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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풍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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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JCC미술관 특별기획전 <혜화동풍경>

전시기간: 2016.05.10(화) ~ 07.10(일)

전시장소: JCC아트센터 1~4층

참여작가: 이대원, 장욱진, 조병화, 한무숙, 김민주 김보람(영상다큐멘터리), 김상규(공간디자인)

전시작품: 회화, 문학작품, 혜화동 영상다큐멘터리, 설치 등 총 100여 점

전시가격: 일반 5,000원/초등~청소년 4,000원/20인 이상 단체 4,000원


주    최: (재)재능문화

주    관: JCC미술관


작품후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조병화문학관, 한무숙문학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오영식


관람시간: (화~일요일) 10:00~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전시 연계 교육프로그램: 교육 담당 이승주 과장 T.2138-7374

                        1. 사진을 활용한 나의 혜화동 이야기

                        2. 혜화동풍경: 동네 탐방

                        3. JCC 건축 탐방프로그램




JCC미술관 <혜화동풍경>전은 . .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조병화문학관, 한무숙문학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근대서지학회 등의 후원으로 작품과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다큐멘타리 영상을 제작하여 문화예술 작품뿐 아니라 그들의 내밀한 삶,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JCC 공간에 담았습니다. 


이대원 화백은 1935년부터 2005년 작고할 때까지 혜화동에 사셨습니다. 

장욱진 화백은 1954년부터 혜화동 로터리 작은 집으로 이사를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의 부인은 1954년 생활을 위해 동양서림을 개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1954년에 혜화동 로터리 집에 살기 시작한 조병화 시인은 평생을 이곳에 살며 혜화동 거리와 사람들을 노래하는 수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1954년부터 혜화동 한옥에 살던 한무숙 소설가의 집은 한무숙문학관으로 변하여 아직도 그의 문학과 삶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이 모여 살던 이 혜화동 로터리에는 50년이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방구,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동네 어른들의 머리를 손질해주고 있는 이발소, 중국집, 찻집, 약국 등 수 십년이 넘는 숨결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전차가 지나가기도 하고, 분수가 생겼다가 사라졌으며, 지상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가 생겼다가 철거되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고 사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느끼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화동은 날마다 밤마다

떠났다간 돌아오고

돌아왔다간 떠나는

나의 터미널……


조병화 시인이 1981년 발표한 연작시連作詩 ‘혜화동 풍경’의 한 구절입니다. 이 시구詩句와 같이 혜화동은 사람들이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터미널과 같습니다. 성곽 마을인 명륜·혜화권역에 위치한 혜화동은 먼 과거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모여 살던 반촌을 중심으로, 가까운 과거인 근현대 문화 형성기에는 학원과 대학을 중심으로 한 청년 문화의 발원지였습니다. 그리고 혜화동이 품은 이러한 장소성은 고스란히 오늘날로 이어져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에 이르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했습니다.


JCC미술관은 2016년 첫 전시로 우리 동네, 혜화동에 대해 생각해보는 <혜화동풍경惠化洞風景>전을 개최합니다. ‘무엇이 이 작은 동네를 유구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했을까요?’ <혜화동풍경>전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골목길을 재현한 전시장에서는 혜화동, 그중에서도 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과 지금의 혜화동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혜화동에 관한 많은 시詩와 에피소드를 남긴 시인 조병화와 한국인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치밀하게 담아낸 소설가 한무숙, 명륜동 자택인 관어당과 동양서림을 오갔을 화가 장욱진, 70년 넘는 세월을 혜화동의 터줏대감으로 살았던 화가 이대원 그리고 혜화동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통해, 혜화동이 품은 문화예술의 향취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이정표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


혜화동 로터리는 날마다 분주합니다. 혜화로, 창경궁로, 대학로 그리고 동소문로가 만나는 이곳 로터리에서는 큰 도로를 따라 들어온 차량들이 교통도交通島를 중심으로 분주하게 한 방향을 향해 움직입니다. 동서남북… 흘러들어온 방향과는 무관하게 로터리의 차량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만 돌다가 각자의 목적지에 맞는 출구를 찾아서 빠져나갑니다. 한때는 전차가, 또 한때는 분수가 놓이고 그 위를 고가高架가 지나가던 혜화동 로터리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었지만 사람들이 들고나는 모습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에는 많은 사람이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갔을까요? 돌고 도는 혜화동 로터리는 마치 타임머신과 같습니다. 

혜화동 로터리를 시작으로 ‘혜화동 풍경’ 속으로 산책을 떠나볼까요?  



두 번째 이정표

하늘의 주소: 조병화, 한무숙


혜화동 풍경의 두 번째 이정표에 도착하면 시인 조병화와 소설가 한무숙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주소, 혜화동 107번지에 50여 년을 살았던 조병화는 혜화동에 관한 많은 시詩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매일 아침 8시 15분, 로터리에서 통근 버스를 타고 혜화동을 떠난 시인은 늦은 시간 술이 거나하게 취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밤 12시, 로터리에 위치한 시인의 집 현관문은 통금 시간에 갇힌 많은 예술가의 두드림으로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밤을 새우는 예술가들의 흥취는 로터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위치한 고즈넉한 한옥으로 이어집니다. 소설가 한무숙의 집입니다. 명륜동1가 33-100번지에 살았던 한무숙은 1953년부터 40년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네모난 하늘을 받쳐 든 한무숙의 집은 고향을 떠나 고학하던 많은 문학청년이 찾아와 숙식을 해결하던 문단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습니다. ‘생활은 평범하게, 사고는 비범하게’라는 신념으로 가정생활에 충실하면서도 예술가들과 교류를 마다하지 않았던 한무숙은 이곳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담은 많은 소설을 남깁니다.         



세 번째 이정표

공동탕共同湯: 혜화동에서 만난 사람들


지금의 혜화초등학교 맞은편에는 대중목욕탕이 있었습니다. 조병화의 표현대로, 동네 사람들의 공동탕共同湯이었던 이곳은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혜화동 사람들이 몸을 담그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 공동탕은 없어졌지만 이곳 세 번째 이정표에 오면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웃, 혜화동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화가 장욱진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가 운영하던 동양서림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건재합니다. 호떡집에서 시작해 중국음식점으로 3대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문金門은 로터리의 또 다른 명소임을 자처합니다. 또한 혜화동 우체국을 끼고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문화이용원의 이발사 할아버지는 60년 넘게 혜화동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습니다. 창작 연극의 산실인 혜화동 1번지와 연우소극장 앞은 연극인들의 실험 정신으로 활기가 넘칩니다. 1968년 문을 연 혜화초등학교 근처의 보성문구사는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로 북적입니다. 로터리 주변의 파출소와 유서 깊은 혜화성당 그리고 근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장면 가옥은 혜화동의 유구한 역사를 대변합니다. 그리고 발랄하게 오가는 인근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지금의 혜화동을 살아 숨 쉬게 하는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네 번째 이정표

시간의 숙소宿所: 장욱진, 이대원


명륜동2가 22-2번지, 두 팔을 벌리면 닿을 듯한 좁은 골목길에 유일한 이층집이 있었습니다. 장난감처럼 작은 이층집에는 그보다 더 작은 창문이 있고요. 그 창을 들여다보면 구부정한 등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장욱진을 볼 수 있습니다. 하꼬방 같은 화실에 화가가 없다면 혜화동 로터리 주변을 둘러보세요. 술에 얼큰하게 취해 고개를 숙이고 가는 깡마른 준노인을 만난다면 그가 바로 장욱진입니다. 혜화파출소에서도 선생만은 예사로 봐줄 정도로 유명한 애주가였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며 작업하던 열정의 천재 화가였습니다. 장욱진의 화실이었던 명륜동 관어당觀魚堂은 세상의 변화 속으로 사라졌지만 관어당이 남긴 예술은 영원할 것입니다. 


화가 이대원의 아틀리에는 혜화동 15-50번지에 있었습니다. 파주에서 살다가 열다섯 살이 되던 1935년 혜화동으로 이사 온 화가는 2005년 작고할 때까지 무려 70년을 혜화동와 파주를 오가며 지냈습니다. 중학생 때 이사 온 집에서 대학생이 되고, 가장이 되고, 화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된 이대원은 70년 넘는 혜화동살이를 엮어 「혜화동 70년」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한 화가가 자라고 결혼하고 생을 마감한 이곳 혜화동은 그의 삶과 예술이 그대로 숨 쉬는 곳입니다.    


JCC미술관 특별기획전 <혜화동풍경>은 ‘매일 아침 그 자리, 혜화동 로터리’에서 출발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인 조병화와 소설가 한무숙의 ‘하늘의 주소’를 거쳐, 지금의 혜화동을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을 만나는 ‘공동탕’ 지나 다시 장욱진, 이대원 두 화가가 머물던 ‘시간의 숙소’를 다녀오는 짧고도 긴 여행입니다. 혜화동은 광복 전후 문학과 미술, 음악, 연극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이 오가던 곳으로, 근현대 문화 형성기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고 예술혼을 다지던 장소입니다. 이러한 혜화동 길, 그중에서 로터리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조병화, 한무숙, 장욱진, 이대원과 같은 한 세대 위 예술가들의 작품과 자료는 혜화동 곳곳에 숨어 있는 문화예술의 정취를 전합니다. 더불어 당대를 살고 있는 혜화동 이웃들의 잔잔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 각자의 동네가 품은 오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요?  




■ 이대원李大源 (화가/ 1921~2005)

1921년 경기도 문산에서 출생한 이대원은 1945년에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보통학교부터 중등학교 시절까지 학생미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고 1938년에서 1940년 사이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속 입선했으며 광복 후인 1955년에는 국전에서도 입선했다. 1959년에 아시아재단이 운영하던 반도화랑을 맡아 운영했고, 조선 공예를 사랑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 『한국과 그 예술』(1974)과 조선 공예를 아끼고 연구한 아사카와 다쿠미의 생애를 다룬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1996)을 번역했다. 개인전을 다수 개최했으며 미국, 일본, 독일, 파리 등 해외전도 왕성하게 개최했다.

1967년에서 1986년,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미술대학장과 홍익대 총장을 역임했다. 1935년부터 혜화동에 거주한 이대원은 혜화동 50년을 기념해 화문집인 『혜화동 50년』을 발간했으며 이후에는 증보해 『혜화동 70년』 을 펴냈다. 



■ 조병화趙炳華 (시인/ 1921~2003)

1921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조병화는 1943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물리, 화학을 수학하다가 일본 패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5년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수를 시작으로 인천중학교, 서울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출간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선다. 아울러 중앙대, 연세대 등에서 시론을 강의하다가 1959년 경희대학교 교수를 시작으로 1981년부터는 인하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시는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인 허무와 고독이라는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해 꿈과 사랑의 삶을 형상화한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1953년부터 혜화동에 살며 외로운 도시인의 실존적 모습, 허무와 고독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꿈과 사랑으로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생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쉬운 낭만의 언어로 그려냈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겸해 초대전을 여러 차례 열었다. 지금까지 창작시집 53권,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화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등을 비롯해 총 16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 한무숙韓戊淑 (소설가/ 1918~1993)

1918년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한 한무숙은 처음에는 화가를 지망해 19세 때에는 김말봉의 장편소설 「밀림(密林)」의 삽화를 그린 바 있다. 그러나 1940년 김진흥과 혼인한 뒤 엄한 집안의 며느리로서는 그림 그리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소설가로 전향하게 되었다. 1943년 『新時代(신시대)』 장편소설 공모에 「灯を持つ女(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뒤이어 조선연극협회 작품 모집에서 희곡 「마음」(1943)과 「서리꽃」(1944)이 각각 당선되기도 했다. 『국제신보』 장편소설 공모에 「역사는 흐른다」(1948)가 당선되어 작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국제신보』 폐간으로 『태양신문』에 연재됨). 1953년부터 명륜동에 살면서는 그는 「월운月暈」(1956), 「감정이 있는 심연」(1957) 등과 같이 인간의 심연을 분석하는 작품을 남긴다. 그 뒤에는 근현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한국의 여인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낸 「유수암流水庵」(1963), 「생인손」(1981), 「송곳」(1982) 등을 발표하였다. 국제 펜클럽(PEN Club) 활동과 미국, 멕시코, 일본 등지에서의 강연을 통해 한국문학을 해외에 알리는데 힘썼으며, 1986년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았다. 



■ 장욱진張旭鎭 (화가/ 1917~1990)

1918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장욱진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에 몰입했다. 소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전국 규모의 미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장욱진은 이후 동경의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광복 직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잠시 근무하고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로 봉직한 것 말고는 혜화동과 한적한 시골인 덕소, 수안보, 신갈 등지에 화실을 마련해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림과 주도酒道 사이를 오가는 자유로운 무애의 삶을 살았다. 신명 하나로 그림을 그리기를 고집하는 그를 세상의 눈은 기인으로 여겼다. 앙가주망, 2.9동인전 외 주로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작은 캔버스 안에 간결한 대상의 처리와 조형성으로 밀도 높은 균형감을 내포하고 있다. 주로 주변 풍경, 가축, 가족을 소재로 다루었으며 그 안에서 유화적인 감정과 풍류적인 심성을 표출했다. 기법 면에서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장벽을 넘나들며 우리의 전통을 현대에 접목해 조형적인 가능성과 독창성을 구현했다. 여러 권의 화집과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가 있으며 유작전 및 회고전이 열렸다.



■ 김민주 (영상다큐멘터리)

중앙대학교 영화연출을 전공했다. 단편영화 연출 및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을 했다. 연출한 <취업의 정석>으로 제13회 미장센 단편영화제에 초청 받았고, 다큐멘터리 영화 <어린 인생>, <에필로그> 등의 촬영을 맡았다. 현재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촬영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 김보람 (영상다큐멘터리)

중앙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프로듀서와 작가고 활동했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와 상하이 필름페스티벌에 초청받은  <우포늪의 사람들>을 썼고, 현재 독립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사 킴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제작 중이다.



■ 김상규 (공간디자인)

서울대와 국민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주)퍼시스 디자이너,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의자의 재발견』, 『사물의 이력』, 『착한 디자인』 등이 있으며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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