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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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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 개요

전 시 명 윤명로, 그때와 지금 (Then and Now)
장    소 인사아트센터 전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41-1) 
주    최    가나문화재단
후    원    인사아트센터
일    시 2017. 1. 18 (수) – 2017. 3. 5 (일) 
오 프 닝    2017. 1. 18 (수)  오후 5시
출품 작품 윤명로 유화 및 판화 66여 점


2. 전시 내용

가나문화재단은 한국추상회화의 거장 윤명로(1936-)의 근 60여년 화업 인생을 기념하고 한국 추상회화가 걸어온 길을 오늘의 시각으로 재조명 하고자 <윤명로, 그때와 지금>전을 개최한다. 1960년 미술가협회 창립멤버로서, 당시 젊은 작가였던 그는 독립 이후 권위적인 국전 중심의 화단에 새롭게 도전하며 덕수궁 담벼락에 획기적인 전시를 주도하였다. 

당시 이 전시는 보수적이던 한국 미술계에 큰 이슈로 기록되어 있다. 윤명로는 1960년 서울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판화를 지속적으로 작업하면서 1968년 ‘한국판화가협회’를 창립하였다. 1969년 미국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프랫 그래픽센터에서 1년간 판화를 공부한 후 귀국한 그는 한국 현대판화의 초기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판화 작업 이 후 그 만의 독자적인 추상회화 세계를 구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번 전시는 1956년 윤명로 화백이 대학시절 그렸던 유화작품과 함께  10년을 주기로 변모되는 60년대 초기작을 시작으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신작을 포함한 판화 작품 등 60여점을 선보인다. 

본전시장에서는 <겸재예찬>연작의 연장선상에서 작업되는 최근작으로 전시되며, 제2전시장에서는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세상을 관조하며 무위의 경지에 도달한 완숙한 추상회화를 선보인다. <겸재예찬> 연작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를 창안한 겸재 정선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제3전시장에서는 <익명의 땅> 연작으로, 거대한 자연의 응축된 에너지를 화폭에 담아내며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느꼈던 경이로움을 강렬하고 역동적인 붓터치로 표현하였다. 

제4전시장에서는 연을 날릴 때 쓰이는 도구인 ‘얼레’와 행위를 나타내는 ‘짓’의 합성된 단어로, 1980년대 연작 <얼레짓>이 전시된다. 이는 연을 날릴 때의 움직임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것처럼 작품도 작가의 정신과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 5전시장에서는 1960년대에 미국의 액션 패인팅과 같은 기하학적 추상의 차가운면에 대응하며 추상의 서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럽을 배경으로 나타난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초기작이 전시된다. 음울한 시대속에서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젊은 예술가의 고민이 드러나는 작가의 초기작들과, 1970년대 윤명로의 연작 <균열>작품도 함께 구성된다. 

<균열>에서는 우연적으로 보이는 작품 표면과 작가가 의도성을 가지고 물감의 두께와 색채를 조절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작가가 우연히 물감의 갈라짐을 발견했는데, 이를 의도적으로 물감의 두께를 조절함으로써, 더 강한 마티에르적인 효과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이런 의도적인 개입으로 인해 기존 회화와는 전혀 다른 표현 기법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다. 3층 소전시장에서는 작가의 최근 판화작품과, 4층 소전시장은 작가의 작가 영상을 담은 비디오룸으로 구성된다.

가나문화재단은 작품의 끊임없는 변화를 모색하며, 독자적인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윤명로 화백의 화업을 재조명 하며, 그가 한국추상회화에 끼친 영향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또한, 1970년대 <균열>시리즈를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며 작가의 일상과 기록을 담은 에세이집도 출간 될 예정이다.


3. 작가노트

설령, 역사의 붕괴와 영광들로 떠들썩한 이 세계에서 인간의 분노와 희망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나는 괘념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의 사건이나 사물을 바라보듯 나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무척 고통스러움에 빠져들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과 더불어 그림에 의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폭력과 외설, 잡다한 재료와 저속한 생산물의 차용, 첨단과학에 의한 온갖 이미지의 난무로 자연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사상은 불멸의 자연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다. 

나는 텅 빈 여백을 기초로 해서 하나의 형, 하나의 색을 본다. 이름 지을 수 없는 이러한 형과 색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것, 들리지 않으면서도 들리는 것, 황홀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보며, 들리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들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나타내려는 나의 행위를 나는 격이라 부르며 영원히 익명의 땅으로 있기를 바라고 있다. 



참고자료

그때와 지금 : 한 미술운동가 회고전, 추상화가 윤명로의 경우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 


2017년 새해 벽두, 가나문화재단은 현대 한국화단의 한 ‘미술운동가’의 회고전을 개최한다.추상화가 윤명로(1936년생)를 말함이다. 

미술운동가라 하면 먼저 그 활동, 그 운동의 치열함이라 하겠는데, 윤명로의 경우 현대 서양화에서도 전위에 드는 추상화로 붓을 잡은 지 무려 육십년 갑년에 으르는 치열함이었다. 추상화에 대한 한길 몰입을 기려 국립현대미술관이 2013년에 진작 그의 회고전을 개최했다.

운동성은 저항의 몸짓이기도 한 것, 그의 그림 반생은 사회적 이목 속에서 출발했다. 4.19 혁명이 일어났던 그 해 1960년 10월, 당대 작가들의 등용문이라던 국전의 전시장이던 덕수궁의 그 바깥 영국대사관 쪽 돌담에다 그림을 걸었던 이른바 ‘벽전(壁展)이 사계의 화제였다. 

윤명로 등 서울대와 홍익대를 갓 졸업한 젊은 미술학도 12명이 “60년미술가협회”를 결성해 반(反)국전의 기치를 내건 작품 전시였다. 국전의 관료주의와 선정 작품의 보수성 등을 문제 삼으며 펼쳤던 길바닥 전시는 원로 화가들의 성원은 물론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959년 국전에서 특선까지 했던 윤명로에겐 그게 오히려 등단 선언이었다.

그의 미술운동은 동시대 조형미술가들의 작업을 눈여겨본 연후 일단의 미술활동이 현대한국의 중요 시대상이 되고도 남음을 역설하는 집필이기도 했다. 1976년에 창간되었다가 5공의 언론학살로 폐간된 사회 의식성 월간잡지 『뿌리깊은나무』 (1976년 6월 - 1980년 6월)가 있었다. 한글전용에다 그 내용이 우리의 전통을 국제 감각과 함께 살폈던 잡지였다. 

거기에 한 때의 ‘문학청년’답게 윤명로는 물 맛 같은 순순한 문장으로 “이달의 미술평”이란 고정 칼럼을 줄곧 집필했다. 당신의 스승들이던 김종영, 장욱진, 유영국 등의 행적도 제 삼자 시각에서 지긋이 바라 보라보는가 하면, 선후배 동업자의 작업도 긍정의 눈길로 살펴본 저술이었다. 글은 나중에 『모더니스트들의 도전과 환상』 (가나아트, 1996)으로 묶어졌다.

그의 미술운동엔 미술 본령의 심화가 빠질 수 없었다. 판화가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드높이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노릇이었다. 고려시대 대장경 목판화에 볼 수 있듯, 우리 판화도 그 기술적 완성도에서 진작 빼어났지만 단지 문자를 부연하는 종속적 시각매체로만 치부되었음에 착안하고는 일찍이 서구 현대미술 속의 판화미술 정수를 배웠다. 

그리고 스스로 제작도 하면서 가르쳤다. 1975년이던가, 서울미대 재학 시절의 스승 장욱진도 그의 작업실을 찾아서 <세한도>등 2점 판화를 재미있게 만들었다며 흐뭇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때 장욱진이 말해주었던 “한 교실에 있었던” 윤명로에 대한 평가가 무척이나 따듯했다.

화가 윤명로의 운동성 화업은 무엇보다 당신의 작업이 지향하고 발언하려는 바를 화제(畵題)로 표출하고 있음이다.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곧 가지(可知)의 세계를 그리는 사실화(寫實畵)와는 달리 추상화는 꿈, 감정 등 알 수 없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를 그린다. 때문에 딱히 무엇을 그렸다고 말할 수 없기 일쑤인지라 무제(無題)가 작품 이름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세상에 대한 발언임은 하나같이 공통된다.


윤명로는 고맙게도 특히 개인전 전시를 앞두고 그간의 작업을 대표하는 개념 또는 화제를 말해주었다. 무엇을 발언하고 있음인지 화제에 담았기 때문에 애호가들은 화가의 확의와 공감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의 작업에 대한 스토리텔링도 쌓여질 수 있었다. 

균열, 얼레짓, 겸재예찬 등이 그래서 유명세를 탔다. ‘균열’은 그가 이름 지은 최초의 표제어였다. 4.19 학생혁명의 성공으로 사회에 자유주의가 탄력을 받는가 싶더니만 5.16군사혁명이 파생시킨 엄습한 엄혹한 사회 상황을 바라보는 화가의 착잡한 심정은 무언가 자꾸 갈라져 나가는 분열 증세였는데, 그 심중의 표출이 그 시리즈였다. 

균열에 대한 직시는 오히려 경제적으로 살만해졌다는 오늘날 이 사회가 특히 이념적으로 심하게 분열된 상황에 대한 예단이 그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다.

얼레짓은 윤명로가 한동안 몰입했던 화두였다. 마구 흔들리는 사람 마음 같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죽(風竹)같이 보이기도 한다. 문인화가 즐기는 모티브인 대나무를 서양화법로 표현했다고 본다면 그 그림은 동양화이기도 하고 서양화이기도 하다. 

그의 미국 국기 그림을 보고 “그림이냐 국기냐?” 사람들이 묻자 미국 화가 존스(Jasper Johns, 1930-)는 “둘 다 다!”라 했다. 흔히 대립이기 일쑤인 이항(二項)의 통합 내지 수렴 인데서 존스 그림의 미덕이 있다는 말인데, 윤명로의 얼레짓 또한 동양화이자 서양화의 양가성(兩價性)을 표출해주고 있다.

겸재예찬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예찬으로 보인다. 진경산수로 자신의 정체를 확인했던 겸재처럼, 윤명로 또한 당신의 입지는 역시 이 땅, 특히 그 가운데 수돗물로 잘 올라오지 않던 1970년대 개발초기의 평창동 집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눈이라도 많이 내려 쌓이면 세상과 절연되는 그곳일지라도 북한산 형제봉의 우람한 바위 덩어리가 그간에 그를 위로한 것이 그 얼마인가를 말해주는 듯하다.

어느새 윤명로는 팔십대 노객으로 무르익었다. 나무로 치면 고목이 분명한데 실제로 고목으로 늙어가는 사람 키 세 질은 됨직한 청매 한 그루가 그의 집 앞마당을 지키고 있다. 초봄이면 나는 어김없이 주인이 있고 업고 간에 그 둘레 길을 걸어서 문향(聞香) 곧 매화의 향기를 들어왔다. 

매화는 묵은 가지에서 피는 꽃이라야 제 모양이 난다 했다. 모양만이 아니라 그 암향(暗香)이 폐부를 파고든다. 그 사이 육십년 동안 쌓았던 화력의 내공이 어느 등걸에서 어떤 발언, 어떤 화제, 어떤 스타일의 ‘꽃’을 피워내어 애호가들에게 감동을 줄 것 인가. 그래서 해마다 겸사겸사 초봄의 그 집 매화꽃이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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