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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19: 조각, 피부에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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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19
International Sculpture Festa 2019 in Seoul
조각-피부에 살기 Sculpture - Live on the skin 

2019. 10. 26(토) ~ 2019. 11. 3(일)
Opening 2019. 10. 26(토) pm 5

서울 서초구 서초동 700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T.02-580-1300
1, 2, 3층 전관 및 야외광장

국제조각페스타 사무국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 40 B1 | T.02-720-9101 
kosaspace@hanmail.net | www.sculpturefesta.com

대회장 : 김정희 | 운영위원장 : 이성옥 | 전시감독 : 박영택
자문위원 : 김영원, 한진섭, 박헌열 김희경, 신한철, 이수홍, 양태근, 유재흥
운영위원 : 권치규, 김영란, 도태근, 안병철 | 사무국장 : 이후창 | 큐레이터 : 최지원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19>은 사단법인 한국조각가협회 (이사장 김정희)가 주최하고 국제조각페스타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국내 최대 조각 전시이다. 그동안 조각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화두로 '세상을 조각하라'(2011년)(Sculpture the world), '조각은 재미있다'(2012년)(Sculpture is Fun), '조각! 꿈꾸게 하다'(2013년)(Sculpture! Make you dream), '생각을 조각하다'(2014년)(Sculpture! Your Thinking), '조각을 음미하라'(2015년)(Enjoy the Sculpture), '조각 감성을 깨우다'(2016년)(Sculpture, awakes your feelings)', '조각, 꿈의 스펙트럼'(2017년)(Sculpture, the Spectrum of dream), '조각, 세상을 이야기하다'(2018) (Sculpture, says the world)의 주제들로 전시를 펼쳐왔다. 올해 2019년의 주제는 '조각-피부에 살기(Sculpture - Live on the skin)' 이다. 

서울조각페스타는 해마다 주제를 정하여 작가를 공모하고 심사를 거쳐 선발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작가들의 창작 의욕과 의지를 북돋워 전시의 품격을 꾸준히 높이고 있다. 조각을 특화하여 전문적으로 기획함으로서 여타 다른 전시와는 뚜렷한 차별화를 두고 있다. 올해로 9회를 거치면서 대중에게 조각 작품의 미적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으며, 우리의 삶과 가까이에 조각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서울국제조각페스타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2,3층 전관 및 야외광장에서 국내외 150여명의 조각가가 참여하는 전시이다. 실내에서는 조각가 약 90여명의 개인전이 펼쳐지며, 특별전으로 한국원로조각가를 모시는 한국현대조각의 태동전, 해외 현대조각특별전, 중국 현대조각특별전, 기업부스전 등으로 전시가 구성된다. 

야외광장에서는 국제조각심포지엄인 아리랑어워드에는 국내외 조각가 4인이 참여하여 지난 한 달간 조각심포지엄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을 전시하고, 그 외 야외조각전 참여 작가의 다양한 대형 조각 작품 15점이 전시되어 관람객과 만난다. 

미술은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관람객들에게 친밀하게 다가서는 서울국제조각페스타는 조각 작품이 우리의 일상과 함께 가까이 있다는 점을 일깨우고, 조각이 전하는 삶의 행복과 풍요로움을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번 제9회 서울국제조각페스타에서 많은 관람객들이 올해의 주제인 '조각-피부에 살기'에 걸맞게 조각 작품을 통해 더 새로운 세상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조각- 피부에서 살기’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전통적으로 조각은 물질의 표면 위에 외부세계의 이미지를 얹혀 놓는 일이었다. 물질이 실제 세계가 되고자 욕망했던 것이다. 서구전통조각의 세계가 특히 그렇다. 물질의 피부위에 세계의 이미지가 스며들고자 하는 일은 조각이 회화가 되는 일이다. 회화는 2차원이라는 특성상 시각세계의 환영을 통해 주제를 서술하기에 적합한 조건인데 반해 조각은 3차원이라는 존재 조건으로 인해 자존적 물질로 지각되는 측면을 배체하기 어렵고, 따라서 환영을 통한 이야기 전개 면에서 회화보다는 효과적이지 못한 장르였다. 그래서 과거 전통적인 조각가들은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조각을 부조, 즉 그림처럼 이용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이미지를 제공하고자 했다. 반면 서구의 전통적인 회화는 주어진 평면의 캔버스가 세계 자체가 되고자 했기에 원근과 명암법 등을 동원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회화가 조각이 되는 길이었다. 회화는 조각이 되고 조각은 회화가 되고자 하는 역설이 서구전통적인 미술의 역사가 아닐까? 반면 이러한 역사를 극복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에 와서 회화는 회화 자체의 길을 모색하고 조각은 또 조각대로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했는데 이는 알다시피 공히 두 장르 모두 입방체로 귀결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니멀리즘에 와서는 회화와 조각이 궁극적으로 통합되는 한편 그 모두가 상실되는 상황을 초래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회화와 조각을 결합, 서로의 특성을 합한 저드의 작품은 전통적인 조각과는 너무도 다른 ‘특수한 물체’를 제작했다. 회화의 평면성도 확보하면서, 물체로 대변되는 3차원적인 조각적 요소도 같이 수용 하는‘그것’은 물리적 대상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지각과 충돌할 때 나타나는 지각적 경험을 우선하는 한편 우리가 전통적으로 조각예술의 의미내용으로 해독할 수 있었던 요소들을 극단적으로 최소화시키면서 오직 우리의 눈앞에 드러난 물리적 대상 자체의 전면적인 가시성만을 강조하는‘최소한의 예술’로 존재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회화나 조각이 소멸되는 지점일 것이다.

오늘날 조각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조각은 또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근자에 우리 미술계에서 조각의 초상은 다소 초라하고 궁핍해 보인다. 미술시장의 보수성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최근 시장은 철저하게 회화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다. 비엔날레나 각종 기획전에서는 조각 혹은 조각적인 것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이를 대신해  탈장르화 된 다양한 양상들이 적극 연출되고 있는 편이다. 그것은 이미 기존의 조각적 개념을 훌쩍 넘어선 것들이다. 그러니 조각은 여러 측면에서 위기를 노출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조각을 죽었다고 선언하기도 어렵고 죽을 수도 없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공공조형물의 의무화가 역설적으로 이곳에서의 조각 작업의 극심한 부진을 초래했다고 보며 나아가 이른바 포스트 팝 오브제 제작에 따라, 그러니까 제프 쿤스나 무라카미 다케시 등의 작업(전통적인 수공 기법과 몰개성적 제조를 결합한 작업), 그리고 동시대의 대중문화의 강력한 영향으로 인해 이제 조각은 영화소품이나 팬시 한 인형, 인테리어소품 같은 것들을 공들여 만드는 일로 바뀌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여전히 (오랫동안 조각의 소재가 되었던)인간의 몸과 자연을 모방하거나 이를 변형시키는 작업들 내지 조각을 이루는 물질의 물성과 질감을 강조하는 작업(모더니즘 조각의 흔적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작업들은 다소 진부해진 조각의 어법을 관습적으로 반복하고 있거나 조각이 디자인이나 공예가 되어가는 형국을 초래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물론 오늘날 젊은 조각가들은‘한쪽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현실에 있고, 다른 한쪽은 판타지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부유의 세상’에 속해있기에 그 영향권에서 결코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동시대 조각이 판타지 영화나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유사한 것들을 만들거나 낯설고 괴이한 유사 인형을 제작하는 일이 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조각의 조건이나 물질성, 또한 공간과의 관계, 조각과 회화와의 상관성 등을 질문하는 일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일, 조각의 가능성 등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조각이 아닐까? 현대미술이란 결국 미술의 개념을 질문하는 일이자 상식화되고 습관화된 기존 인식 틀을 부단히 지워나가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한국 조각, 특히 젊은 조각가들  상당수 작업이 보여주는 ‘포스트 팝 오브제’적인 작업들은 공예나 인테리어에 급격히 기울고 있으면서 물질의 피부, 조각의 피부가 죄다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이미지에 의해 압도되는 상황은 다소 우려스럽다. 일종의 레디메이드 이미지의 차용, 번안이 조각의 피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일까? 오늘날 조각의 물질성, 그 피부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미 있어왔던 세상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거나 물질의 피부 자체로 환원되는 길이 아니라면 또는 대중매체의 이미지에 압도되는 길이 아닌 어떤 길을 낼 수 있을까? 

조각은 애초에 인간의 몸을 대체한 불멸과 불사의 상징이었다. 말랑거리는 살을 대신해 단단한 돌이나 나무의 피부 위에 새겨진 몸들이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보는 이들의 눈앞에 자리했다. 공공의 장소에 기념비적으로 자리한 조각상들 역시 그 크기와 위용에 의해 특정한 권력과 이름의 무게를 강화하는 장치로 기능하기도 했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리적 크기와 질량감은 그 공간을 또 다른 공간과 의미의 장으로 파생시킨다. 오랫동안 조각은 커다란 규모와 중량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증거 했다. 기억을 저장하고 각인하는 한편 이데올로기를 후광처럼 드리운 기념비적 조각상들이 이제 다른 조형물로 대체되는 한편 전시장이란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조각의 크기와 부피는 불가피하게 조정되었다. 집단적인 기억과 추모,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던 조각이 그 임무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이제 회화와 함께 나란히 배열되고 걸리고 놓이는 선으로 조정되었던 것이다. 이후 전시공간에서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전이되는 한편 또 다른 영역으로 파급되는 조각의 생애가 가능해졌다. 그런가하면 동시대 조각은 무엇보다도 조각의 물량주의를 버리고 작고 가볍고 부드럽고 나아가 비물질적인 경지를 꿈꾸기도 한다. 작고 미세하다는 것은 자기 존재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묻히고 다른 사물들과 동일화되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그것은 시각에 독점되기보다 인간의 몸에 보다 근접하는 것이며 물질성보다 존재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에서 조각과 시각의 관계를 저울질하기도 한다. 

사실 조각은 회화의 조건 속에서 살고, 회화는 조각의 조건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니 조각은 개념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조각은 이 둘의 관계 속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사실 조각 이외의 모든 것이 다 조각의 조건이고 토대다.

분명 조각은 이미지이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물질이다. 따라서 조각을 이루는 그 재료의 물성이나 성질이 무엇이냐를 질문하는 것, 다양한 질감과 톤에 집중 하는 것이 또한 현대조각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조각이 무조건 매스 중심주의나 괴이한 물질의 과잉된 연출로 이루어지는 것은 문제다. 무엇을 의도하거나 새로운 형태를 만들기에 우선해서 물질 자체가 선험적으로 모든 것을 규정해버리는 듯한 양상은 위험해 보인다. 동시에 조각은 하나의 물질덩어리가 어떻게 인간의 신체에 반응하는가, 어떤 지각을 형성하는가를 고려한다. 조각은 3차원의 공간에 부정할 수 없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다. 회화가 2차원의 평면에 가상으로 형성된다면 조각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다. 동시에 그 물질은 주어진 공간을 점유하고 실세계로서 자존한다. 회화가 표면에서 존재한다면 조각은 공간에 서식한다. 조각은 물질로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조각은 3차원의 공간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다. 회화가 평면이란 공간에 서식한다면 조각은 공간에 존재한다. 실재하는 현실계에 실감나게 자리하고 있는 조각은 그래서 회화에 비해 그 리얼리티나 현존성이 강하고 크다. 아울러 시각에만 응대하기 보다는 촉각과 물리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육체성을 지녔다. 그것은 환영에 머물지 않고 몸의 총체적인 반응과 마주한다. 사람들은 조각 앞에서 돌아다닌다. 서성이고 맴돌고 가까이 가보고 뒤로 물러나고 슬쩍 만져 보기도 한다. 공간에 ‘사건’을 일으키고 그 주변으로 사람의 몸을 불러들이는 것이 바로 조각이고 조각의 물질성이다. 조각은 덩어리이자 표면을 거느리고 있고 관자의 몸을 참여시키고 그 감각 전체에 관여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다. 그 물질성/표면은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어 나갈 수 있을까?  

그러니 조각이 오로지 피부위에서만 벌어지는 사건으로 축소되는 동시대 조각의 한 양상은 상당히 불길하다. 그것은 위험해 보인다. 다만 이미지를 불러들이거나 물질의 피부 자체를 현시하는 차원이 아니라 모든 것이 만나는 지점, 모든 것의 경계면, 그 접촉면이 바로 조각의 피부여야 한다면 그 피부가 어떻게 생존할지를 고민해보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조각이 물질과 피부를 동시에 거느리고 있다면 이 둘의 관계, 그리고 조각이 조각 아닌 세계와 접촉하면서 겪는 다양한 상황이 표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부정을 통한 조각의 존재방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은 단순한 부정, 곧 조각이 아니라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조각, 따라서 조각을 보다 넓은 지평 위에서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조각의 틈새에 자리하고 있는 조각,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 있는 조각, 조각의 존재방식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로서의 조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새로운 형태의 조각은 회화나 조각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그 모두이기도 한 또 다른 종류의 조각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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