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전시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전시상세정보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수억탄생100주년기념전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 관련행사
  • 전시뷰어



한국미술의 보편적 상수(普遍的 常數)
이수억탄생100주년기념전
2018-11-14 ~ 2018-11-20
경인미술관



작가편지 <나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나는 자연의 열정이 담겨져 있는 그림 그 속에서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무리 개성이 존중되는 예술세계라 하더라도 나약하고 병적인개성과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개성이 강조된 작품은 찬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건강한 개성과 영원한 젊음을 내포한 작품, 즉 낡은 방식의 표현이든 새로운 표현이든 관계없이 영원한 좋은 예술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고 싶다.

내 고향은 천리장성의 시발점인 선덕성이 있는 곳으로 함흥만의 검푸른 바다위에 떠있는 화도와 형제암을 볼 수 있는 곳인 데, 붉은 진흙땅에 청송이 우거진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이런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때문인지 적색, 녹색, 청색 등 강열한 원색으로 그림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고, 또한 소박한 향토색, 자연에 순종하는 중후한 농민의 모습과 황우의 끈질긴 인내력 등 우리겨레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신을 작품화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일요일, 평일, 축제일 등의 구별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수한 이론이 있더라도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자발적인 실천력과 탁월한 창작능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특히 예술에 있어서는 개인의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고 본다.

- 서양화가 이 수 억, 1984


독특하게 조형한 풍토미학(風土美學)

색채의 문제는황색과 갈색,  그러고 한국의 흙을 상징하는 빛깔을 주로하면서 독특한 풍토적인 빛깔을 나타내는 색감의 세계이다.  표현의 문제는 약간 무딘 것 같은 필치로써 대상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경우 지적인 세련이나 감정적언 풍정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관을 나타내는 중용의 미학이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어리숙한 형태미와 우직한 감각을 머금고 있는 표현의 세계는 그야말로 한국적인 풍토의식이 조형세계에 들어와서 양식화한 결과이다. 

- 이 경 성 (국립현대미술관장), 1979


한국미술의 <보편적 상수(普遍的 常數)〉  

이수억의 예술발상의 기조는〈나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이다.  어떤 관념모형 예술론이라던가. 상념의 단층으로서의 예술지식하고는 일차적으로 무관하다는 보고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의 삶의 형식이며, 이러한 분업의 덕분으로 한국미술사회가 실체적인 전체로서 떠오르게 된다. 

그는 미술을 통한 사회적 성공의 무정한 집념이라던가 정치적 관철로서의 현실권리하고는 무관하며, 그의 말처럼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정신력을 통해 자신과 사회, 그리고 세계를 측정해왔다.

- 유 준 상 (서울시립미술관장), 1989




前線夜曲 (Battle Front at Night) 72.7x60.6 (20F),) 1952 [대백갤러리]



이수억 탄생100주년 기념전
이수억 예술, 다시 보기

윤범모 (미술평론가, 동국대 석좌교수)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격동의 시대였다. 전반부는 식민지 시대였고 후반부는 분단 시대였다. 이렇게 양분된 한복판에 전쟁이라는 커다란 상처가 있다. 근래 남북 화해 분위기로 바뀌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미술의 경우, 20세기는 조선왕조의 ‘서화’ 시대에서 ‘미술’의 시대로 바뀌는 대전환을 보였다. 정치 사회 등 급변 상황은 한반도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어떻게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했는가. 아니, 화가는 어떻게 급변의 현실을 화폭에 담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답답한 심정을 지울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여 대부분의 화가들은 ‘현실 따로/그림 따로’, 이런 행각을 보였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은 물론 현실 직시조차 화면에 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단적인 예로 6.25전쟁의 참상을 화면에 담은 작품 숫자는 매우 귀한 편이다.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으면서도 화가들은 예술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현실과의 거리 두기, 그래서 이 땅에 리얼리즘 미술은 척박한 토양 속에서 머물러야 했다. 그런 결과 20세기 한반도 현실을 담은 작품은 매우 드물었다.

이수억이라는 화가를 기억한다. 그는 특이하게도 6.25전쟁의 현장을 화면에 적극적으로 담았다. 그래서 한결 돋보이는 부분을 지니고 있다. 남아 있는 1950년대 유화 작품의 숫자도 적은데, 이수억의 전쟁 소재 작품은 각별한 빛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미술의 흐름을 웬만큼 이해하고 있는 애호가라면, 최소한 작가 이름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피난 시절 ‘고난의 행군’ 현장을 담은 작품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피난 생활 그리고 폐허의 도시, 전쟁이 할퀴고 간 현장. 이수억은 이런 현장을 캔버스에 충실히 담았다. 작가적으로 빛나는 부분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여타의 화가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돋보인다는 의미이다.

이수억의 50년대 관련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다. <전선야곡>(1952)은 화면 분할의 독특한 구성으로 군인들과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전선과 후방의 삶을 현실의식 아래 표현했다. <폐허의 서울>(1952)은 도심의 무너진 빌딩 잔해를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전쟁의 상흔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구두닦이 소년>(1953)은 폐허의 도시를 배경으로 어린 소년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구두통을 메고 서 있는 모습이 시대상황을 직설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구두닦이 소년을 통한 전후 사회의 증거, 이는 작가적 치열한 현실인식의 결과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6.25동란>(1954)을 볼 수 있다. 수레에 피난 짐을 싣고 길 떠나는 가족을 표현한 작품이다. 원색적 색채로 화면을 구성하고 인물표현은 윤곽선 위주로 대담하게 표현했다. 피난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재구성해 전쟁의 참상을 증거 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전쟁 관련 작품만 가지고도 우리는 이수억이라는 화가의 존재감을 높게 평가할 수 있다. 



6.25動亂 (The Korean War) 162×97 (100M), 1954 [가나아트센터]


이수억은 1918년 함남에서 출생했다. 그는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20세(1937)에 평양사범학교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1939년 도쿄 제국미술학교(현재 무사시노)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화업을 닦기 시작했다. 동급생으로 송혜수, 장욱진, 임완규, 김종하, 이유태 등이 있고, 이들은 1943년 전쟁으로 단축 졸업을 했다. 제국미술학교는 조선인 유학생이 상당수 재학했던 미술학교였다. 학교 분규로 캠퍼스가 양분되는 과정에서 우리 유학생들의 입지가 도드라지기도 했다. 1946년 이수억은 어렵게 귀국하여 장충동 피난민수용소에 입소했다. 이어 고향 함흥에 도착하여 미술동맹 서기장으로 피선되는가 하면, 1947년 함흥미술연구소에서 연구생을 지도하기도 했다. 당시 문하에는 권진규, 필주광, 김태 등이 있었다.

이수억은 1950년 전쟁과 함께 군속으로 입대했다. 그는 1951년 1.4후퇴 당시 포항을 거쳐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미군 헌병사령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뒤에 미군을 따라 귀경했다. 더불어 그는 국방부 종군화가단원으로 일선을 취재했다. 그 무렵 가깝게 지낸 화가는 송혜수, 변영원, 박수근 등이었다. 그는 1952년 서울의 미군 PX(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미군 상대 초상화 일은 박수근의 사례로 잘 알려진 내용이다. 물론 이수억은 박수근과 친교하면서 전쟁의 폐허에서 재기를 도모했다. 폐허에서 피어난 예술이라는 꽃, 화려할 수 없었지만 진정성이 있었다. 이수억은 1953년 결혼 이후 광릉 미 하사관학교의 PX에서 초상화 가게를 열었다. 호구지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창작열을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종군화가단 전시에 <야전도(夜戰圖)> 대작을 출품하여 참모총장상을 수상했다. 야전, 역시 전쟁의 현장을 화폭에 담은 현실의식의 발로였다. 더불어 국전에 <6.25 피난도> 등을 출품하면서 작가활동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수억의 족적은 전쟁을 온몸으로 치열하게 겪었음을 알게 한다. 더불어 치열한 현장을 화면에 담으면서 시대를 증거하려 했던 작가정신도 읽게 한다. 이와 같은 작가정신의 뒤에 부친과 두 동생이 공산당에게 총살당한 아픔도 작용했을 것이다.
 
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어 갈 때, 이수억은 강원도에서 거주하며 풍경화에 몰입하기도 했다. 더불어 등산을 즐기면서 자연의 섭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 결과의 하나로 1961년 설악산 주제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수억은 70대의 노경으로 풍경과 인물을 집중 제작하면서 1980년대를 통과했다. 사실적 표현형식은 대상을 편하게 화면에 담는 특징이었다.



家族圖 (A Picture of a Family) 145.5×112 (80F), 1957 [국립현대미술관]


이경성은  <이수억의 예술>[이수억화집](1988)이라는 글에서 이수억을 이렇게 평가했다. 즉 화풍상의 특징을 주제, 색감, 표현의 문제로 구분하여 정리했다. 즉 주제는 한국적 이미지이다. 그래서 농촌 풍경을 주로 하여 황소가 있고, 마을 입구의 고목 아래 어린이들이 놀고 있다. 이는 전원적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색감은 한국의 흙을 상징하는 빛깔 즉 황색과 갈색을 주로 사용했다. 이는 풍토적 빛깔을 의미한다. 표현의 문제는 무딘 것 같은 필치로 대상의 진실을 표현한 바, 이는 지적 세련이기보다 중용의 미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이경성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어리숙한 형태미와 우직한 감각을 머금고 있는 표현의 세계는 그야말로 한국적인 풍토의식이 조형세계에 들어와서 양식화한 결과이다.”
“이수억이 작품세계에서 추구하는 형태와 색채의 세계도 결국은 가장 농경적인 문화원천을 조형적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흥미로운 지적이다. 한국적 풍토의식 그리고 농경적 문화원천, 이는 이수억 예술의 원형에 가깝다. 1950년대 후반 화면의 작품은 화면 분할 등 실험적 요소도 보인다. 예컨대 <소>(1954)의 경우, 원형 구도 바탕에 황소가족을 화면 가득 표현했다. 당시 화단 풍토로 보았을 때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모자상(母子像)>(1955) 역시 화면 분할의 직선과 모자의 모습을 안정감 있게 삼각형 구도로 설정한 작품이다.

이수억의 작품 세계는 여체를 비롯한 인물화, 서울 등 도시풍경 그리고 지방 풍경 등 다양한 풍경화를 남겼다. 이는 국토 순례에 따른 조국 예찬이기도 하다. 조국은 화가로 하여금 전통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 이수억은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작업을 다수 남겼다. 사찰의 불상 등 전통적 공간의 묘사는 이런 의지의 산물이다.

이수억의 예술은 선이 굵은 화면구성과 화려한 색채 그리고 다양한 소재로 일군 구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전쟁시기의 현실인식은 다수의 전쟁 소재 작품을 낳게 했고, 이어 전후 복구기 이후의 작품은 조국의 산하를 답사하면서 다수의 풍경화를 남겼다. 물론 인물화에도 관심을 잃지 않아 이 땅의 ‘주인’들을 화면에 담았다. 이수억은 20세기 한국 화단을 지킨 채색의 구상화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 이수억 탄생100주년 기념전시 평론





작가 약력


이 수 억 (李壽億) Lee, Soo Auck


1918년  함경남도 함주군 선덕면 출생
1937년  평양사범 졸업 후 북청군 양가공립보통학교 부임 
1942년  동경 제국미술학교 (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졸업
1943년  일본동경  창원회전 출품
1946년  일본동경  제일미술협회전 출품
1951년  제1회 종군화가단전출품 참모총장상 수상
1955년  동남아순회전 초대출품
1962년  강원문화상 수상
1963년  강원산악회 회장
1965년  60년전, 100인전 초대출품
1970년  목우회 이사
1972년  일본동경 삼본화랑 초대개인전
1975년  국전 초대작가
1975-77년   상명여자사범대학 강사
1976년  서양화대전 초대출품
1977년  일본 천화랑 초대개인전
1978년  도불, 미술계시찰, 구미각국 스케치여행
1978-79년   강원대학 미술교육과 강사
1979년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l00인선(Vol.94) 이수억편 발행(금성출판사)
1980년  국전 심사위원, 50년전 초대. 현대사생회 초대 회장
1981년  한국미술 ’81전 초대
1982년  한국의 자연전 초대
1983년  국전 출신작가전 출품
1984년  현대미술초대전 출품
1985년  인도및 동남아각국 불교성지여행, 현대사생회 회장
1986년  불교성지순례전(경인미술관)
1987년  목우회 및 현대사생회 고문
1988년  이수억 고희전 및 화집 발행
1990년  한국미술기획대전- 이수억 초대전 및 화집 (Vol.1)발행(FAPA, KBS)
1990년  72세  작고(한남공원묘원 안장)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