잡한 과정이 수반된다 . 더구나 해 가 거듭될 수록 천정부지로 치솟는 그의 작품가격은 작품을 모으는 것 이상으로 전시기획을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다 . ( 작품 최고가격은 2010 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기록 된 6천9백만 달러 - <La Belle Romaine>, 19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전시는 모딜리아니 예술의 진수 를 전하기 위해 전세계 뿔뿔이 흩어져 소장되어 있는 그의 진품 작품 70 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

영국의 피츠윌리엄미술관 , 맨체스터갤러리 , 프랑스 파리 시립미술관 , 오랑주리미술관 , 피카소미술관 , 낭시미술관 , 그르노블미술관 , 예루살 렘 이스라엘 미술관 , 일본 도쿄후지미술관 , 오사카시립근대미술관 , 미 국 톨레도미술관 , 스위스 라쇼드퐁미술관 , 호주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 핀란드 아테네움미술관 등에 산발적으로 소장되어있는 국공립 미술관 소장작품과 미국과 유럽의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적 없는 개인소장 작품 까지 , 모딜리아니 예술의 정수를 국내 관람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

세계미술계가 인정한 최고의 전시만을 기획한 서 순주 박사의 12 번째 전시인 < 모딜리아니 , 몽파르나스의 전설 > 展은 모네, 르누아르, 반 고 흐 , 고갱과 같은 19 세기 인상주의 거장을 소개하는 전시와 더불어 20 세기 회화의 거장을 소개하는 대규모 개인전으로 샤갈 , 마티스 , 피카소 에 이은 20 세기 회화의 독보적인 화가 모딜리아니의 예술세계를 가감없 이 보여줄 것이다 .


모딜리아니는 왜 '인물'에 주목했나?

감각 너머의 세계를 화폭에 담다

긴 얼굴에 긴 목, 길게 변형된 코. 초상화로 대표되는 모딜리아니의 작 품은 단순히 인물에 대한 묘사나 재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가까운 친 구나 지인을 화폭에 담으면서 다양한 양식을 시도하는데 , 1913 년부터 는 인물의 얼굴과 세부요소를 길게 변형시키며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를 확립해 나간다 . 더 나아가 후기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시선처리에 없어 선 안 될 눈동자를 배제한 채 아몬드 형태의 눈을 강조한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될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릴 것' 이라고 말 했던 모딜리아니의 일관된 소재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화폭에 형 태를 그려 넣기 위한 대상으로서의 인물이 아닌 모델과의 교감을 원했 다 . 모딜리아니는 화면 안의 인물이 모델 자신을 바라보도록 표현한다 . 인물의 눈동자는 화면 밖을 위한 것이 아닌 그 내면을 향한 것이다. ' 내 가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나 허구가 아닌 무의식이다 .' 라고 한 그의 말 처럼, 작품 속 인물들은 텅 빈 눈으로 아득한 내면의 깊이를 담아낸다. 한 편의 시처럼 함축적이면서도 절제된 표현 , 이것이 바로 모딜리아니 의 그림이 전하는 감각 너머의 세계 , 인간 본질의 순수한 세계이다 .

모딜리아니는 모델의 신체 자체에 집중했을 뿐 , 특징적인 몸짓이나 장 식적인 부속물 혹은 설명적인 요소나 실제 공간을 짐작하게 하는 어떤 것도 그림에 담지 않았다. 잠시 조각으로 '외도'했던 경험은 이후 회화 작업에 큰 영향을 주며, 이를 계기로 간결하고 선이 중심을 이루는 추상 적 형태의 화풍에 도달하게 되었고 , 마침내 일관성 있는 회화 언어를 확 립했다 . 그로 인해 모딜리아니 작품은 수많은 작품가운데 놓여 있어도 단숨에 식별이 가능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

모딜리아니가 인물화에서 집중했던 ' 눈 ' 영혼을 비추는 거울

본 전시에 소개되는 모딜리아니의 모델들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를 비 롯하여 작품에 담겨진 인물의 이야기까지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전시를 통해 비로소 모딜리아니라는 작가를 진실로 알게 되는 유일무이 한 기회가 될 것이다.


예술인들의 거리 몽파르나스 (Montparnasse)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 화파를 탄생시키다


프랑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가 정착했던 센느강 우안 몽마르트와 센느강 좌 안 몽파르나스는 가난하지만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모여있던 창작과 교류의 장 소였다 . 1890 년대에 접어들면서 몽파르나스는 기존에 예술가들의 중심지였던 몽마르트를 뛰어넘는 파리에서 예술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중심지가 된다 .

이러한 흐름은 고국을 떠나 파리를 찾아온 외국인 예술가들에게도 그대로 적 용되었고 , 그 흐름에 맞춰 모딜리아니 역시 1909 년 몽파르나스에서 작업을 시 작한다 . 당시 몽파르나스는 모딜리아니 외에도 샤갈 , 피카소 , 브랑쿠시 , 키슬 링 , 수틴 , 반 동겐 등 전세계에서 몰려든 예술가들의 집합지였다 . 이들은 1925 년 미술평론가 앙드레 바르노에 의해 일명 파리화파로 불리는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 의 중심을 이루는 작가들이었다 . 1890 년 이후부터 제 2 차 세 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의 약 40 여 년 동안 몽파르나스의 거리와 카페에서는 예술에 대한 열띤 토론이 열렸고 , 많은 예술적 유행이 창조됐다 .

1920 년대에 피카소 , 헤밍웨이 , 스타인 등이 바로 몽파르나스 일대의 단골손 님이 되면서부터 몽파르나스는 유명세를 탔다 . 또한 14 구는 만 레이나 모딜리 아니, 헨리 밀러 같은 예술인들의 천국이 되었다.

전시 구성

이번 회고전은 모딜리아니의 예술세계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1906 년 부터 1920 년까지의 유화 , 드로잉 작품 70 여점으로 구성되었다 . 그의 짧았던 생애 만큼이나 간결하고 응축된 특유의 표현양식을 보다 쉽게 이 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총 여섯개의 테마로 구성된다 .

I. 남자의 초상
II. 여인상 기둥 (Caryatid)
III. 여인의 초상
IV. 누드
Ⅴ . 종이작품
Ⅵ. 모딜리아니와 모이즈 키슬링

본 전시는 몽마르트 시기의 초기작품과 더불어 몽파르나스 시기에 조각 가 브랑쿠시의 영향을 받아 조각에 몰두했던 1910-1913 년을 조명하는 동시에 다시 회화로 돌아오면서 변화된 그의 표현 방식이 어떻게 그를 ‘파리의 이방인 예술가’ 에서 ‘몽파르나스의 전설’ 로 만들었는지 그 과 정을 함께 따라가는 여정이다 .

모딜리아니의 예술은 지리적으로 당대 전세계 예술가들의 산실이었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 두 장소로 구분되며 , 파리에 도착 한 1906 년부터 생애 마지막 날까지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회화(약 350 점) 와 조각(약 30 점) 으로 나뉜다.

이번 전시는 파리에서 활동했던 전 시기 동안 그 어떤 장르보다 모딜리 아니가 몰두했던 초상화를 대거 소개한다 .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에는 20 세기초 폭발적으로 발전한 파리의 문화와 그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겨있 다.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폴 알렉상드르, 폴 기욤과 같은 개인 소장 가 및 젊은 화상들, 모이즈 키슬링, 샤임 수틴,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같 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이를 입증한다 . 또한 그의 작업실을 자주 드나들 던 여인들 중 루냐 체코프스카 , 러시아의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와 더불어 그의 마지막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를 담은 초상화도 빼놓을 수 없다 .

또한 1916-1917 년에 제작된 대형 누드화 연작 중 < 셀린 하워드의 초 상>(1917, 개인소장, 미국)과 <머리를 푼 채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 >(1917, 오사카시립근대미술관 소장 ) 를 통해 모딜리아니 후기 작품세 계의 성숙미와 관능미에 대해 집중 조명한다 . 더불어 몽파르나스에서 브 랑쿠시를 통해 조각가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1910-1913 년 이 후 더욱 확고해진 모딜리아니 화풍의 유화작품과 종이작품을 통해 아프 리카 원시부족 조각품에 영향을 받은 그의 이국적인 색채를 소개한다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1920)

모딜리아니 , 몽파르나스의 전설

1884년 7월 12일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리보르노 (Livorno) 에서 유대인 가정의 넷 째 아들로 태어난다 . 하지만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 플라미니오는 사업 실패로 파 산 상태에 이르고 , 집안은 겨우 그 명목이 유지될 뿐이었다 . 반면에 그의 어머 니 에우제니아 가르신은 철학자 스피노자의 후손으로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다. 11세경 늑막염을 앓고, 몇 해 후 14세에 장티푸스에 걸리고, 16세에는 결핵 균에 감염되어 늑막염이 재발하는 등 매우 병약했던 모딜리아니에게 그의 어 머니는 공부 대신 여행이라는 새로운 선물을 선사한다 . 아들을 데리고 나폴리 , 로마 등 이탈리아 남부와 피렌체 , 베니스를 여행하며 , 예술 방면에 가진 모딜 리아니의 천부적인 재능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 1898-1900 년까 지 모딜리아니는 리보르노의 화가 미켈리의 미술학교에 다니며 이탈리아 미술 의 주제와 양식 연구에 깊이 열중하게 된다 . 이후에도 예술학교를 다니며 학업 을 이어나간다 . 또한 미술과 더불어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언어에 큰 영향을 준 문학에도 매진한다 . 모딜리아니는 니체 , 보들레르 , 로트레아몽의 글을 읽으며 문학적인 감성을 예술에 접목시킬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된다 .

1906 년 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로 넘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몽마르트에서 보낸 초창기에는 다양한 양식을 시도하며 실험적인 작업을 이어나간다 . 1908 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 < 유대인 여인 > 등 회화 여섯 점을 출품해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지만 , 여전히 그는 파리의 이방인 예술가일 뿐이었다 . 모딜리아니는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옮겨 키슬링, 수틴, 피카소 등과 친분을 맺으며,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브랑쿠시를 통해 한동안 조각에 몰두하기도 한다 . 그의 조각작품에서는 길게 늘어진 타원형의 얼굴과, 기다란 직선의 양감을 가진 코, 좁은 턱, 아몬드 형의 눈 , 작게 다문 입 등 아프리카 원시부족 예술품의 특징이 엿보이는데 , 이 같은 특징은 이후 제작된 초상화에 투영되기 시작하고 이를 통해 모딜리아니는 자신 만의 독특한 회화 양식을 발전시킨다 .

1917 년 12 월 3 일 모딜리아니는 베르트 베이유의 갤러리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한다 . 그러나 전면에 전시된 그의 누드화는 외설적이라 는 이유로 철거 명령을 받으며 전시도 일찍 문닫게 되어 작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망하게 놓치고 만다 .

모딜리아니는 결국 1920 년 1 월 24 일 결핵으로 인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 난 후에서야 그의 삶과 작품이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게 된다 . 모딜리아니 예술의 독창성은 그 어떤 양식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근현대미술사에 독자적인 자리매김하며 , 오늘날까지 ‘몽파르나스의 전설’ 로 살아 숨쉬고 있다 .

대표작


< 폴 알렉상드르 박사의 초상 >, 1909 년 , 캔버스에 유화 , 100.5 x 81.5cm, 도쿄후지 미술관 , 
Portrait de Dr. Paul Alexandre © Tokyo Fuji Art Museum, Tokyo, Japan / Bridgeman Images

1909 년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모딜리아니 후기에 그려진 초상과는 다른 화풍을 담고 있다 . 후기 초상화에서는 모든 설명을 배제하고 단순화된 인물 자체에 집중했다면 이 초상화에서는 모델의 성격과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고있다 . 모델을 바라보는 모딜리아 니의 시선이 창작의 시기에 따라 변화된 것이다 .


<머리를 푼 채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 1917년, 캔버스에 유화, 60 x 92.2cm, 오 사카시립근대미술관 , 
Nu couche aux chevaux denoues © Osaka City Museum of Modern Art, Japan

모딜리아니의 누드화에 대해서는 두 가지 극단적 평가가 공존한다 . 하나는 신비로움 , 순수함의 표현이라는 평가이고 , 다른하나는 팜므파탈 , 팜므 프라질 ( 연약한 여인상 ) 이라는 평가이다 . 모딜리아니의 누드화에 대한 여러 평가와는 상관없이 모딜리아니 자신은 오로지 그림속의 육체에만 집중하여 다른 모든 요소를 배제한다 .


< 여인상 기둥 >, 1913-1914 년 , 종이에 과슈 , 53 x 43cm, 개인소장 , 밀라노 , 
Cariatide rose © Private Collection, Milano, Italy

여인상 기둥의 주제는 모딜리아니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 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 이 여인 기둥상은 본래 무거운 부분을 떠받치는 기능이 있지 만 , 모딜리아니 작품에서의 여인상 기둥은 그 본래의 기능을 없애버리고 , 포즈를 표현 하는 데 집중했다. 모딜리아니는 이 포즈를 통해 무거운 삶의 짐을 진 보편적인 인간 의 전형으로 승화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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