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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양 : Poem &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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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서문, 작가노트, 평론 


[ 작가 노트 ]


사물의 진짜 이름은 오직, 사물만이 알고 있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사물의 '에타포(Etaphor)'이다.

 * 에타포 'Etaphor' (Essence + Metaphor) : 사물의 본질에 의한 은유적 현시(顯示)


[ 추천의 글 ]

 

시(詩)는 은유(隱喩 Metaphor)이다. 사진 속 ‘은유’를 찾아본다. 전신주와 함께 얽히고 늘어진 전선, 나무, 지붕 등.. 그런데, 자세히 봐도 은유는 보이지 않는다. 무채색의 멜랑콜리(Melancholy)한 이미지, ‘시 & 선(詩 & 線 : Poem & Line)’이라는 선문답(禪問答) 같은 제목.. 유형학(Typology)적 구성일 것이라는 예상도 빗나갔다. 동시대 예술이 그렇듯, 언어적 코드가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될 때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오히려, 직관적인 듯 보이지만 철저히 계산된 프레임은 '그 때, 거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상기시켜주며, 전신주와 전선의 파사드(Facade)를 체험하게 만든다. 그 흔한 것들이 문득 낯설어졌다.


인류의 탄생 이후, 명명(命名)되어지는 세상의 모든 ‘언어’들은 그 명명의 주체인 명명자(命名者)의 의식(意識)을 통해 요청되어진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발생한 언어들은 주체의 의식 속에 침전(沈澱)되어 다시, 그 주체를 구축(構築)하는 순환을 반복한다. ‘대상(對象)’의 존재는 우리가 명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상은 이미 그 스스로가 ‘본질(Essence)에 대한 은유’로 존재한다. 이로써, ‘선(線)’은 ‘시(詩)’가 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는 『담론, 형상』(Discours, Figure)에서 '형상(形象)은 언어의 한계(限界)가 드러나는 지점에서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표면으로만 흐르는 언어의 한계가, 여러 층위를 갖는 이미지 형상으로 체험되어졌고, 작가는 이러한 '에타포(Etaphor)'의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제 천천히 바라보자. 내가 바라보는 대상 속 은유가 아닌, 대상이 그 스스로 은유가 되어 나에게 ‘시선(視線)’을 던진다.


- 백건빈 (독립큐레이터)

 

[ 시, 선에 대해 평론하다 ]


사진 평론가  서 민 석


케빈 코스트너가 감독 · 주연 · 제작을 맡은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Dances with Wolves, 1990)'이란 영화를 보면 북미 인디언들은 사물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주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먹 쥐고 일어서', '바람처럼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화의 주인공은 늑대와 함께 노는 모습을 보여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인디언들의 이름에는 성이 없다. 그들에게는 동물과 나무, 돌까지도 한 혈족이고 친척이며, 그렇게 자라서 자기들만의 성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인디언들의 세계는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마음을 주고 그것들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그 이름들은 울림이 있다.

 

  

아담(Adam)의 언어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자신의 초기 사상을 주도한 에세이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Über Sprache überhaupt und über die Sprache des Menschen』에서 언어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며 쓴 말이다. 


먼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란 제목부터 특이하다. 즉, 언어 일반(사물의 언어)이 있고 특별히 인간의 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언어를 갖고 있으며 '말함'으로써 사물은 창조되고 인식된다. 인간이 아직 주체가 아니고 자연은 아직 객체가 아니었을 시절, 이름만 들으면 그 사물의 정신적 본질이 저절로 알려지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언어적 본질을 발견해 내어 그것을 '이름'지었기 때문에 이름 자체가 본질을 드러내고, 사물 · 자연과 인간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다. 그러나 추상개념이 생성되면서 인간은 이 언어를 잃어버렸다.


사진은 언어다 !..?


‘아담의 언어’를 잃어버린 인간은 타락의 역사를 걷게 된다. 타락의 역사에 취해있던 도중 에 사진이 발명 되었다. 최초의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로 부터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소리로, 소리에서 말로, 말에서 문자로, 문자에서 다시 화상언어로 언어의 발전이 진행되었다. 이 화상언어로서의 시작에는 사진이 있다. 사진은 통역이나 번역이 필요 없는 보편적인 언어다.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그것은 현대적 시선의 출발이다. 사진은 말한다. “보는 것, 그것은 읽는 것이다.”라고...


로티(Richard Rorty 1931~2007)의 지적처럼 서양 철학사는 시각적 은유의 지배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보다(Voir)’는 ‘안다(Savior)’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 알려진 철학적 개념들, 즉 반성(Reflection), 사유(Speculation), 전망(Vision) 등은 어원으로 볼 때 ‘보다’라는 지각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Konermann) 서양철학에서 가장 고귀한 정신의 활동으로 여겨지는 이론(Theoria)은 시각의 영역에서 차용되어진 것이다. (Jonas) 인간의 역사는 시각중심으로 움직여 왔지만, 시각중심 문화는 인간학적인 절대적 조건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화 된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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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원에 관한 소론』에서 루소는 언어 그 자체는 은유로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말을 하도록 유도하게 된 최초의 동기는 정서였기 때문에 그의 최초 발화는 비유(은유)였던 것이다.


질병으로서의 은유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은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책에서, 질병(언어)이 은유로 표현되면서 생겨나는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자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결핵에는 언제나 낭만적인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결핵은 시인과 예술가들의 질병이자, 보헤미안의 병이었다. 결핵 환자는 고뇌와 열정으로 스스로를 소모한다. 장티푸스는 장티푸스를 ‘염병(染病)’이라는 또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장티푸스라는 질병에는 사회적 편견과 저주가 묻어난다. 에이즈라는 언어를 현대판 흑사병, 동성애, 혼외성교 같은 음탕한 성욕 같은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하거나 오염시키고 덧씌우면서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처럼 질병 자체의 에이즈가 아니라, 에이즈라는 언어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는 기묘한 현상도 나타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단지 질병 그 자체만이 이유는 아닌 것이다. 그 질병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공포스러운 언어들이 어찌 보면 더 큰 원인을 제공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질병은 그저 질병이며,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언어가 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현실적 실체가 갖는 다양한 속성은 축소되거나 은폐된다. 언어는 항상 개념 또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현실의 한 가지 측면을 강조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인지언어학자인 레이코프(George Lakoff)와 존스(Mark Johnson)는 『삶으로서의 은유 Metaphors We Live By』에서 은유적 표현이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의 사고 과정이나 개념 체계가 전반적으로 은유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한다. 언어의 생성과정 자체가 삶으로부터의 은유라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은유 생산자이며 은유 소비자로서의 은유로부터의 삶을 어렵게 살아내고 있다.


레이코프는 ‘이미지 은유’와 ‘의미 은유’에 대해서 말한다. 추상명사가 생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선(禪)적이며 시(詩)적인 표현은 사라지고 ‘이미지’ 대신 ‘의미’가 담긴 사유가 삶과 표현을 지배하는 철학적 삶이 시작된다. 이미지 은유가 의미 은유로 대체되어 일상에서 은유가 사라진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물과 사물, 이미지와 이미지, 개념과 개념이 충돌하여 하나가 어느 하나 뒤에 숨거나 대신함으로서 생겨나는 게 은유다. 순수 은유인 구상명사들만의 교감 즉, 원초적인 시적, 선적 은유는 ‘의미 은유’ 속에 꼭꼭 숨어있어, 숨바꼭질 하듯 힘들게 찾아내야만 교감이 가능하다.


이제, 사진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시 & 선(詩 & 線 : Poem & Line)'은 언어와 사물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의 측면들은 숨겨져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하고 친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알아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탐구에서 진정으로 근원적인 것은 우리에게 전혀 인상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일단 그것을 한번 본 다음에는, 가장 놀랍고 가장 강력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사진은 말한다. '사진은 전신주 그 자체가 아니며, 다만 전신주의 이미지일 뿐'이라고... 지각(知覺)하려는 욕망, 관람자의 응시, 사라진 은유, 부유(浮游)하는 기의(記意)... 엔지 양의 사진은 우리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 작품이미지


Poem & Line  No.1 pigment print 18.2×12.1cm, 2016




Poem & Line  No.2  Pigment Print, 18.2×12.1cm, 2014


Poem & Line  No.4  Pigment Print, 18.2×12.1c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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