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전시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전시상세정보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계룡산 화가: 신현국 전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 관련행사
  • 전시뷰어


갤러리아트플라자 기획초대전
계룡산 화가 신현국
2021.9.29 - 10.05
갤러리인사아트



신현국의 작품세계

생명의 아름다움에 순응하는 거인적인 산의 설화

신항섭(미술평론가)

 화가의 창의적인 사고는 의식을 지배한다. 그러기에 평생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창작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의 집중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 집중된 의식은 창작, 즉 새로운 조형세계를 구축하는데 소비된다. 하지만 전인미답의 새로운 조형세계는 어디에도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없다. 마치 오리무중과 같다. 손에 잡힐 듯싶으면서도 쉽사리 잡히지 않는 일종의 허상과 같은 것이다. 의식에 나타나는 듯싶다가 사라지곤 하는 그 허상을 움켜쥐어 시각적인 이미지로 변환하는 것이 다름 아닌 신현국의 작업방식이다. 

 신현국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비구상작업으로 작가적인 입지를 다졌다. 1960년대라면 대학졸업 직후인데, 당시 한국화단에는 추상미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화가로서의 첫걸음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당시로서는 전위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비구상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의식의 소유자가 아니고는 안 될 일이다. 비구상 작품으로만 10여회에 이르는 개인전 경력이 말해주듯이 실험적이며 창의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살피는데 어려움이 없다. 다시 말해 시대를 앞서 가는 작가로서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당시의 비구상 작업은 그 자신의 체험적인 삶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시골에서 태어나 농업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과 고향풍정은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정서적인 토양이었다. 바꾸어 말해 예술가적인 의식 및 감정은 다름 아닌 대자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비록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비구상작업일 경우에도 막연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고향과 관련한 그 자신의 체험적인 삶과 연관성을 가진다. 

 가령 당시 작업 가운데 비록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당이나 사립문 등 고향풍경을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존재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무의식의 세계 또는 우연적인 표현이 아니라, 내안에 존재하는 추억의 단편들이 비구상적인 이미지로 현현하는 식이었다. 그와 같은 비구상적인 이미지는 의식의 창에 비친 비현실적인 존재의 그림자인 것이다. 현실에 근거하면서도 그 실체를 명료하게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거기로부터 발원하는 불명확한 존재성이야말로 그의 비구상 세계가 추구하는 이상경이었다. 

 비록 형태는 보이지 않을지언정 그로부터는 서정적인 분위기 느껴질 정도였다. 구체적인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미묘한 시각적인 이미지는 서정시와 마주하고 있는 듯싶은 감정을 유도한다. 손에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모호함이 지배하는 비구상의 세계는 그로부터 유추되는 어떤 종류의 상상도 수용하게 마련이다. 그의 미적 감수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추측케 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향풍경이고, 고향의 정서이다. 

 이렇듯이 초기의 비구상 작업을 통해 익힌 조형감각은 구상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작품세계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계룡산 자락에 화실을 마련한 이후 그의 작품세계는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수용하게 된다. 머리에 치받치는 장중한 계룡산의 위용을 보면서 그 품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커다란 위안을 느끼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자연에 대한 실질적인 체험 및 이해를 통해 그 정서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를 토대로 양육된 그의 미적 감수성은 필시 그 언저리에 머물게 되어있다. 

 추상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상황에서도 거기에 기울지 않고 비구상적인 이미지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도 일상적으로 산과 마주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자연미라는 하나의 단어로 함축되는 고향풍경 및 그 정서야말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미의식의 뿌리인 셈이다. 그의 내면에 각인된 자연, 고향풍정, 고향의 정서는 어느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미의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계룡산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이에 연원한다. 

 여기에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사색과 사유라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험철학이다. 그 자신이 보고 느끼는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자연을 관찰하고 응시하며 관조하는 방식으로 미의식의 깊이와 외연을 넓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의 심화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작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계룡산을 대상으로 하는 일련의 작품들 대다수는 구체적인 형상을 포기한다. 이처럼 형체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모호한 표현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내면적인 공간 확장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전체상으로는 산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부분을 생략하면서 전체를 하나의 관점으로 통일하는 표현방식이다. 산이 내포하고 있는 무수한 존재, 그 물상을 압축하고 함축하여 산이라는 통합된 존재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 실체가 보이지 않을 뿐 산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는 거기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 생명체들이 산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형상 속에 은닉되는 셈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 및 공감은 시각적인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어느 면에서 시각적인 이해로는 단지 모호한 산의 이미지만을 볼 수 있을 뿐, 산의 이미지에 귀속된 생명체의 존재를 간과하기 십상이다. 그의 작업은 눈에 보이는 실체에 대한 검증이나 찬미가 아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는 산에 대한 미적 감흥조차도 절제되거나 안으로 응축시킬 따름이다. 그가 제시하는 흐릿하거나 명확치 않은 산의 이미지에서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얻기가 쉽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높은 미적 안목에 의해서나 심미안으로 접근할 경우 모호한 이미지를 통해 탐미적인 즐거움과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극히 절제된 색채이미지로 일관한 작업이 있는가 하면,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작업도 있다. 절제된 색채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작업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반감시킨다. 가령 무채색 계열의 색채이미지가 전체를 장악하는 가운데 여타 유채색이 밑으로 가라앉는 형국의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에 이르는 기간에 제작된 대작 대다수는 이와 같은 색채이미지 기법을 공유한다. 

 이 시기에는 거의 단색조에 가까운 작품도 있는데 이는 초기 비구상 작업과의 혈연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무채색으로 일관했던 초기 비구상 작업에 대한 반추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흐름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절제된 색채이미지는 감정의 침잠에 따른 표현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단색에 가까운 색채이미지는 의식적으로 억제되는 감정의 증표일 수 있다. 지적인 제어에 순응하는 감정이 마치 안개처럼 부유하는 절제된 색채이미지로 현현하는 것인지 모른다.  

 구체적인 형태는 물론이려니와 색채조차 억제되는 상황은 심화되는 사색, 미의식의 침잠, 감정의 절제를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사상 및 철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결과일 수 있다. 회화가 시각예술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그 의도가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시각적인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데 인색하다는 것은 거꾸로 자신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를 확신한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바꾸어 말해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포기하는 대신에 그 자신의 회화적인 사상 및 철학을 응축시킴으로써 감상자의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리라. 

 비구상작업은 그 어떤 형상을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순수추상이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비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의 명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순수추상은 어떤 특정의 대상이나 소재 그리고 자연현상과 같은 실재하거나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사실과는 다른 무의식이나 감정의 표출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추상작업의 경우에도 실상을 근거로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추상은 그 어떤 형상으로도 역추적할 수 없다. 애초에 형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열망이 없는 까닭이다. 반면에 비구상은 실재라는 어떤 사실이나 존재에 대한 인식이나 성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에 제작된 일련의 ‘빛이 있는 자연’이라는 명제의 작품은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자연에 대한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기간에 제작된 작품은 시각적인 이해로는 비구상이라기보다는 순수추상에 근접한다. 그런데도 비구상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인상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인식을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작품세계는 언제나 실재하는 실상에 대한 이해 및 인식에 근거한다. 그러기에 그 어떤 형상을 읽을 수 없는 작품에서도 비구상으로서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 아닐까.

 그의 작품 가운데 ‘해돋이’ ‘적송’ ‘꽃’ 등 일련의 명제를 가진 작품들은 구체적인 대상 및 소재를 적시한다. 실재하는 물상이나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은 당연히 형태가 드러난다. 헌데도 그 형태를 표현하는데 지극히 소극적이다. 거칠고 힘차며 둔중하게 던져지는 붓의 움직임 가운데 한 부분으로서 슬며시 형태를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형태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듯싶다가 작업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한 두 번의 붓질로 형상을 던져놓는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작업방식은 언제나 심상의 흐름과 그 흐름에 격하게 반응하는 붓질로 시종한다. 형태에 대한 의지가 약하다고 해서 무의식이나 감정의 표출, 또는 우연적인 표현에 의탁하는 추상적인 표현방식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실제에 근거하여 그로부터 발단하는 심상의 표현을 중시한다. 비구상작업 자체가 이와 같은 심적인 과정을 통해 전개된다. 따라서 작업하는 순간에는 형태에 대한 의지가 미약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심상이 지시하는 이미지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빛이 있는 자연’과 ‘산의 울림’ ‘빛이 있는 자연의 소리’라는 명제를 가진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 심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라는 현실적인 인식의 대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까닭이기에 그렇다. 여기에서 ‘산의 울림’ 연작은 산이라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울림’이라는 단어가 암시하고 있듯이 산의 외형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체로서의 산이 들려주는 소리, 즉 내적인 언어를 표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뿐만 아니라 ‘빛이 있는 자연의 소리’ 역시 빛을 통해 깨어나는 생명의 기운을 표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빛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밝혀준다. 빛으로부터 생명이 시원하고 빛에 의해 세상이 어둠으로부터 깨어난다는 진리를 작품의 사상 및 철학적인 근간으로 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이 그가 구상작업에서조차 형태를 드러내는데 인색한 것은 보이는 사실의 재현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자연풍경 또는 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생명체를 품안에 안고 있는 생명의 숲으로서의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산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은 어쩌면 거인과 같은 존재성을 의식하도록 하려는지 모른다. 시각 및 감정을 압박하는 거대한 존재로서의 거인은 불가침이다. 그러나 그 거인에게도 소인을 품에 안는 따스한 혈류가 있다. 

 그가 거인적인 이미지의 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명체를 보듬는 생명의 기운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진면목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이란 바로 생의 기운이다. 산 속에 깃들인 생의 기운을 격렬히 표현함으로써 미의 본질에 직입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체의 터전으로서의 산의 이미지를 거인과 같은 결코 허물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그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결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산의울림, 116.7x91.0, Acrylic on canvas, 2015



깊은 자연관조의 시적 조형
-신현국의 그림세계

이 가 림(인하대 교수, 시인)



   ‘계룡산 화가’라 불리는 신현국은 그 용모도 그렇지만 그 성격과 인품 그리고 행동방식 일체가 ‘도인’을 많이 닮았다. 이렇게  “그가 도인을 많이 닮았다”라고 말한 것은 상당한 칭찬도 되지만 동시에 ‘도인’ 그 자체가 되지 못했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좋아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신현국은 어디까지나 ‘화가’, 즉 미의 창조자로서의 ‘예술가’이기에, ‘도인’ 그 자체가 완전히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화가는 색채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동시대의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는 천분을 위임받고 태어난 영혼의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현국이 ‘도인’이 완전히 되었다면 틀림없이 붓을 던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깨달음의 지혜를 얻은 자에게 있어서 색채의 언어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헛된 것으로서 내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가 “도인을 많이 닮은” 화가이기를 바라지, 도인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림에 온통 삶의 내기를 걸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밀고 가는 치열한 실존적 투기(投企, projet)의 모습에서,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진실과 신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999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신현국 회화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논한 글에서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신현국은 계룡산이라는 자연을 깊은 사유의 대상으로 응시함으로써 거기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조형적 질서를 찾기에 이른다. 그는 단지 ‘눈’만이 아니라 여러 감각기관과 상상력까지도 포함한 전 존재로 자연과의 우주적 교감을 나눔으로써 경이로운 생명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그것의 ‘깊이’를 엿보게 된다. (......) 신현국 회화가 보여주는 담백하고 절제된 비구상의 압축미는 ‘마음의 눈’ 으로 바라본 생명의 깊이, 그 신성성과 아름다움을 거의 동양화적인 붓질로 표현한 자연찬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 당시의 내 해석이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최근의 비구상 작업이 답보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이전의 미학을 심화시키고 있을 뿐, 새삼스레 급격한 변모를 시도하지 않는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그림을 자신이 표절하여 베껴내는 나태한 만네리즘에 빠져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그야말로 평생 동안의 치열한 실험과 탐색을 거쳐 마침내 획득하게 된 미학의 정립을, 이번 전시에 선보인 일련의 그림들을 보면서 확인하게 된다. 

   이제 신현국의 그림은 저 중국의 화성(畵聖)으로 일컬어지는 마힐(摩詰) 왕유(王維)가 일찍이 도달한 궁극적 회화의 경지, 즉 시와 그림의 ‘상호 연관성’를 넘어서 “시와 그림이 한 길을 가는”(詩畵一道) 현묘한 경지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식(蘇軾)이 왕유의 시를 가리켜 “마힐의 시를 음미하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살피면 그림 속에 시가 있도다 (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라고 말했을 때의 그 조화로운 미학적 〮․ 정신적 경지에 아주 가까이 다가섰다는 뜻이다. 

    신현국의 「빛이 있는 자연의 소리」시리즈를 보자마자, 침묵과 숭고의 상징인 산을 닮고자 했던 신석정(辛夕汀) 시인이 노래한 「푸른 심포니」란 시가 즉각 떠오른 것도, 서정성 넘치는 그림 속에 포에지가 맥박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저 산 모양하고 
시방 무수한 봉우리들이 연주하는 
푸른 심포니를 듣자.
영원한 청춘과 멸하지 않는 생명과 
뚜벅 뚜벅 걸어오는 줄기찬 내일의 선율을 듣자.
<장엄하지 않으냐?>
오늘도 우리들은 
저 거창한 산의 푸른 심포니 속에서
벅찬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푸른 심포니」부분

   “무수한 봉우리들이 연주하는 푸른 심포니”를 들으며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과 “빛이 있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색깔로 시를 쓰는 화가의 마음 사이에는 더 이상 예술 장르의 칸막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림과 시가 긴밀한 상통 관계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시모니데스 이래 여러 철학자, 문예이론가들이 언급한 바 있다. 특히 고전주의 작가들은 호라티우스가 『시학』에서 말한 “그림과 시는 같다” (Ut pictura poesis)라는 주장에 동의하면서, 시를 “말하는 그림” (la peinture parlante)이라 정의하기도 하고, 그림을 “말 못하는 시”(la poesie muette)라 정의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시와 그림은 본질적인 상동성(相同性)으로 맺어져 있는 것이다. 

   신현국 회화에서는 뭐라고 딱 꼬집어 말 할 수 없는 강렬한 시적 감동이 우선 전해진다. 그것은 온화하지만 역동적인 색채 구사가 불러일으키는 어떤 서정적 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와 사랑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섬세한 조형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터이기도 한 계룡산을 ‘시각적 저항체’(optique visuel)로 보지 않는다. 자연대상 일체를 끊임없는 교감의 상대로 여기면서 내밀하게 주고받는 대화, 그 소중한 이야기들이 그의 그림들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초기와 중기의 그림에 보였던 거칠고 과격한 야수파적 필치가 사리지고 담백하고 투명한 색채를 절제 있게 구사하는 최근의 작품들은 신현국 회화의 미학적 〮․ 정신적 지향이 어느 높이에 도달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그는 자연에서 울려오는 원초적 시원(始原)의 소리, 다시 말해서 계룡산의 장중한 합창소리에서부터 한포기의 흔들림에 이르기기까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주되는 오묘한 율동의 소리, 그 ‘소리의 무늬’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문법과 언어로 아름답게 빚어낸다. 

    이러한 “시와 그림이 한 길을 가는” (詩畵一道)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흔해빠진 자연모방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공감각 체계의 상호적 치환을 통한 우주적 교감의 울림을 만나게 된다. 마치 파울 클레 (Paul Klee)가 음악의 선율을 환상적인 초현실주의적 기법으로 조형화 했듯이, 신현국 역시 자연과 생명에서 솟구쳐 나오는 경이로운 소리를 화폭에 날렵한 필치로 담아낸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의 매력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단지 ‘눈’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깊은 명상을 담고 있는 화폭에서 울려나오는 영혼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산의울림Echo of Moutain, 162.2X130.3, Acrylic on canvas, 2010




산을 향한 생명의 노래를 가슴으로 담아 낸 정열의 화가 

장 준석(미술평론가, 문학박사)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옛 백제의 도읍지 공주에 자리한 계룡산자락에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청량한 초가을 하늘 아래 아직은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는 초목들과 이름 모를 야생화들의 가을 이야기는 금강의 줄기와 더불어 더욱 깊은 맛을 자아낸다. 이러한 아름다운 공주의 산야가 화가 신현국의 화폭에선 더욱 운치 있게 형상화된다. 

 공주 계룡산 갑사 가는 길 입구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서는 큰 스케일과 열정의 작업들, 특히 산에 대한 남다른 조형력을 볼 수 있다. 그의 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이 남다름은 계룡산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산의 정기와 같은 힘으로서, 오랜 동안 몸소 체험하여 이제는 하루의 일상이 되어버린 계룡산의 조형적인 형상화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각고의 노력 및 열정으로 형상화된 것이라 하겠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여느 작가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산을 통하여 색다른 예술가적 기질을 발휘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계룡산을 통해 드러나는 신현국만의 독특한 조형미에는,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며 표출해낸 산에 대한 관조로부터 비롯된 미적 상상력이 담겨져 있다. 그러기에 작가의 산 그림은 독특하고 깊이가 있다. 

 이렇듯 늘 산과 더불어 조응하며 산과 더불어 숨 쉬는 듯한 작가의 작업에는 다채로움뿐만 아니라 민요의 가락과도 같은 정겨운 흥이 넘친다. 그리고 이 흥은 타고난 감성적인 끼라고 생각되리만큼 자유롭고 담박하다. 그만큼 필자가 본 신현국은 예술적 감흥이 농후하며 독특한 미적 조형 능력을 지닌 작가이다. 이는 아마도 남다른 조형적 힘을 지닌 작가의 노력과 창작 열의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러한 면은 그의 작품 양에서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작품이 주로 대작인지라 쉽게 그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양이 적지 않은 작가인 것이다. 그의 작품 수를 보면, 그의 하루 일과가 그림 그리는 일로 시작하여 그림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현국은 계룡산에 들어와서 삼십여 년 넘게 은둔하다시피 그림만을 그리고 있다. 때로는 강렬한 색감으로, 때로는 묻혀있는 산의 흔적을 파헤치듯,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크고 작은 터치의 흔적들을 서로 순환시켜가며 말이다. 이 순환은 곧 그의 심장에서 드러나는 감성의 표출이자 산을 향한 생명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철저함과 자유로움이 공존함은 물론이다. 이는 산의 본성 및 내재된 산의 응어리를 직시하고, 그것과 거짓 없이 함께 조응하면서 이루어지는 어떤 절대적인 기운이다. 이 기운은 곧 산과 자연의 본질로서, 작가의 관조 속에서 드러나는 계룡산의 실체이자 생명이라 하겠다. 이는 더 나아가 그만이 이룩해낸 생명의 아름다움이자 산의 순수함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세계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산에 대한 예술적 접근이 명료하며 창작의 근원이 확실하고 독자적이다. 자연과 산수화 및 풍경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단순하게 섭렵하는 조형 예술이 아닌, 내면으로부터 거짓 없이 드러나며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산의 본성과 관련된 조형성을 구현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산과 함께 호흡하고 이들을 미적 사색과 조형력으로 조망해보며 이들이 지닌 실체를 마음에 품어 새로운 예술적 감흥을 얻고자 한다. 이 감흥은 물론 산에 동화되어 표출된 것으로서, 산에 대한 진지한 체험과 사색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체험과 사색은 산의 본성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인 관조를 통해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미적 조응력으로서, 조형적인 응집력의 압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체험으로, 작가 자신이 그만큼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신현국의 산은 어찌 보면 무형상적인 듯하면서도 산의 다채로움처럼 밀도가 있으며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힘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산의 모든 것을 압축한 듯한 절제된 색과 형의 이미지 및 선묘의 힘이 저변에 흐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는 투박함과 자유분방함 및 진실함과 강한 힘 등이 담겨있다. 산의 정기와 본질에 대한 조형적 소통이 작가와 하나가 되면서 더욱 완벽에 가까운 군더더기 없는 하나의 수준 높은 산이라는 조형으로 표출되어 자연적인 형상과 색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에는 대단히 섬세한 감각과 예민한 조형성이 내재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작가의 산 그림은 여느 작가의 그것보다도 진지하며 순수하기에 마치 산의 본성을 체험한 듯하면서도 은근하며 깊은 맛을 지닌다. 또한 추상적인 듯하면서도 추상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하며, 새로운 차원의 산세를 펼쳐내는 듯한 기묘함을 담고 있다. 그의 산 그림은 산의 형상적인 차원을 넘어서 실재하는 산의 생명의 숨결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차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면들은 그가 삼십여 년 넘게 심혈을 기울여왔던 조형세계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산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혈맥처럼 압축한 산의 조형이 부지불식중에 펼쳐지게 된 것이다. 때로는 단순한 붓놀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조형적인 예리함과 투박함이 꿈틀거리면서 봄 산이 되고, 여름 산 혹은 가을 산, 겨울 산이 되어 우리들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신현국은 산과 호흡하고 산에 동화되며, 거기에서 비롯된 일련의 현상들에 대해 사색하면서, 평소 생각해오던 산에 대한 심경을 욕심 없는 마음으로 가감 없이 정직하게 형상화해 왔다. 산의 형상들과 열린 마음으로 함께하고, 낮은 마음과 겸허함으로 이들과 함께 소통하며, 자신만의 산의 조형을 표현해온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모습은 평범한 듯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으며, 우연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그의 산 그림은 부드러우면서도 산이라는 이미지를 바로 느끼게 해주며, 자유로우면서도 아름답고, 질박하면서도 어머니의 고향처럼 감동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단순히 산을 그리기보다는, 산을 통해 자연의 본성을 다루는 소중한 체험을 형상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에는 무의미한 붓의 흔적들이 잔존하는 것 같지만 어느 산의 형상보다 더 구체적인 형상성을 지닌,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무게가 실려져 있다. 이 아름다움은 산의 정기와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미적 힘으로서, 자연의 생명력과 조우하는 모습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작가는 계룡산에 동화되면서부터, 보다 진지한 삶의 과정을 통해 한국적인 산의 조형과 사유에 더욱 몰입하게 된 듯하다. 또한 자연과 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인간과 자연의 질서를 체득하게 된 것 같다. 이 체득은 곧 번득이는 어떤 것으로서, 미적 영감이나 혹은 무아경의 조형력을 발산시키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원동력이 기운의 혼돈보다 더 압축된 듯한 폭발적인 산의 이미지들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의 산 그림에는 자유로움이 흐르고 신비감이 내재되어 있다. 여기에 가공할만한 색과 형 그리고 빛과 어둠이 한데 어우러지며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자연의 형상과 이미지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치 색분해를 이루듯 가해지는 여러 상황들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은 시각적으로 독특한 현상으로서, 깊이 있고 다양한 색과 형의 변화 속에서 드러난다. 이는 바로 작가 신현국만의 독특한 산을 조형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다양한 색상의 하모니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산의 이미지들이 각기 다른 밀도를 지니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이 미적 하모니는 어느 순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평면 작업의 조형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기에 그의 작업은 언뜻 보아 평면의 평범한 작업처럼 보이면서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이상야릇한 힘을 담고 있다. 이 힘은 무중력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다채롭기도 하며 마치 안개가 서려있는 것 같기도 한 산의 조형성이다. 이는 많은 사색의 시간뿐만 아니라 산과의 많은 대화와 소통의 시간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산이라는 공간과 형상의 이미지를 담아내기 위한 체험과 사색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면 멋진 산의 향기가 스며있는 자연스러운 색 층이, 화면에 투박하지만 견고하게 다져지는 것이다. 

 이처럼 신현국의 작업은 자연과 산의 속성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우리의 정서와 부합되는 다양한 산의 조형뿐만 아니라 자연을 움직이는 힘을 실은 은유적 모노크롬의 성향 또한 엿보인다. 그것은 산에 대한 체험과 사색으로부터 비롯된 조형 행위 그 자체에서 발생되는 자연스러운 산의 기운이자 또 하나의 현상이라 하겠다.



 
산의울림 Echo of Moutain, 390.9x162.2, Acrylic on canvas, 2018
 
 


신현국 작가



신현국 SHIN, Hyun-kook 申鉉國

b.1938
홍익대 회화과 학사

개인전 및 초대전 총 48회
단체전 850회이상

Awards
1960 문교부 장관상
1982 한국미술대상전 초대작가상
1988 한국미술대상전 초대작가상
1995 국제미술대상(IAOCA Grand Prize) 수상(일본)
2016 대한민국 미술인상 본상 수상(한국미술협회)
2018 제15회 미술세계상 본상 수상(월간 미술세계)

Etc
1995 미국 버지니아주 ROANDKE 명예시민 위촉

Current
한국미술협회 고문, 한국전업작가협회 고문,
대전시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회화제 고문,
상형전 고문, 화연전 고문, 한국창조미술협회 고문

Works possed by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문예진흥원, 서울시립미술관, 당림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제주기당미술관, 향암미술관, 서울행정법원, 특허법원,
청주지방법원, KBS, MBC, 하나은행, 신한은행, 한밭대학교,
대전광역시청, 공주시청, 공주경찰서, 대전지방경찰청, 개인소장 다수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