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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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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미술 대표작가 이쾌대 최대 규모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An Epic of Liberation Lee Quede


◇ 광복 70년과 함께하는 20세기 한국미술 대표작가 이쾌대 회고전 
  - 미술해부학 책을 쓸 정도로 인체를 자유자재로 표현했던 인물화의 대가
  - 한국근현대사의 암울한 시기를 관통한 화가, 역사와 민족에 대한 고민을 작품 속에 담아

◇ 최대 규모 회고전, 이쾌대의 예술 세계를 한 눈에 
  - 이쾌대 대표작, 미공개 아카이브 등 400여점을 소개 
  - 7월 22일부터 11월 1일까지 덕수궁관에서 개최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직무대리 김정배)은 광복 70년을 기념하여 20세기 한국미술 대표화가 이쾌대의 대규모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을 7월 22일부터 11월 1일까지 덕수궁관에서 개최한다.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은 해방기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예술가의 사명을 붓으로 끌어안았던 화가 이쾌대(李快大, 1913~1965)를 조명한다. 이쾌대가 남긴 그림들은 대략 1930년에서 1950년 무렵까지 20여년에 걸쳐 제작되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그리고 한국전쟁기로 한국 역사의 비극적 시대와 겹친다. 이쾌대는 바로 이 암울한 시대를 딛고 예술혼을 꽃피운 화가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식민지 시대에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해방직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며 사회전체가 혼란에 빠졌을 때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대작을 쏟아냈다. 

이번 전시는 휘문고보부터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인 학습기(1929~1937), 귀국 후 신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는 모색기(1938~1944), 그리고 해방 이후 탁월한 역량을 기반으로 한국적인 리얼리즘 미술세계를 구현한 전성기(1945~1953)로 나누어 이쾌대의 작품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아울러 유족이 비공개로 소장하고 있던 드로잉 300여점 가운데 엄선된 150여점과 이쾌대가 그린 잡지 표지화, 삽화 등을 함께 소개하여 이쾌대의 작품세계를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서양화가 김창열, 심죽자, 김숙진, 조각가 전뢰진 등 제자들의 인터뷰 영상 등을 통해 이쾌대의 따스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올해는 해방 70년이자 20세기 한국미술 대표화가 이쾌대가 타계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은 그의 예술세계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됨은 물론,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고 거장 이쾌대의 예술세계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작가소개


1. 이쾌대는 누구인가?

이쾌대(李快大,1913~1965)는 백남준(白南準, 1932~2006)
과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히며, 그가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은 한국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월북화가라는 이유로 이름조차 거론되는 것이 금기시되다 1988년 해금이 된 후에야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동안 그 존재조차 가려져 왔던 화가가 이토록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완벽에 가깝게 인체를 그려내는 뛰어난 능력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 듯한 인물들의 분위기와 표정, 역사와 시대가 녹아있는 작품의 주제가 감상자들을 작품 속으로 깊이 빨아들인다. 

1913년 경북 칠곡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서울의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학창시절 이쾌대는 인물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서 <운명>(1938)으로 입선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재덕(崔載德, 1916∼?) 등 일본 유학출신 화가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적인 감성의 세련된 서양화들을 선보였다.  

해방 후에는 해방의 감격과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하여 <군상―해방고지>(1948)와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쾌대는 새로운 국가건설에 있어서 예술가의 역할과 사명을 고민하면서 창작의욕을 불태우는 한편, 홍익대학교 강사,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천화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6.25가 발발했을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북한군의 선전미술 제작에 가담하게 되었고, 국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북한으로 가고 말았다. 

이쾌대가 어떠한 구속도 없이 회화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한 1933년부터 한국전쟁 이전인 1949년까지 2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이쾌대가 남긴 작품은 30대의 화가가 남긴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탐구정신과 예술세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는 이쾌대의 17살 때 그린 수채화부터 월북직전 포로수용소에서 남긴 드로잉까지, 이쾌대 예술의 전개와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이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 최초로 공개되는 드로잉, 잡지 표지화, 편지, 그리고 각종 유품들은 이쾌대의 예술세계를 한 단계 깊이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다.   


2. 이쾌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이쾌대는 일제 식민지시기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 어울리는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하고, 해방 후에는 새로운 민족 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화가다. 그는 진지한 탐구정신과 뜨거운 열정으로 당시 화단을 이끌었고, 탁월한 그림 실력과 독자적인 주제의식으로 한국 근대미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1953년 월북 이후 남한에서는 그의 이름 석 자조차 언급이 금지되었다. 북한에서 역시 평탄치 않았다. 주체사상이 대두되면서 금기작가가 되고 만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긴 했다. 남한에서는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 1991년 신세계미술관의 《월북작가 이쾌대전》 이후 대중에게 점차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북한에서는 1998년부터 공식적으로 이름을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북화가라는 이력 때문에 이쾌대에 대한 불편한 오해가 계속되었고, 작품의 대다수가 유족 소장으로 전해져서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따라서 우리가 이쾌대라는 예술가를 온전히 만나고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 이후 70년, 이쾌대가 타계한 지 50년이 된 2015년 마련된 이번 전시는, 그동안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을 대면하고 그의 예술세계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3.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6․25가 발발했을 때, 이쾌대는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고,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공산 치하의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 부역을 하였다. 그리고 9월 28일 서울은 국군에 의해 탈환되었지만, 이쾌대는 국군에게 체포되어 부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8월에 태어난 막내아들과 가족들을 두고 집은 떠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이쾌대는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과 조각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1948년 초 이미 월북을 감행한 친형 이여성 때문에 남한 사회에 돌아가기가 불안했기 때문인지, 좌우익 간의 내부 갈등이 심했던 포로수용소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지, 이쾌대는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한을 택하였다. 

이후, 남겨진 가족들은 월북작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시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집 주위에는 늘 사복경찰이 맴돌았고, 부인 유갑봉 여사는 경찰에 불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유갑봉 여사는 그림들을 다락방에 숨겨서 보관하였다. 이쾌대와 유갑봉 여사가 살던 신설동 집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공간이 있었다. 이쾌대가 포로수용소에 수감될 때 갓난 아기였던 막내아들 한우(1950년 8월생)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다락방에 숨겨진 그림의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이쾌대가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라고 당부했지만, 유갑봉 여사는 어린 네 자녀의 생계를 어렵게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작품을 고스란히 지켜낸 것이다. 

1988년에서야 월북화가들에 대한 해금이 단행되었다. 그동안 거론조차 할 수 없었던 이쾌대를 당당히 말하고, 어두운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그림이 햇빛을 보게 되었지만, 이미 유갑봉 여사는 1980년 1월 세상을 뜬 뒤였다. 해금 이후 막내아들 한우는 미술품 수복 전문가에게 작품의 복원을 맡겼고, 드디어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개최되었다. 

그로부터 24년 뒤,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전시되어 왔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망라하고, 여기에 더하여 미공개 유품과 드로잉을 함께 소개하여 이쾌대의 예술, 이쾌대의 사랑을 조명한다.  


□ 전시 소개

1. 사랑을 그리다 : 1929~1937

 이쾌대가 휘문고보 시절 제작한 수채화 <정물>(1929)부터, 제국미술학교 졸업작품인 <무희의 휴식>(1937)까지 수업기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쾌대는 휘문고보에서 서양화가 장발(張勃, 1901~2001)을 담임교사로 만나면서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휘문고보 5학년인 1932년 미술가의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로 입선하였고, 졸업 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휘문고보 졸업반이던 때에 유갑봉과 결혼한 이쾌대는 유학시절을 아내와 함께 보냈다.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쾌대는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다. 사랑하는 아내 유갑봉은 이쾌대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 넣는 ‘뮤즈’와 같은 존재였다. 아내의 초상화에서 시작된 이쾌대의 여성인물화는 차츰 조선의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변화하였다. 이후 이쾌대의 예술에서, 여성은 자신이 처한 운명을 극복해 나아가는 강인한 민족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2. 전통을 탐구하다 : 1938~1944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화가로서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는 1938년부터 해방이전인 1944년까지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 시기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신미술가협회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적인 서양화 양식을 모색해가는 모색기이다
 이쾌대는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8년 일본의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 <운명>으로 입선하고, 1939년, 1940년 같은 전람회에서 잇달아 입선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가 되어 귀국한 그는 1941년 김종찬, 문학수, 김학준, 진환, 이중섭,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이쾌대는 전통 복식의 표현과 색채의 조화에 매우 고심하였다. 초기에는 어둡고 침통한 분위기의 그림들을 그렸지만, 귀국 후 신미술가협회 활동을 하면서 서양화에 전통 회화의 기법과 색채를 도입한 새로운 회화를 선보였다. 과감한 색면 처리, 밝고 명랑한 색채의 사용, 검은 필선의 강조 등 예술적 실험을 시도하였다. 이는 그의 탄탄한 데생력과 결합되면서, 이후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 시대를 끌어안다 : 1945~1953

 좌우의 이념갈등이 극으로 치닫던 해방공간에서 시대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예술의 방향을 수립하고 대작을 발표하는 전성기의 작품을 소개한다. 
 1945년 8월 일제의 식민지배가 종식을 고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의 감격 속에서 이쾌대는 새로운 민족미술의 건설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일제의 잔재를 벗은 새로운 미술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미술의 시급한 과제라 생각했다. 
 이쾌대는 그동안 연마한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장대하고 역동적인 군상들을 발표하였다. 수십 명이 한데 엉켜 있는 군상은 이쾌대가 지금까지 쌓아 온 인물화 기량과 조형감각이 아낌없이 표출된 작품들이다. 이쾌대는 르네상스 미술부터 20세기 초 사회주의 리얼리즘까지 다양한 미술을 폭넓게 수용하였고, 여기에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전통의 색채를 결합함으로써 한국적인 리얼리즘 미술을 창조하였다. 이로써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그림으로 증언하고자 하는 이쾌대의 예술적 사명은 독자적인 회화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미술에 대한 그의 꿈은 멈추고 말았다. 




이쾌대 연보

1913  (1세) 
1월 16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지천면(支川面) 신리 출생

1928  (16세)   
대구 수창보통학교를 졸업

1932  (20세)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 입선 
11월 5일, 유갑봉과 결혼

1933  (21세)
휘문고보 졸업

1938  (26세)
도쿄 제국미술학교 졸업
'제25회 이과전(二科展)'에 <운명> 입선

1939  (27세)
'제26회 이과전'에 <석양소풍>(夕涼み) 입선
첫 아들 한민(漢民) 출생

1940  (28세)
'제27회 이과전'에 <그네>(鞦韆圖) 입선

1941  (29세)
김종찬, 문학수, 김준(김학준), 진환, 이중섭, 최재덕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 

1942  (30세)
둘째 아들 한식(漢植) 출생

1943  (31세)
신미술가협회 주최로 '이쾌대화백유화발표전'(화신화랑) 개최

1944  (32세)
'유채화 10인전'(종로화랑)에 길진섭, 김만형, 김인승, 김환기, 박영선, 배운성, 심형구, 이종우, 최재덕과 함께 참여 
딸 수생(壽生) 출생

1945  (33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에 가입

1946  (34세)
‘독립미술협회’를 결성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산하 ‘조선조형예술동맹’ 회화부 위원 선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강원도해방탑건설준비위원회'의 초청으로 북한 방문
‘조선미술동맹’ 서양화부 위원장 선임 

1947  (35세)
조선미술동맹 탈퇴, ‘조선미술문화협회’ 위원장 선임.
성북회화연구소를 정식으로 개소

1948  (36세)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52문화예술인성명'에 참여
좌우 이념을 초월한 자주적 민족통일을 천명하는 '문화언론인 330명 선언'에 참여

1949  (37세)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후 사상전향을 강요받음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경복궁미술관)에 추천작가로 선정

1950  (38세)
6.25전쟁 후 북한군에 서울이 점령되자, 정치보위부에 자수를 강요당한 후 재건된 조선미술동맹에 재가입
막내아들 한우(漢羽) 출생
서울 수복 무렵, 국군에게 체포되어 부산 100수용소에 수감

1953  (41세)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휴전 후 남북포로교환 때 북한을 선택
북한에서 건설성 미술제작소 미술가, 조선미술가동맹 평양시, 자강도 현역미술가로 활동

1965  (53세)
2월 20일 위천공으로 사망. 1987년 사망하였다는 설도 있음



대표작 소개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72x60cm, 개인소장 


이쾌대의 대표작 중의 하나. 1948~1949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전해져 왔지만 사실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이쾌대의 얼굴과 그림의 스타일로 미루어 1940년대 중후반 무렵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이쾌대는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적인 서양화를 모색하면서, 한국의 밝고 명랑한 채색에 주목했다. 평화로운 농촌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언뜻 보면 밝은 분위기 같지만,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화가의 모습은 자못 진지하고, 굳건하게 다문 입술과 엄숙한 눈빛은 단단해 보이면서도 예민한 화가의 심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유화물감이 발라진 팔레트와 함께 들고 있는 붓은 동양화의 모필(毛筆)이고, 서양식의 중절모와 함께 갖추어 입은 옷은 한복이다. 이쾌대가 실제로 동양화 붓을 사용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서양화가이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화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시골을 배경으로 화가의 자화상을 그린 것은 민족의 앞날을 지키고자 하는 예술가의 소명의식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카드놀이 하는 부부>,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91.2x73cm, 개인소장


이쾌대는 20세, 휘문고보 졸업반이던 해에 유갑봉과 결혼식을 올렸다. 휘문고보 졸업 후 이쾌대가 일본 유학을 떠나고 홀로 남은 유갑봉이 쓸쓸해 하자, 이쾌대의 부모는 일본에 집을 마련하여 부부가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쾌대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웠고, 부인과 함께 행복한 신혼생활을 꾸려 나갔다. <부부>는 앳된 신혼부부의 한가한 오후를 포착한 듯한 그림이다. 마시다 만 술병과 손에 쥐고 있는 카드, 붉게 상기된 뺨, 만발한 꽃은 여흥이 무르익은 자리를 드러낸다. 하지만, 화면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한낮의 태양빛과 대조적으로 굳어 있어서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인물의 외형뿐만 아니라 분위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능하였던 이쾌대의 특징이 엿보인다.




<무희의 휴식>, 1937, 캔버스에 유채, 116.7x91cm, 개인소장


이쾌대는 제국미술학교 5학년이던 1937년 학내 그룹전인 로쿠호샤 전람회에 이 작품을 출품하였다. 그리고 이 그림을 다시 졸업작품으로 출품하여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동안 관심을 기울여 온 인물화의 성과가 잘 드러나는 이 그림은 단장을 마치고 곧 있을 공연을 기다리는 듯한 무희를 그렸는데, 무희의 단단한 눈빛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결의가 느껴진다. 무희가 입고 있는 녹색 원삼, 색동 한삼, 녹색 화관 등은 전통적인 궁중무 복식으로서, 복식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고 자세하여 이쾌대가 전통복식에 상당한 이해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체의 형태에 대한 이해, 인물을 둘러싼 분위기의 묘사, 조선의 전통을 소재로 다루는 방식 등에서 이쾌대 특유의 작품세계가 자리잡아 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상황>, 1938년, 캔버스에 유채, 156x128cm, 개인소장



<무희의 휴식>을 그린 지 불과 3개월 후에 완성했다. <무희의 휴식>이 무용수의 표정과 방 안의 분위기를 통해 미묘한 느낌을 자아냈다면, 이 그림은 무희를 중심으로 노파, 젊은 남자, 벌거벗은 여인 등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깨진 그릇과 화려한 패물 등의 기물을 함께 표현함으로써 훨씬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두 손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무희, 벌거벗은 여인, 패물을 든 노파, 머리를 풀어헤친 무희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성들이 한 무리가 되어 있고 뒤쪽으로 한 남자가 이들과 무관한 듯 반대편을 향해 서 있다. 이 그림은 인물들의 극적인 표정과 자세 등으로 인해 각기 다른 의미와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쾌대가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하 식민지에서 조선 사람들이 겪는 수난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시각들이 많다. 



<이여성>, 미상, 캔버스에 유채, 90.8x72.8cm, 개인소장


이여성은 이쾌대보다 12살 위의 친형이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0년에 귀국,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역임했고 이후 복식연구가, 한국화가, 미술사학자로 활동했다. 이 그림에서 한복을 입은 이여성은 개다리소반에 턱을 괴고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전통복식을 연구하고 한국화가로 활동할 정도로 전통에 관심이 깊으면서도 신학문에 조예가 깊은 지식인이었던 이여성의 진지한 학자적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한국적인 서양화법을 모색하던 1940년대 초 이쾌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노란 바닥, 붉은 소반, 푸른 저고리와 배자 등에 보이는 밝고 명쾌한 색채의 구사, 대상에 구애받지 않은 화면 자체의 마티에르 표현 등에서 모던한 감각을 읽을 수 있다. 




<부녀도>, 1941, 캔버스에 유채, 73x60.7cm, 개인소장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연상시키는 가녀린 조선여인을 소재로 했다. 이쾌대가 1941년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면서 출품한 <부녀도>는 이 그림과 소재는 같으나 구도는 다르다. 이 무렵 이쾌대가 조선시대 여인을 소재로 한 그림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가녀린 몸매와 흐린 눈빛을 한 여성의 모습은 이전까지 이쾌대가 그린 여성상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전까지 몸짓과 표정을 통해 인물의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던 것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인물의 감정이나 생각을 읽어내기 어렵다. 과거의 그림들이 인물을 통해 특정한 상황과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이 그림은 조선여인의 아름다움과 색채의 세련미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 고전에 대한 관심이 당대의 회화 형식과 결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과도기적 작품이라고 하겠다.



<군상Ⅰ-해방고지(解放告知)>, 1948, 캔버스에 유채, 181x222.5cm, 개인소장


이쾌대는 1947년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1948년 4월 ‘제2회 조선미술문화협회전람회’에 이 작품을 출품했다. ‘해방을 알린다’는 제목처럼, 소식을 전하는 듯한 두 여성이 왼편에서 달려오고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이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미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의 시체,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방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표정에는 굳건하고 기운찬 의지가 느껴진다. 이쾌대는 해방공간의 혼란, 이를 헤쳐나가려는 사람들의 의지, 그리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자 한 듯하다. 2미터가 넘는 큰 화폭에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그려진 이 그림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이었다. 



<군상 Ⅳ>, 1948년 추정, 캔버스에 유채, 177x216cm, 개인소장


이쾌대는 해방직후부터 ‘군상’ 제작에 몰두했고, 1948년부터 조선미술문화협회에 <해방고지>, <창공>, <조난>, <군상> 등을 발표하였다. <군상 Ⅳ>는 이쾌대가 제작한 군상 중에서도 비교적 나중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왼쪽 밑에서 오른쪽 위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유기적인 구성, 인물군과 배경의 정돈된 처리, 확고하고 자신감 있는 인체의 묘사 등에서 다른 군상보다 진전된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른편에는 절망에 빠져 있거나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지만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대화를 나누는 듯한 두 남성, 흰 천에 싸인 채 남성에게 들려 가는 여성 등 다양한 인물들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자아내지만, 해방공간의 혼란한 틈을 타 언젠가 찾아올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은 그림임에는 확실하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벌거벗고 있어서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실존성이 더 강하게 부각될 뿐만 아니라, 인체 묘사력과 해부학적 지식이 뛰어났던 이쾌대의 역량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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