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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영·정희우 한국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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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영, 정희우 두 작가가 그리는 우리 사회의 인상학

 

제8회 畵歌(화가)전은 ‘한국화’가 동시대 예술로서 소통 가능한 지점이 무엇인지, 관람객과 어떻게 공감대를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 동시대의 예술은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탐구되어야 하며 예술을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볼 때 사회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예술 자체로서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본 전시는 전통적 한국화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지 않는 사회적인 주제를 통해 현대 사회와 미술의 관계 맺기에 주목하는 작가들을 조명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민재영, 정희우 두 명의 작가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특히 현대 사회의 집약적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의 모습을 산책자의 위치에서 수집, 기록한 작업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있어서 ‘산책’이란 사회의 텍스트를 읽어냄으로써 우리 사회를 점검해보는 행위이자 사회를 인상학적으로 고찰하는 의미를 지닌다. 

 

‘거니는 자(산책자)'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플라뇌르(Flâneur)’는 19세기 도시의 스펙터클을 관조하는 참여적 관찰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에 의해 처음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20세기 독일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보들레르에게서 대도시 산책자의 전형을 발견하고 이를 현대 대도시의 내재적 현실을 밝히는 중요한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이번 전시에서의 산책자란, 바로 벤야민이 은유하듯 사회 속의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비판하는 자를 지칭한다. 무작정 걷는 구경꾼이 아닌,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주체성을 지니는 자, 즉 동시대의 보편성을 찾고 의구심을 가지며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생각에 대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대안을 모색하는 자이다.  

 

정희우는 한 세대 동안 압축적으로 일어났던 강남의 변천사에 대한 산증인이다. 그녀의 작업은 자본주의 가치판단에 편향된 현대 도시 공간의 비인간화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본격화된 이래로 생산시설은 이윤을 따라 부단히 이동해왔으며 자본은 공간을 빠르게,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써 경기불황의 돌파구를 찾았다. 정희우는 이러한 도시공간의 모습을 변화의 증인으로서 수집하고 기록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2년부터 16년까지 지속한 탁본 작업들 중에서 대표 작품을 선별하여 전시한다. 탁본 이전에 작가는 한국의 도시화가 가장 전투적으로 이루어졌던 강남대로를 지도처럼 기록하듯 그리는 프로젝트 〈시간을 담은 지도〉를 2011년까지 4년간 진행했다. 양재역에서 신사역까지 약 4km 구간을 걸음 수로 폭을 측량해 건물을 그리고, 대로 상 거의 모든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거리의 사람, 차, 도로, 나무의 사진을 찍어 그렸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에서 몇 년만 지나도 과거가 되어 버리는 것들을 고고학자의 사료를 미리 준비하듯 진행한 작업이다. 

강남대로 시리즈를 작업하면서 높은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모습은 거대 기호에 의해 암묵적으로 움직임이 형성됨을 알 수 있었다. 이때부터 도시의 흐름을 만들어 도시의 순환을 생성하는 기호들을 탁본한 〈필링 더 시티〉를 시작한다.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것이 탁본을 하게 된 이유이다. 주로 비석처럼 오래되고 역사적인 것을 기록하는데 이용되어 온 탁본 기법을 작가는 현대 도시를 기록하는데 사용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변해서 매 순간 유적이 되어가는 도시를 보다 실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탁본 기법은 작가가 얼마나 주체적인 산책자인지를 시사한다. 작가는 사진을 찍어 재현할 수 있는 장면을 굳이 가장 수고스러운 탁본으로 표현하는데, 사진은 주체와 대상이 늘 한걸음 떨어져 있는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해야 하지만 탁본은 관찰자 그 이상, 상대와 거리를 두지 않고 직접 만지고 쓰다듬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한 작업이며 겉으로 보이지 않는 촉각적인 것까지도 남기는 장점을 지닌다. 

2013년에는 1970년대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의 담을 탁본하는 작업 〈담지도〉 시리즈를 선보인다. 경제논리에 따라 재개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개인사에 스며있는 풍경들이 함께 사라져버리는 도시의 역사를, 그 풍경을 탁본으로 남긴 작업이다. 서울은 매일 공사 중이고 어제의 기억은 오늘, 오늘의 기억은 내일 지워지기 일쑤이다. 삶의 흔적이 있는 곳들이 개발, 재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현실 속에서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외관과 달리 텅 비어가는 도시의 기억을 붙잡고 싶은 작가의 애착이 담겨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2014년에는 이제 막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들에 주목하고자 종로 1가에서부터 6가에 남아있는 나무간판을 탁본한 〈종로의 나무간판〉 작업을 선보였다. 간판은 시대 변화가 매우 분명한 소재이다. 간판의 소재, 그 안에 쓰인 상호, 글씨체 등은 시대의 대세를 기호로 보여준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지역인 종로를 중심으로 아직 서울 곳곳에는 나무간판이 남아 있지만 마치 방금 옛날이 된 장면처럼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 중의 하나이다. 종로의 나무간판 작업을 보며 오늘이 지나면 바로 역사가 되는 서울의 과거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같은 해에 그녀는 바로 개발을 앞두고 있을 것 같은, 내일이 되면 개발되고 사라질 것 같은 강북 지역을 탁본으로 남겼다. 서울에 몇 안 남은 ‘백사마을’. 서울 강남처럼 개발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나둘씩 집을 짓고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치 옛 기억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을 자아내는 마을. 이 마을도 개발되고 나면 현재를 걷는 산책자의 수집은 또다시 과거의 역사가 된다. 

그리고 2016년 그녀의 작업은 사회적으로 확장된 지역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경(境)〉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민간인통제구역인 개성공단에 있는 도로표지를 탁본한 것이다. 10년간 수많은 차들이 개성으로 통행하기 위해 밟고 흔적을 남긴 민통선의 도로표지 기호들.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이 된 공간에는 시간의 흔적이 개성이라는 글씨에 균열로 남아 있다.  

이처럼 그녀는 지워져가는 도시의, 우리 사회의 흔적을 탁본으로 기록한다. 몸으로 걷고, 만지고, 수집한 그녀의 이야기에는 항상 우리 곁에 배경으로만 존재했을 것 같은 공간 하나하나가 주인공이 되어 뚜렷한 존재감을 뽐낸다. 정희우의 작업은 이 시대, 이 공간에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고찰이자 공간의 흔적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희우의 작업이 이 시대의 공간에 대한 기록이라면 민재영은 그 안의 사람들, 이 공간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자본주의적 기능에 따른 공간 조직의 변화는 현대인의 일상을 그에 따른 양식에 적합하게 조직화하는 강제성을 부여하였다. 통근권 형성, 공간적 활동 안에서의 규범화된 시간 사용 등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민재영은 이러한 사회 속 익명적 도시인의 군상, 그들의 심상에 누적되어 있는 어떤 장면들을 포착하여 그린다. 

이는 이어 붙여보면 그 누구의 이야기도 될 법한 반복되는 일상이며 그 안의 고단함, 피로, 강박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매일 조금씩 누적되어가는 마음속 풍경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내는 그녀의 작업은 한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아마도 타인과 만나고 부딪히고 스쳐가는 군집생활 속에 느끼는 막막한 고립에 대한 두려움 혹은 군중 속 안도감, 집단 속 잦은 마찰에 대한 극심한 피로와 같은 양가감정일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드러나는 심상적 징후에 관심을 두고, 보도 위를 부유하는 인간 군상 이미지의 파편들을 잠시 정지시킨 채로 그 단면을 들여다보듯이 공중에서 또는 사선 위에서 잡은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시에서는 수묵 주사선 위에 가로선을 중첩하여 표현하기 시작한 2005년경부터 현재까지의 작업을 선별하여 보여준다. 가로선 중첩을 통한 형상 재현은 지필묵이라는 동양화 재료를 쓰는 작가에게 모필을 사용하면서도 동시대 풍경을 그릴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작용한다. 화면 안에 단단한 구축감을 부여하면서도 이를 중첩시켜 양감과 입체감의 표현도 가능케 하는 것이다. 해상도 나쁜 모니터를 통해 흘러나오는듯한 흐릿한 가로줄을 수묵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은 차가운 현대의 도시적 삶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절묘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민재영의 작업에는 양복 입은 직장인, 교복 입은 학생 등의 계층집단이 주로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의 집단적 무의식을 이룰 정도의 보편적 체험들을 공통분모로 다루면서도 개인의 개별성의 표지를 옷의 주름이나 신체의 일부로서 드러낸다. 시기적으로 보면 2009년경부터 서서히 집단에서 분리된 개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동일한 장소에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인간은 개체 안에 개별성과 보편성을 지속적으로 교차시키며 자신을 확인하려는 습성이 있듯이, 교복이나 유니폼을 입고 언뜻 한 무리처럼 보일지라도 오래 지켜보면 각자의 체형 특징, 미묘한 움직임, 자세, 그림자 등에서 개별성의 표지를 발견할 수 있다.  

2014년부터는 익명의 보편적 집단의 모습에서 작가 주변의 이야기로 전환되어 간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한 사회의 일원이라 해도 중, 장년기로 접어든 각자의 삶의 경험은 단편적으로 포착되는 유사성 너머로 점차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무엇보다 작가로서의 삶이 흔히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삶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기에 작가는 ‘보편 집단’이라는 개념과 범주에 재고가 필요함을 느끼고 그간 뭉뚱그려 생각해오던 어떤 세대의 삶들이 내포한 각각의 개별성, 나아가 작가 자신이 속한 사회 내 생활양상의 관성이나 반복되는 특성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보편성’에 대한 변화된 관점은 형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변모를 보여준다. 〈20150808〉(2015), 〈관람〉(2014) 등과 같은 최근의 작업에서는 부감법의 시선은 이전에 비해 완충적으로 표현이 되고 있으며 가로 구조의 선은 대상과 공간의 경계를 보다 모호하게 통일된 분위기로 조직한다. 대상과 배경이 함께 녹아있는 듯한 독특한 표면의 질감 처리는 누적된 삶의 장면에 내재된 의미를 감성적으로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와 같이 민재영은 작가 자신과 주변의 행동반경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동선에 조응하는 내재적인 동시대 체험 풍경으로서의 이미지를 채집하고 그것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여기에 오랜 시간 사용해온 전통 재료로 동시대적 감성과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일회성의 진귀한 순간은 아니더라도, 그보다는 흔하지만 반복되어 우리 삶 속의 어떤 상징적인 단면으로 자리한 풍경을 기억 속 잔상처럼 그려내는 그녀의 작업은 사회가 특정한 분위기를 갖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에 더께를 얹듯 쌓아올려 완성한다. 

 

이상으로 살펴본 두 명의 작가는 도시의 물리적 구조 이면에 놓여 있는 집단적인 무의식과 잊힌 기억을 다시 끌어올리는 작업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를, 그 안의 존재를 재발견하고 삶의 시선들을 전회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들의 산책 행위는 도시 경험의 파편화와 현대적 기억상실증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며 지리적 실체로서의 도시가 아닌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실체로서의 도시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획일화된 도시, 고독한 군중, 소외된 도시인 등으로 변형되어 표현되어 온 동시대 사회의 표면을 이들 산책자는 공간에 얽힌 흔적들을 되살림으로써 삭막한 도시에서 살아갈 의미 공간을 부단히 창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흔하게 여기고 지나쳤던 순간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주제 표현을 지닌 완숙미 있는 중진 작가들을 통해 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동시대 예술로서의 현대 한국화의 변주를 짚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재)한원미술관 큐레이터 이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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