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전시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전시상세정보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권오봉 기획초대전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 관련행사
  • 전시뷰어


 ■ 권오봉 초대전 Kwon, O Bong
 • 개관전 : 권오봉 초대전 Kwon, O Bong
 • 오프닝 : 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오후 17시 
 • 작  품 : 평면회화 총 34점
 • 관람료 : 무료
 • 관람시간 : 상시 개방

 대구보건대학교(총장 남성희)  인당뮤지엄에서는 권오봉 기획초대전 ‘Kwon, O Bong’를 개최합니다. 

  감정의 기억들이 모여 순간적 에너지로 표현되는 권오봉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닌 무의식을 통해 움직여지는 흔적들이다. 어린아이의 낙서와 같기도 하고 춤을 춘 듯 휘갈려 놓은 모습들로 표현되는 작품들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내 그림은 담벼락의 낙서에서 비롯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미술비평가인 고충환 평론가는 권오봉의 작품을 낙서회화라 말한다. 항상 주변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풍경들을 화폭으로 담아내 예술이 멀리 있지 않고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예술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듯하다. 

  이번 전시는 청년작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선별된 작품과 신작들을 선보일 에정이다. 5개 전시실로 꾸며진 이번 전시회는 권오봉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이해하는 장으로 예술을 감상하는 새로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권오봉의 회화 

자의식 없이 어떻게 그림을 그릴 것인가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내 그림은 담벼락의 낙서에서 비롯되었다, 는 작가의 말처럼 작가의 그림은 낙서 같다. 낙서가 회화의 격(아니면 꼴)을 갖추었으니 낙서회화다. 낙서회화지만 장 미셀 바스키아나 키스 헤링(그리고 어쩌면 잭슨 폴록) 같은 자의식이 없다. 자의식이 영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자의식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사이 톰블리에 가깝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자의식이 없는(혹은 없이 그린) 낙서회화다. 자의식이 없는? 그림은 자의식이 그리는 것이 아닌가. 자의식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자의식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자기가 아니라면 무엇이(혹은 누가)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그렇다면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는 유령인가. 작가의 유령이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작가의 유령이란, 더욱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유령이란 무슨 의미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걸 유령이라고 했다(그리고 플라톤은 영혼이라고 했고). 

Untitled, 162×130cm, Acrylic on canvas, 2003


중세 기독교 성화에 보면 더러 화가 대신 천사가 그림을 그려주는 경우가 있었다. 천사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손을 인도하는 것이다. 더 멀리 소급해보면 영감과 직관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인격신이 화가의 몸을 빌려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여기서 인격신으로 화한 영감과 직관은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옛날그림에서는 흔한 일이다). 천사가 화가 대신 그림을 그려준다? 인격신이 화가 대신 그림을 그려준다? 그럼 화가는 뭔가. 여기서 화가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상태에 놓인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림이 그려지는 상태에 놓인다. 자발성(아니면 즉발성)과 자동성, 우연성과 즉흥성, 그리고 좀 의심스런 경우로는 관성(몸의 습성? 회화적 관습을 기억하고 있는 몸의 기억?)이 그림을 그리는 상태에 놓인다. 이 가운데 특히 즉흥성이 자기회화의 동력인 경우가 많다고 작가는 말한다. 다른 계기들도 그 의미는 대동소이한 것이지만, 여하튼. 
다시, 작가의 그림은 자의식이 없이(혹은 없는 상태에서) 그린 낙서회화라고 했다. 어른이라고 해서 낙서를 영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낙서는 어린아이의 일(놀이)이다. 어린아이일수록 그 만큼 더 자의식이 없는 낙서에 가까워진다. 단순한 끄적거림에 가까워지고, 그림보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그림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외적으로 보기에 그저 우연하고 무분별한, 무심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추상에 가까워진다. 참고할 만한 재현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미처 그린다는 의식도 없이 종이에 뭔가를 끊임없이 끄적거리는 행위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때 행위는 사실상 반무의식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정작 자기가 뭘 그리고 있는지 혹은 뭘 쓰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거의 관성이 그리거나 쓰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런가하면 이런 자의식 없이 그리기는 분청(사기)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태토에 백토를 되는대로 칠한 연후에 백토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꼬챙이 같은 걸로 그어 태토의 일부가 표면 위로 드러나 보이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당연히 정색을 하고 그린 경우보다는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는, 무심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경우에 해당한다. 지금은 오히려 정색을 하고 그린 경우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회화와 생활미술을 비롯한 일체 전통장르 중 가장 높은 회화적 가치를 성취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Untitled, 291×218cm, Acrylic on canvas, 1998


지금 시각에서 보면 그건 그대로 영락없는 그림이다. 그것도 뛰어난 그림이다. 흔히 그 그림이 이른 경지는 무기교의 기교, 기교를 넘어선 기교, 그리고 특히 무위라는 말로서 형용된다. 얼핏 어눌해 보이고 어리숙해 보이는 선묘가 자연의 본성에 부합한다는 말이고, 이로써 그 자체로 자연에 도달한 성취를 인정한 말일 것이다. 무위자연이라는 말도 있지만, 행위로서의 무위가 현상으로서의 자연(그리고 자연의 경지)과 통한다. 그러므로 어떤 그림이 자연을 성취하고 있다는 말은 최상의 평가로 봐도 되겠다. 무위가, 무기교가 자연, 그러므로 최상의 회화적 가치를 성취하고 있다? 이율배반이고 모순이다. (인)위가 없고 기교가 없으면 그림도 없을 것이므로. 다시, 그러므로 그림이란, 그림 그리기란 매번 이율배반과 대면하는 일이고, 이율배반을 매개로 모순을 돌파하는 일이다. 모순으로 하여금 이치가 통하게 하고 순리가 되게 하는 일이다. 

흥미롭게도 작가의 그림이 이런 분청의 과정이며 생리, 경지며 차원을 보여준다. 영 색채를 안 쓰는 건 아니지만, 대개 작가의 그림은 흑과 백의 무채색 계열 안쪽에서 이루어진다. 대개는 먼저 바탕화면에 검은 색을 칠하고, 그 위를 흰색으로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페인팅을 하고 드로잉을 한다. 주로 밀대걸레로 페인팅을 하고, 쇠갈퀴며 나무 꼬챙이로 드로잉을 한다. 밀대걸레로 페인팅을 하는 것은 붓의 관성을 피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드로잉을 할 때 쇠갈퀴며 나무 꼬챙이를 쓴다고는 했지만, 사실상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렇게 그림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 다시, 작가는 즉흥성이 동력이라고 했다. 생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감으로 그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 감마저도 놓아버린 상태에서 그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을 놓아버릴 수는 있어도, 감을 온전히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감에는 생각이 알고 있는 감(생각감? 의식감?)이 있고, 생각이 미처 모르는 감(몸감?)이 있다. 생각은 모르지만, 몸이 알고 있는 감이 있다. 얼핏 어눌해 보이고 어리숙해 보이는 선묘가 자연의 본성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 몸감이고, 여하한 경우에도 감각적 쾌감(아니면 회화적 완성도를 높여주는 다른 결정적인 무엇이어도 무방한)을 자아내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 그 증거다. 작가는 말하자면 감각적 쾌감이 정점에 도달하는(그러므로 회화가 완성되는) 지점을 몸으로 이미 알고 있다(체득된? 체화된?). 그런 만큼 자기를 수동적인 상태에 내맡겨도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알아서 가주는, 가닿는 차원에 이르렀다. 
개념미술이라면 생각만 잡으면 되고, 생각만 놓아 버리면 된다(아마도 그러면 개념미술 자체가 성립되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은 몸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잡을 수는 있으나, 몸(그러므로 감)을 온전히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작가가 이룬 성취라면 성취랄 수 있고, 그림을 그리는 한 결코 빠져나올 수는 없는 딜레마, 어쩜 기꺼운 딜레마, 자발적인 딜레마, 마약 같은 딜레마일 수 있다(어떤 화가들은 이런 경지의 그림을 그릴 수 있기 위해 실제로 일부러 마약을 하기도 한다).

Untitled, 291×218cm, Acrylic on canvas, 1999

 
그리고 다시 분청에서의 태토로 되돌아가 보자. 작가의 그림에서 태토에 해당하는 것이 바탕으로 칠한 검정색 화면이다. 비록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흰색 위주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검정색 화면이 분출한 그림이고, 수면 위로 밀어올린 그림이다. 그러므로 어쩜 검정색 화면이야말로 작가의 그림의 원형이고 모태다. 그건 원형이며 모태답게 흰색 화면 아래 숨어있다. 마치 분청에서 태토가 백토 아래 숨어있는 것처럼.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검정색 바탕화면을 먼저 칠해놓고 본다. 검정색 바탕화면에서 시작한다. 베이스란 말이다. 어쩜 검정색 화면에 검정색 그림을 그린, 그림과 프레임을 일치시킨 회화적 오브제를 매개로 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선언은 타블로그림의 종말을 선언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더니즘 회화의 종말을 선언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검정색 바탕화면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모더니즘 회화의 성취, 종말, 종언으로부터 시작한다. 모더니즘 회화와 작가의 그림 사이에 이중적인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한편으로 모더니즘 회화의 성취를 업으면서(계승), 다르게는 엎으면서(전복, 헤겔식으론 지양) 시작한다. 말레비치의 검정색 화면이 닫는 것이라면, 작가의 검정색 화면은 여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검정색 화면은 뭘 여는가. 그렇게 여는 검정색 화면이란 무슨 의미인가. 

메를로퐁티의 의식의 지향호 개념이 도움이 되겠다. 지각된 것이 의식으로 건너가기 전에 등록되는 등기소 같은 곳이다. 의식을 결정하기도 수정하기도 하는 의식의 원재료, 미처 의식화되기 이전의 선의식이 저장된 창고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그리고 의미)를 결정하기도 수정하기도 하는, 미처 언어화(그리고 의미화)되기 이전의 언어(그리고 의미)의 원재료가 저장된 언어의 지향호를, 그리고 의미의 지향호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작가의 바탕화면은 바로 이런 의식의, 언어의, 의미의 저장고에 해당한다. 의식이 될 의식, 언어가 될 언어, 의미가 될 의미들이 침묵 속에 봉인된 창고다. 그리고 여기에 거세된 언어(그러므로 욕망)와 미처 발화되지 못한 말들(자크 라캉), 무정형의 잉여들(조르주 바타이유), 우연하고 무분별한 리비도들(프로이트), 표상 없는 기호들(질 들뢰즈), 그리고 상처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론적(그리고 어쩌면 이보다는 실존적) 자궁이다. 

그것들은 미처 의미화를 얻지 못한, 아니면 의미화를 거세당한 탓에 매번 자기 발생적이고, 일회적이고, 사건적이다. 잠재의식 아니면 의식의 침전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그것들을 수면(화면) 위로 끄집어 올리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분출 밖에 없고 즉흥 밖에 없다. 작가의 검은 화면과 흰 그림은 이처럼 생각은 모르지만 몸은 아는 유령들을 그리고, 유령들의 흔적을 그린다(다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것을, 어쩜 비가시적인 실재를 유령이라고 했다). 때론 격렬하고, 때론 서정적이고, 때론 순진무구하고, 때론 시적이고, 때론 드라마틱하고, 때론 스펙터클한, 그리고 무심한 작가의 그림은 이런 종잡을 수 없는 유령들을 그린 탓이다. 누가 비가시적 실재를 가시적인 형태로, 그것도 결정적인 경우로 그릴 수가 있는가. 그리고 여기에 회화에 대한 의심과 회의와 무의미, 사로잡힘과 자발적인 중독, 내지르는, 주저하는, 머뭇거리는, 웅얼거리는 회화의 그리고 어쩌면 드로잉의 선무(선들의 춤)를 그린 것이다. 


Untitled, 162×130cm, Acrylic on canvas, 2000


작가는, 어떤 그림은 벌에 쏘여 머리가 빙빙 돌때 그린 그림도 있다고 했다. 벌에 쏘였을 때 미처 그림을 그릴 정신이 있을까 싶지만, 여하튼 그 진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림에 대한, 그림 그리기에 대한 작가의 평소 태도와 입장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중요하다. 어떤 그림이라고는 했지만, 어떤 그림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작가의 모든 그림에, 그림 그리기에 확대 적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작가는 정신이 없는 상태, 정신이 아득한 상태, 자기가 지워진 상태, 즉흥적인 상태, 자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 회화의 관성을 지우고 싶어서 회화를 그리는 것이지만, 몸이 이미 알고 있는 관성마저 지우지는 못한다. 몸이 알고 있다는 것은 자기를 수동적인 상태로 던져놓아도 그림이 된다는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려지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작가가 이룬 성취로 볼 수 있겠고, 그림을 그리는 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로 볼 수 있겠다. 자의식 없이(혹은 없는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과정에서 지불해야 할 몫으로 볼 수가 있겠다(그런데, 자의식 없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가능한 일일까?). 



Untitled, 130×162cm, Acrylic on canvas, 2018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