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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슬리즘 PENCILISM

  • 전시분류

    단체

  • 전시기간

    2022-03-30 ~ 2022-04-24

  • 참여작가

    김범중, 정헌조, 박미현, 김혜숙, 이지영, 문기전

  • 전시 장소

    갤러리밈

  • 문의처

    02-733-8877

  • 홈페이지

    http://www.galleryme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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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슬리즘 PENCILISM
2022.3.30 - 4.24
갤러리밈




펜슬리즘

이선영 (미술평론가)
 
이 전시의 작품들은 단지 물성의 잘 표현한다는 형식적 단계를 넘어서, 펜슬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펼친다. 펜슬을 끼고 살았던 그들은 펜슬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늠한다. 작품들은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그러했듯이, 캔버스에 발리는 물감 자국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펜슬만으로...’라는 선택은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리자는 모더니즘적 기획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 전시의 작가들은 펜슬로 출발하는 것이지 펜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듯이,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다. 그들은 펜슬로 자신을 포함한 세상과 대화한다. 그 대화에 너무 많은 단계의 매개가 필요하면 대화는 불가능하거나 왜곡이 불가피하다. 이미 실현되고 있는 코드화되는 세상에서의 소통은 어떠한가. 양이 아닌 소통의 질적 차원을 생각하면 극히 회의적이다. 펜슬은 여러 필기구 중에 어릴 때부터 가장 쉽게 접하는 매체로 내용에 집중하기에 편리한, 나름대로 투명한 매체다. 

하지만 예술의 언어는 투명하지는 않기 때문에 펜슬은 물성부터 세계를 보는 창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전시된 작품들은 정곡을 찌르는 침같은 지점부터 무엇이 나올지 무엇으로 변모될지 모를 미지의 영역까지, 관조로부터 행동까지 다층의 진폭을 가진다. 모든 매체가 몸의 연장이지만 펜슬은 특히 지진계처럼 섬세하게 몸과 마음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 펜슬은 심신의 미세한 굴곡 면을 읽어 조형적으로 번역한다. 펜슬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가 가장 짧은 순발력 있는 매체다. 미술에서 가장 일반적인 재료인 물감은 붓이라는 물컹한 매개를 거친다. 때로 더 직접적인 표현을 위해 붓 대신 화가의 손이 직접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 이 전시의 작품에서 종종 보이는 바늘 끝 같은, 또는 거미줄 같은 팽팽한 표현은 힘들다. 이 전시의 한 작가는 ‘가는 연필 선의 아주 연약하고 섬세한 특성과 그것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광물성 단단함이 내게는 참 매력적’(이지영)이라고 말한다. 



김범중


복제와 속도라는 면에서 탁월한 전자 미디어의 경우 기하학적 표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지만, 기계적 코드라는 매개를 거쳐야 한다. 컴퓨터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이는 극소수일 것이다. 코드는 손가락만을 원한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코드적인 모습은 눈에 대한 손의 극대의 종속을 표시한다고 말한다. 손이 종속되면 종속될수록 시각은 이상적인 광학적 공간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형들을 광학적 코드에 맞게 포착하는 경향을 띈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회화의 야생적 바탕을 지지하면서, 손가락적인 것에 대비되는 손적인 것을 부각시킨다. 연필을 쥔 손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과는 다른 것이다. 나날이 업그레이드 되는 미디어는 이를 뒤쫒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아마추어에 머물게 한다. 물론 기술과 기계는 구별이 돼야 할 것이다. 기계로서의 미디어는 기술자가 가장 잘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또 다른 문제다.

최신 기계가 등장하는 작품일수록 어설픈 장난감 같은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 ‘장난감’은 의미는커녕 재미조차도 지속시키기 힘들다. 예술은 기계로 대변되는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실과 대응해왔다. 내용과 형식, 즉 내용을 담는 형식이라는 이원 항을 단축하는 것이 펜슬리즘의 목표 중 하나다. 이 전시의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펜슬의 달인들이라 할 만하다. 물론 작가가 달인과 다른 점은 소재와 기술이 표현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것이 바로 형식주의다. ‘펜슬리즘’도 이러한 염려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지시대상에 얽매이는 재현주의를 벗어난 근대미술이 캔버스에 물감을 잘 반죽해서 바르는 식의 ‘달인’으로 귀결된 예가 있지 않은가. 2개 층으로 나뉘어 전시된 작품은 정적이거나 동적이지만 모두 펜슬로 그어진 가는 선의 긴장감을 활용한다. 마치 줄 위에 선 광대처럼 첨예한 상황과 게임이다. 하지만 이러한 광대에게 추락 방지 그물망같은 안전장치는 없다.



정헌조


추상적이든 구상적이든 이 전시의 작품들 대다수가 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펜슬리즘은 밑을 위로 올린다. 하지만 그 아래는 없다. 가느다란 선 아래는 바로 심연이나 우주공간이다. 선 또한 그곳에서 나왔지만, 그것이 조형적 언어로 작동하는 한 배경으로부터 도드라져 존재 또는 운동한다. 선들은 이 중성적인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지지하면서 형태를 만들고 변형을 거듭할 따름이다. 진한 바탕 또한 수없는 선이 겹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시각적 공간을 넘어선 촉각적 공간이다. 촉각은 가장 근본적인 감각이며, 시각처럼 기계에 의해 거의 식민화 되지 않았다. 어린이가 제일 먼저 쥐는 필기구는 연필이다. 중학생이 돼서야 만년필이나 볼펜을 썼던 기억이 있다. 쉽게 지울 수 있는 연필은 결정되지 않은 것들을 부담 없이 실험하게 해준다. 의도와 결과 사이에 최단 거리를 통해 생산력을 높이는 현대사회에서 연필의 위상은 모호하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 때부터 키보드에 더 능숙해지는 시대가 와서 연필은 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연필 재료인 광산업의 현장이 관광지 등으로 변신하듯 말이다.



박미현


당시에 주어진 기능을 다한 오래된 사물은 예술로 되돌아 오곤 한다. 단기적 효율만을 중시하여 여러 모색이 없을수록 연필은 물론 그림조차도 유물이 된다. 연필심은 흑연에 강도(경도)를 더하기 위해 진흙을 섞고 구워 만들어진 것이다. 용도에 따라 흑연의 비율을 달라진다. 흑연은 검정이지만 화학성분은 보석과 같다. 양자는 탄소로 이루어진 광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검은 흑연과 빛나는 보석은 단지 강밀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높은 압력에 의한 변성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광물은 땅속 깊은 곳에서 채굴해야 하는 노고를 상징한다. 간편하게 손에 쥘 수 있는 연필의 주재료가 생산되는 과정은 엄청난 저항이 따르는 노동과 기술의 결과이다. 연필의 시원적 형태는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같은 형태는 화학자이자 화가였던 콩테(Nicola Jacques Conté)가 18세기 말에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필 또한 산업혁명의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파헤쳐졌던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고, 자연을 도구화 대상화하면서 자연과 멀어진 주체의 자의식을 기록하던 매체인 셈이다.
 


김혜숙


연필심이 닳는 만큼 작품은 자라나는 과정은 그것이 깊은 곳에 자리했던 것 만큼이나 인내와 도약 그 모두를 필요로 한다. 작업은 무의식의 광산에서 채굴한 검은 물질을 동질이상의 존재인 보석으로 만드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연필이 드로잉같은 밑 작업에 쓰였던 것은 쉽게 지울 수 있고, 손에 닿는 가장 친숙한 필기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이 표면을 달리는 연필 한 자루처럼 하나의 차원으로 출렁이면서 처음과 끝을 잇는다. 구상만 하기보다 일단 시작해서 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면 좋은데, 연필이라는 만만해 보이는 도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종이와 연필은 미술의 어느 매체보다도 간편하게 시작할 수 있다. 표현할 것이 많을수록 수단은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연필은 이상적이다. 연필로 시작을 빨리 하거나 때로는 시작을 먼저 하거나 할 수 있다. 연필은 생각 이후가 아니라 생각과 더불어 간다. 때로는 생각보다 더 빨리 간다. 연필의 문턱은 낮다. 하지만 그 끝은 없다. 쓰기의 도구이기도 한 연필은 개념적인 경향이 있지만, 개념은 출발점일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개념이란 다가올 어떤 사건의 윤곽, 지형, 자리매김’이라고 말했다. 



이지영


개념미술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달리 이 전시의 작가들은 무엇인가를 잡다하게 말하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미학적 형상들은(그리고 그것을 창조하는 스타일은) 수사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감각들, 다시말해 지각들과 정서들, 풍경들과 표정들, 비전들과 생성들’이다. ‘세계를 가득 채우며, 또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생성가능케 해주는 감지 불능한 힘들을 감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펜슬리즘은 개념보다는 지각이나 정서와 관련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예술 속에 보존되는 것은 지각이나 정서이다. 만약에 그것이 개념적이라면 ‘그 개념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변주들과 울림들을 듣게 해주고 기발한 절단들을 행하며, 우리들 위를 비상하는 어떤 사건들을 가져다주기 때문’(들뢰즈와 가타리)이다. 대개 작품은 가면서 생각하고 작품에는 경로를 바꾼 흔적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같은 여정을 간다해도 완전한 반복은 없다.
 


문기전


하나의 선은 매번의 호흡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펜슬은 그 미세한 결을 살려준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펜슬로 가능한 세계가 어디까지일지를 두루 보여준다. 연필로 대변되지만, 샤프펜슬이나 색연필, 먹, 석묵(graphite) 등 종이라는 바탕과 잘 어우러져 효과를 낼 수 있는 재료도 함께 쓰였다. 직선을 포함한 여러 굴곡을 가진 선이 주된 형식이지만, 종이 위에 가해진 연필심의 압력은 가루를 만들어 내며, 이 또한 회화적 효과를 낳는다. 재료 때문인지 작품들은 거의 모노 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세상의 화려함보다는 흑백사진같은 깊이와 질감을 강조한다. 작가가 본 세상은 잘 찍힌 흑백 사진처럼 흑백의 계조로 조율되어 있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여러 작품들은 매체가 한정 됨으로서 차이의 계열은 더 섬세하게 드러난다. 작품은 2개 층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재현적 형상이 부재한 전시장 1층의 작품들은 묵상의 공간을. 자연이나 인간, 도시와 구조 등이 나타나는 2층의 작품들은 사건의 시간을 표현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전자는 존재론적이고 후자는 인식론적이다. 

만물이 생성 소멸하는 원초적인 용기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정헌조, 자신이 만든 어휘집을 통해서 세상을 구축/해체하는 박미현, 수많은 선으로 축적된 시공간의 리듬이 있는 김범중의 작품은 관조적이다. 공간과 시간이 연결되어 있듯이 정지에는 움직임이, 움직임에도 정지가 내재한다. 전자의 그룹은 정적이고 후자는 동적이지만, 정중동의 원칙은 공히 적용된다. 추상적인 어법에서 선의 내적인 움직임이 감지된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진동하며 그 진폭을 주변과 공유한다. 자신이 맞딱뜨린 낯선 공간을 해부하고 분석하여 가시화하는 김혜숙, 연필을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절묘하게 연결시키는 문기전, 인간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이지영의 작품은 역동적이다. 거기에는 행위가 있고 극적인 연결망 사이에 내재된 운동이 있다. 후자의 경우 움직임을 포함한 재현적 요소가 있지만, 회화라는 매체의 한계성에 의해 정적인 방식으로 동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다. 여러 차원의 복합, 비슷한 외모의 많은 인간이 출현하는 지점은 이동과 움직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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