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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아트센터 기획, 이명복: 삶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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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아트센터 기획 
이명복 개인전
이명복-삶

기간 : 2020.3.4~3.20
장소 : 인사아트센터 1,2층
내용:  평면작품 22점



회화의 그늘과 생명의 자국들
- 이명복 미술세계의 미학적 ‘날풍경’에 대하여

김종길 | 미술평론가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 김훈, 『풍경과 상처』에서

우리가 갖고자 하는 시각은 이 시대의 노출된 현실이거나, 감춰진 진실이다.
-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 창립선언문

이명복의 회화는 붓칼로 새긴 역사화다. 회화의 주제는 머릿속을 울리는 추상같고, 표현은 과거와 현재, 역사와 현실, 시대와 삶의 세목들을 낱낱이 그린 세밀화였다. 그 세밀한 역사화의 장소는 한국이라는 모국의 국경을 넘어간 적이 없다. 
모국의 속살로 파고 들어가 그 안에 침윤된 역사의 그늘을 지금 여기의 현실에 비추어 그린 회화는 아프다. 그늘이 풍화된 자리에서 산하의 풍경이 피어올라 대지의 무늬가 된 현실은 슬프다. 그는 지층의 깊은 바닥을 살펴서 출렁이는 현실을 필사했다. 지층의 경계들이 서로 삼투되어서 일으키는 현실의 이미지는 불우했다. 불우(不遇)의 풍경이었다. 

그의 미술세계는 그 불우의 풍경을 보듬고 탄생했다. 상처는 속에 있고 풍경은 밖에 있으니, 안팎의 계면(界面)이 오래도록 마주보는 현실을 찾아다녔다. 그의 현실주의는 극사실주의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가 뒤섞였고, 역사가 깃든 대지의 몸이 생채기로 뒤틀린 자리에서 피어났다. 

40년 동안 새겨 온 회화의 깊이를 몇 마디 언어로 채굴하는 것은 벅찬 일이다. 김훈의 풍경론에 기대어 이명복 회화론의 뼈대를 추스르고 그것으로 미학의 한줄기를 찾아 나섰다. 그의 회화론은 깊은 ‘현실사유’에 있으나, 그 사유의 실체가 이 산하의 풍경이고 인물이니 ‘풍경과 상처’는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개념어였다.  


1. <백산>(1993), <회상>(1993), <침묵>(2014) ;  역사풍경의 미학적 얼개

1993년 그는 <백산(白山)>과 <회상>을 그렸다. 2010년 제주로 이주하고 4년 뒤 <침묵>을 그렸다. <백산>과 <침묵>의 풍경은 서로 달랐으나 구조는 동일했다. 이 구조의 동일성이 이명복 회화론의 촘촘한 그물코였다.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해발 47미터의 나지막한 산, 백산면에서 가장 높은 산, 동진강이 에둘러 흐르며 호남평야를 굽어보는 산, 마한의 토성과 삼국의 백산성이 있었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군이 첫 지휘소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했던 곳, 그는 세로 180센티미터 가로 260센티미터의 화폭에 그곳 백산을 새겼다. 한 손엔 죽창을, 다른 한 손은 주먹을 부르쥐고 몰려든 백성들로 인산(人山)을 이뤘던 농민군의 백산을,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權貴)를 모두 없앤다.”는 강령을 선포하고 ‘보국안민’이라 쓴 깃발을 든 채 진군이 시작되었던 백산을 통시(洞視)했다. 환히 꿰뚫어서 본 그 풍경은 ‘하늘-백산[山河]-땅 밑[地層]’의 위아래 세 얼개로 짜였다. 

<백산>이 풍기는 첫인상은 검붉다. 하늘은 온통 어두운 핏빛이어서 백산의 산등성이와 땅 밑까지 그 빛이 스며들었다. 어스름 핏빛하늘은 비현실이다. 비현실이어서 현실을 초월해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그것을 붉은 노을이라고 할지라도 백산의 하늘이니 그냥 하늘이 아니다. 비현실과 초현실이 지금 여기의 하늘로 휘몰아쳐 왔으니 토성과 백산성과 농민군의 함성이 거기 묻어 있을 터. 죽어서도 곡(哭)이 되지 못한 눈바람이 검붉게 몰아칠 기세다.

그 하늘 밑 백산은 지극한 현실이다. 서늘한 겨울풍경의 산등성이에서 역사의 흔적이나 그림자를 찾는 것은 부질없다. 그는 그 풍경을 극사실로 그렸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무덤 몇 개, 바람 한 점 놓칠세라 빠짐없이 새겨 넣었다.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관점조차 내려놓은 그의 붓은 오롯이 풍경에만 집중했다. 그래야만 풍경의 현존을 확인시킬 수 있을 터였다. 

땅 밑은 달랐다. 대지의 그림자 그늘이 짙게 깔려서 어둡고 음침했다. 화면의 하단을 이루는 땅 밑 풍경은 존재형상의 기립(起立)이다. 대지를, 마치 열주가 되어 받치고 선 앙상한 몸들이 나란하다. 언 듯 백산이 섬처럼 보였던 것은 짙은 그늘 때문이었으리라. 바로 그 그늘이 역사다. 역사라는 몸이요, 대지의 현신(現身)이다. 이렇게 세 얼개로 풍경을 보았기에 산하는 뚜렷한 자기 존재의 풍경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침묵>도 ‘하늘-산방산-땅 밑’의 구조다. 백산의 대들보가 동학의 역사라면 산방산의 대들보는 제주4․3의 역사다. 산방산 앞 무덤은 ‘일조백손지묘(一祖百孫之墓)’인데, 4․3의 주검들이 묻힌 그곳의 뼈는 한데 묻혀서 주인을 알아볼 수 없었다. 후손들은 주검의 전부를 한 조상(一祖)으로 모신다. 조상들의 흙투성이 몸이 산방산을 받치고 있다. <회상>은 흰옷 입은 농민군들이 “일어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던 설화를 너른 들녘과 죽창 하나로 상징화했다. 

역사는 산하(山河)에 깃든다. 깊게 깃들어서 풍경의 흰 그늘을 빚는다. 백산에 마한과 삼국과 동학의 역사가 오래 쌓이지 않았다면 그 산은 한낱 용계리의 작은 뒷산에 불과했을 터이다. 오래전부터 호남평야의 요충지였고 전쟁터였으며, 그 무엇보다 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혁명은 그곳을 성지로 뒤바꿨다. 한 산하가, 한 풍경이 성스러운 대지로 추앙되는 것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수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뭉쳐서 아픈 그늘이 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상처의 그늘이 살아올라 ‘날풍경’이 된 장소는 흰 그늘이다. 이명복의 많은 회화는 이처럼 날풍경의 흰 그늘이 새겨진 하나의 미학적 실체다. 



2. 1980년대 연작 <그날 이후> ; 우리 시대의 음각화

1982년부터 발표한 <그날 이후> 연작은 네거티브(negative)로 새긴 시대의 음각화다. 포지티브의 ‘있는 현실’을 네거티브의 ‘그림자 현실’로 뒤바꾼 회화는 남한사회의 부끄럽고 나약한 민낯으로 적나라하다. 그 민낯들을 그는 하나하나 세심하게 재구성해서 장면을 연출했는데, 하나의 장면은 하나의 주제로 엮어서 풀어야 하는 서사를 담았다. 그 서사는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도 영화도 아니어서, ‘화면’으로만 보고 읽어야 하는 이미지 언어였다. 

그는 그즈음 동료들과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를 창립했다. 그들의 창립선언문에는 “현실에 드러난 불확실한 과도적 상황을 솔직하게 형상화할 것”이라는 미학적 격문이 박혀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현실의 수용과 가치관의 성찰, 그리고 새로운 전통의 모색이 필연적이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는 ‘임술년’(1982)이란 시간성과 ‘구만팔천구백구십이’(우리나라의 총면적 수치)란 장소성, 그리고 ‘~에서’란 출발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즉 ‘지금, 여기서’라는 소박한 발언”이라고 적시했다. ‘임술년’의 작가들이 그렇듯 이명복 또한 이 선언문에서 미학적 창조성의 형식과 내용을 수혈 받았다.그가 <그날 이후>에서 형상화한 이미지 언어는, 출구를 상실한 서울 도시민의 그늘진 무표정, 부와 권력이 들러붙은 외제차, 미군과 양공주의 이태원 밤거리, 군복과 한복을 입은 남녀의 결혼선서, 검게 지운 얼굴과 성조기, 불타는 이태원에서 바주카포를 들고 나타난 람보, 해방이후 현대사의 장면을 몽타주로 표현하였다. 네거티브의 음영이 주를 이루지만 어떤 작품들은 그 음영에 채색을 가해 마치 포지티브(positive)인 것처럼 덧씌웠다. 양화(陽畵)와 음화(陰畫)를 섞어서 덧씌운 작품들은 그로테스크했고 그런 일그러진 이미지는 우리 현실이었다. 바로 그것이 생짜 민낯이었다. 그 민낯은 부조리했고, 탐욕이 넘쳤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다의적인 존재이고, 선과 악 사이에서 환원불가능하게 분열된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내재한 불행과 고통과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존재라면서 “너무나 단순한 진리, 기쁠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지만 우리가 존중하고 복종해야 할 진리는 ‘진정한 인간’이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 진정한 인간은 그 자신의 귀함과 천함, 위대함과 비참함, 행복과 고통, 정당함과 죄업, 요컨대 그 자신의 이 모든 양가성과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 한스 요나스(Hans Jonas/1903-1993)의 성찰은 옳았다.

이명복의 <그날 이후>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가 어떤 풍경 속에 처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시대는 마르크스의 ‘희망의 원리’든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든 그 무엇도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군부독재의 독점적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환락의 유토피아, 초강대국 미국의 군대가 주둔한 채 벌이는 성욕의 유토피아, 신자유주의 밀물이 쓰나미로 몰려 온 세계화 유토피아, 강대국 사이에서 권력의 암투장을 벌이는 카르텔 유토피아 따위의 비현실적 판타지만 가득했다. 그는 80년대 내내 해방 이후의 그런 ‘그날’의 풍경들을 붓칼로 새겨 넣었다.

      
3. <도살>(2001), <광란의 기억>(2018) ; 통시적 역사화의 샤먼리얼리즘

이명복 미술의 통합심리학적 그물코는 <광란의 기억>에서 우물신화의 우주론적 구조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이 회화는 좌/우, 위/아래, 근경/원경, 전경/후경의 구도를 염두에 두었다. <그날 이후>에 새긴 시대의 음각화에서, <침묵>에 드러난 역사풍경의 미학적 얼개까지를 하나의 화면에 구조화 한 이 작품은 4․3을 통시적으로 꿰뚫어 몽타주한 샤먼리얼리즘의 놀라운 증좌다.   

화면의 구성과 구조를 살펴보자. 색은 흑백이다. 현실의 그림자 그늘을 표현한 것일 터. 구성은 높이 솟은 한라산(아래)과 뻥 뚫린 구멍(위) 사이에 부둥켜안은 남녀가 있고(중앙), 벌거벗은 남녀를 에둘러 둥글게 4․3 관련자들이 배치된 형국이다. 원경은 용두암과 정방폭포다. 그 풍경에 동백꽃이 휘날린다. 장면의 실재는 다음과 같다. 큰넓궤(동굴/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위), 한라산 백록담(아래), 4․3 희생자(근경), 무장대(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좌․우,아래), 토벌대(제1공화국­육군­해병대­경찰­경비대­미군­미공군­서북청년단/좌․우,아래), 그리고 저 멀리 펼쳐진 제주풍경. 이 거대한 인물역사화는 동굴에 스크리닝한 무성영화의 장면들 같다.

화면의 위아래, 한라산 봉우리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큰넓궤 입구는 시공간의 음양구조가 서로 맞물려 크게 회통하는 것을 상징한다. 한라산과 큰넓궤는 신화/역사가 깃든 흰 그늘일 터인데, 그 사이가 그림자 속이면서 동굴이고 또한 지나간 현실풍경일 것이다. 동굴에 펼쳐놓은 4․3사건의 필모그래피는 4․3역사를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상영한다. 이 필모그래피는 4․3의 슬픈 배꼽이다. 4․3과 이어질 수밖에 없는 탯줄의 이미지들이므로.

샤먼리얼리즘은 후경(後景)을 파고들어 전경(前景)의 리얼리티를 해석하는 미학이다. <광란의 기억>은 <도살>과 <아라비안나이트>(2002)에서 이미 단편적으로 실험된 바 있는 후경의 장편서사다. 그림자 그늘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장면을 롱테이크로 편집했다. 쇼트의 하나하나 몽타주의 여러 장면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광란의 기억>은 탄생되었을 것이다. 

후경의 시간은 직선도, 회귀를 반복하는 나선형도 아니다. 하나의 후경에는 몇 개의 직선과 곡선과 나선형이 몽타주로 펼쳐질 수밖에 없다. 고구려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후경의 여러 장면들은 불일치하고 나날이 연속되지 않으며 사건들만 남아서 무질서의 파계를 이룬다. 후경의 표층부는 그렇게 역사화 되지 못한 풍경들로 들끓는다. 4․3도 아직 역사화 되지 못했다. 그러니 <광란의 기억> 또한 장면이 불일치하는 무질서의 파계일 것이고, 가라앉지 못하는 표층부의 언어일 것이다. 겉도는 유령들일 것이다. 화해­상생의 언약이 완성되었을 때 그것들은 후경의 심층부로 내려가 단단한 역사의 진실로 새겨질 것이다. 


해녀-옥순삼춘 장지에 아크릴 177x227cm, 2020


4. <봄>(2020), <옥순씨(옥순삼춘)>(2019), <해녀삼춘>(2020) ; ‘사람’이라는 극사실주의

이명복의 회화를 극사실주의로 분석하거나 사실정신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서출판 ‘각’에서 출간한 그의 화집 『Lee Myoung­Bok』(2013)의 전모를 살피면 그의 미술세계는 오히려 표현주의에 가깝고 초현실주의와 팝 아트 경향의 풍자화를 뒤섞고 있다. 

일상의 현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그려내지만, 주관을 극도로 배제한 채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는 극사실주의. 팝 아트와 달리 작가의 창조적 발화를 억제하고 아무런 코멘트조차 없이 현상 그대로만 그려야 하는 회화, 게다가 감정을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확대한 화면구성은 그의 미술세계가 아니다. 미국적 즉물주의가 낳은 극사실주의는 단색조에 기대었던 1970년대 말 청년작가들을 저항의 기제로 들뜨게 했으나, 역설적으로 그것은 주관적 극사실주의, 초현실적 극사실주의로 변형되어 유입되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한국사회를 ‘주관’없이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10․26(박정희 시해)–12․12(전두환 군부 쿠데타)–5․18(광주학살/광주민중항쟁)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고개 돌린 반대쪽은 초현실이었다.  

1978년 동아미술제는 ‘새로운 형상성’을 취지로 출범했다. 미술평론가 김윤수는 1981년 『계간미술』여름호에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구상」을 발표했다. 이 평론에서 그는 “구상화라는 말은 특수한 역사적 미술적 상황의 산물이다. 20세기라는 역사적 상황은 자연주의의 퇴장과 추상미술의 대두를 가져오는 한편 다시 추상미술에 대한 반발로써 구체적 형상의 미술이 나타나게 하였는데, 이 미술은 이미 지난날의 자연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글의 끝에 “현실은 구체적이다. 개인에 있어서나 사회적으로나 그것은 언제나 구체성을 띠고 나타난다. 구체성을 어떻게 파악하며 어떻게 관계하는가에 따라 현실은 드러나기도 하고 왜곡되거나 상실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이명복의 인물화는 미학의 얼개를 초석에 두되 사람의 구체적 형상을 묘파하는 방식으로 그려진 것이다. 회화적 형식이 극사실주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극사실적 실체에 주목했단 얘기다. 그가 이번 전시에 심혈을 기울인 인물화들은 한 삶의 생애가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표현한 것이다. 

<옥순씨(옥순삼춘)>, <해녀 옥순삼춘>을 보라! ‘머리카락 한 올 빠트리지 않고 다 그렸다’는 식의 묘사에 집중하지 말고 세월의 흔적으로 깊게 파인 주름과 눈빛을 보라. 저 환한 얼굴에서 되비치는 옴팡밭과 그 옴팡밭의 화산회토 흑색토 갈색 삼림토의 ‘뜬땅’, ‘된땅’의 색채는 또 어떤가. 옥순삼춘의 얼굴은 제주의 자연이 극사실로 불어넣은 생명의 자국들로 만발하다. 이명복은 그것을 그렸다. <해녀 삼촌>을 보라! 세로 227미터 가로 177센티미터의 저 거인의 얼굴을. 이명복은 회화의 사실성이 아니라 인물의 사실성에 압도하라고 말한다. ‘사람’이 곧 극사실주의라고 힘주어 주장한다. 그는 붓칼로 그런 사실성의 흔적들을 남김없이 새겼다.  


모정-춘화삼춘 장지에 아크릴 227x162cm 2020
 
5. <4월의 숲>(2020), <긴 겨울>(2018), <기다리며>(2015) ; 홑동백 꽃잎의 해방

해방 75주년, 6․25 70주년, 4․19 60주년, 5․18 40주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았다는 뜻. 식민지 암흑에서 벗어났다는 상징. 누군가는 광복을 반일민족운동의 사상적 개념으로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1919년 3.1운동에서 비롯한 시민주체의 국권회복으로 본다. 그런 맥락에서 광복은 독립운동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는 없을 터.  

광복은 해방이다. 독립운동과 국권회복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의 본래적 상태가 존재성을 획득한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속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광복이 국권에 더 상징성을 둔다면, 해방은 민권을 강조하는 것일 터.  

그런 광복과 해방의 의미가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방은 산 사람들의 자유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잡혀가고 끌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주검과, 살았으되 억울함이 풀리지 않은 사람들의 몫까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물론, 미군정기와 분단을 거치면서 야기한 고통의 트라우마 또한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광복과 해방은 75년 전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광복과 해방이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늘 광복을 외쳐야 하고 해방을 만끽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예비할 수 있으며 열강이 된 중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 ‘긴 겨울’을 뚫고 봄의 새 빛으로 찬란할 ‘4월의 숲’은 해방과 함께 올 것이다.

<기다리며>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비념(悲念)이라 할 것이다. 이명복은 2015년 봄, 동광리 일대의 4.3 유적지를 답사했다.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의 촬영지 큰넓궤 동굴이 그 근방 중산간에 있었다. 동굴로 피신해 살았던 사람들은 붙잡혀서 정방폭포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는 폭포를 여명이 오기 전의 보랏빛 풍경으로 그렸다. 오묘하고 신묘한 느낌이다. 그는 폭포의 실제 풍경에 덧대어 제목이 상징하는 ‘기다림’의 염원을 추가했다. 겸재 정선이 박연폭포에 음양조화의 이치를 폭포수 위아래의 검은 바위로 표현했듯이 그 또한 비념의 바위를 세우고 그 위에 한 소녀를 세웠다. 천천히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화면의 모든 구조가 이 소녀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모든 밤하늘과 폭포수와 보랏빛 풍경의 세목들이 소녀에게 쏟아져 내린다. 소녀의 비념은 큰 힘을 얻는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 홑동백 꽃잎들이 소녀의 마음일 터. 그 마음이 광복의 빛, 해방의 자유일 것이다.

“이 길을 감고 푸는 동안/ 내 몸에는 실오라기 한 올 남지 않았네/ 바늘귀에 바람의 귀를 꿰어/ 길게 박음질한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는 저녁/ 몸 바깥으로 향한 솔기부터/ 올을 풀기 시작하네”
- 조유리, 「누란 가는 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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