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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의 변주곡, 김동진의 서예추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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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획의 변주곡, 김동진의 서예추상 - 김동진展 』
Calligraphical Abstraction; A Brush-Stroke Variation 


()_한지위에 먹_190.0x122.0cm_2019



서예추상(書藝抽象)


서예의 미학은 수려하면서도 질박한 고졸미(古拙美)를 지선(至善)으로 삼는다. 문자 자체의 형상과 함께 문자와 문자 사이의 공간인 여백(餘白)의 조화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서예미학이 그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은 오랜 세월 동안의 험난한 임서(臨書)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서예 창작(創作)은 임서에서 얻은 작가의 필력과 미학, 철학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정신성을 표현하는 과정이다.  


김동진의 작업이 문자추상이나 추상동양화와  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40 성상(星霜)을 임서와 창작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마침내 그 문자와 문자조형의 굴레를 벗어나는 순간에도 김동진의 점과 획의 필치(筆致)는 그대로 살아남아 화면을 채우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근원이 되고 있다. 서예의 획에서 시작한 추상화이기 때문에 서예추상이라 부른다. 서예에서 시작하여 서예의 미학이 바탕이 되면서도 서체(書體)의 형상적인 특징이면서 또한 의미전달의 기능을 하는 기호로서의 문자를 해체함으로써 온전한 추상회화의 영역으로 진입하였다.  


심수일치(心手一致). 심상(心象)이 몸과 하나가 되어 화면에 동력(동력, energy)을 보태면서도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나가고 머무르며 돌아드는 서예 작업의 율동(律動)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로지 먹물이 붓을 통해 종이와 만나는 그 순간에 집중하며 작가 내면의 심상이 움직이는 대로 붓과 손, 팔과 몸통, 그리고 화선지 위를 오가는 그의 두 발마저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이 움직여나간다. 그렇게 한바탕 동력 발산의 순간들이 화폭에 진한 감동을 남기고, 우리는 화면을 바라보며 그 떨림을 공감한다.  


때로는 부딪히며 튀기고, 때로는 뿌리며, 열정적으로 종이와의 만남을 시작한다. 그으며 나아가다가는 지그시 누르고, 다시 돌아 나와 물러서다가는 또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획은 내달리다가는 멈추고, 꺾어 돌려 다시 내달린다. 그러다가 조용히 멈추면 뚝뚝 떨어지는 먹물. 텅 빈 공간을 한 달음에 달려 내리고, 다시 올라가 좌우로 허허실실 펼쳐가는 모습은 마치 장수가 광야에서 말을 달리는 듯하고, 무용가가 넘실넘실 춤을 추는 듯하다. 


점과 획은 자형(字形)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므로, 더 이상 그 모양의 귀추(貴醜)를 따지지 않는다. 형상과 개념을 떠나서 모든 존재의 원형을 좇는, 흑암과도 같은 검정의 현색(玄色)만이 태허의 공간에서 유영(遊泳)하고 있다. 천지 창조의 순간은 이런 획이 빚어내는 동력, 바로 이런 움직임으로 시작된 것은 아닐까? 태허와 흑암이 교차하면서 잉태한 창조적 율동, 이것이 바로 김동진이 써내려가는 서예획의 변주곡(變奏曲)이다. 


서예의 필력에 응축된 힘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획의 대폭발(大爆發)은 김동진의 창조적 동력이 되어 예측 불허의 새로운 형상들을 만들어낸다. 구도자처럼 사람과 만물의 근원적인 동세의 활력을 탐구하는 새로운 회화의 문을 연 것이다. 서예의 획으로부터 출발하여 마침내 서예의 굴레, 문자조형의 미학이라는 틀을 온전히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서예가 김동진의 첫 추상회화 전시회는 서예추상(書藝抽象) 탄생의 서막을 알리는 장이 될 것이다.  


-갤러리 더키움 관장 금주섭(의학박사)



()_한지위에 먹_190.0x122.0cm_2019



()_한지위에 먹_190.0x122.0cm_2019




得魚忘筌_遊로의 일탈


得魚忘筌득어망전,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은 잊으라.
목적을 이루었으면 수단에 대해서는 더 연연할 까닭이 없다는 장자의 훈계다. 


서예는 문자를 통발로 삼아 조업을 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이 통발을 이용해 무엇을 낚으려는 것일까? 일괄하면 문자의 조형성과 이에 기인한 기록가치의 미학적 극대화라고 정리하고 싶다. 이것은 서예가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중요한 고유성이다. 또한 유사 이래 누적된 인문학 결정들의 가장 직접적인 전달방식이자 일회성의 畫획으로 집약되는 정신성의 기초였다. 


감성이 주요 기조를 이루는 예술계에서 서예는 특이하게도 대단히 이성적인 장르에 해당된다. 필법, 장법, 서법, 서도, 법고창신 등 서예를 대변하는 이러한 용어들만 살펴보아도 서예가 얼마나 견고한 이성의 틀을 구축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자를 텍스트로 하는 까닭에 ‘可讀性가독성’, 곧 읽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전제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성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양상을 띠기 마련이다. 때문에 이것은 서예가 자존적으로 지켜온 특별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서예라는 장르를 상당부분 무미하고 건조하게 정체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감성이라는 것은 같은 대상을 두고도 대단히 복합적이고, 심지어는 예측불허의 의외성까지도 촉발될 수 있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상당히 오래전부터 지나치게 이성에 의지하는 기조에 적지 않은 회의를 느끼는 동시에 서예가 현대의 시대상황과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측면에서는 이러한 감성적 가치의 회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소 자의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고기를 얻은 후 통발을 잊어야 하는 까닭 중에는 시간이 흐르고 시대조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한 그 잡은 고기가 다시 새로운 조업을 위한 통발로 역할 되어야 한다는 과제도 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소견을 근간으로 그간에 누적된 역량을 기왕의 질서로부터의 일탈로 풀어내고자 한다. 이 또한 진부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일탈이 아니면 좀처럼 수십 년 해묵은 습속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글씨쟁이 40년이면 나름 글씨맛을 어느 정도는 체득한 것이 아니겠냐는 오만을 스스로 부추기며 이성적 경계에 균열을 주고, 氣와 심성의 흐름에 충실한 감성으로의 遊泳유영을 꿈꾸며 문자의 구조적 결계를 해체하고 가독성을 지운다. 옛사람들이 남긴 인문학적 성과들이 아무리 주옥같을지라도 지금은 오히려 내가 생겨 먹은 그대로를 퍼질러 내는 것에 더 구미가 당긴다. 한 마디로 遊_한 번 놀아보자는 오기적 발상으로만 이해해 주면 그만이다. 이런 통발을 가지고 어떤 고기를 낚을 것인가는 아직은 모른다. 어쩌면 고기를 낚는다기보다는 또 다른 통발을 획책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2019.

김동진 작가노트



無盡藏(무진장)_한지에 먹_61.0x90.0cm_2019



()_한지위에 먹_82.0x53.0cm_2019



()_한지위에 먹_91.0x63.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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