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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환전 - 무심 無心 : 쉬어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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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환 개인전

무심(無心) ; 쉬어가다

2022.5.24 - 6.5

개나리미술관




‘무심’으로 길어 올린 ‘우리다움’


  조각가 안성환의 작업을 마주하면서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언급이 생각난다. '건축의 출발점도 도달점도 사람이다.' 평범하면서도 종종 망각하기 쉬운 명제이다. 건축이나 미술이나 넓은 시야와 성찰이 결여, 편협하거나 지엽적인 관심에 몰입한 결과로서, 본의 아니게 본질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표현의 세계에서 사람을 주제나 대상으로만 본다면 이 또한 지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이데올로기나 주제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이자 도달해야 할 궁극의 가치이다. 작가의 입장에서, 출발점과 도달점이 사람이라는 의미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공감과 관심의 문제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영화 <타임투게더>에서도 인용된 “다들 엔딩을 기다릴 때, 나는 이제 시작이다”라는 게리의 말도 음미할 만하다. 공연장 건축과 관련해서 한 말이지만, 조각가인 안성환의 입장에서는 조각 고유의 가치를 강조하고자 할 때 차용할 만한 명제이다. “다들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할 때, 오히려 나는 사람에 집중한다.” 고도로 발달해가는 AI나 로봇 등의 식민적 환경에서 사람에 대한 가치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지고 있는 추세에 대한 일종의 반동적 제스쳐가 작가에게서 엿보인다는 것이다. 산업구조나 자본, 과학기술 등이 혁명적으로 급변할 때, 방법이나 수단에 더 집중하게 하며, 아울러 사람의 소외가 가중되는 것을 우리는 무수히 목격해왔다. 휴머니스트로서의 대응을 중시하는 작가의 요체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품 세계는 철저히 ‘우리다움’의 구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많은 자료를 동원해서 인식할 수 있는 차원은 아니고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차원이다. 따라서 정서적으로 친숙한 우리 공동체의 역사와 신화가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 작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최소화되고 절제된 정적인 단순 구조가 바로 ‘우리다움’의 미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제주의 돌하르방, 토속불교의 미륵불 등과 같은 석상들에서 적지 않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들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함과 신비감, 소박한 조형성 등이 작가 작업에서 심미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스러움의 극치를 보이는 무기교의 기교, 즉 꾸미지 않으면서도 높은 기품과 아우라를 보이는 조형적 유산들이 작가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우리’란 무엇일까.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의아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엄마도, 아내도, 집도, 나라도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라는 가사에서 보듯, 노래를 부르는 우리 자신은 모르고 지나치지만,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어법인 것이다. 인칭과 격에 있어 단수와 복수의 구분을 엄밀히 하는 언어권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한 용법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러한 습관은 언제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모르긴 해도 우리 민족이 부부와 가족으로부터 시작되어 공동체 전반에 걸쳐 형성된 강력한 유대와 규범이 오래도록 지속된 결과가 아닐까. 

 
  작가는 인물조각상을 할 때 1인상보다는 2인상, 특히 부부상을 많이 한다.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의식 저변에는 ‘나’가 아니라 ‘우리’의 출발점을 부부로 보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암묵적 강령이나 삼강오륜에서 보듯, 부부는 우리 공동체 결속력의 구심점인 것이다. 물론 부부에서 가족, 혹은 가문으로도 자연스럽게 확대된다. 부부를 일컫는 수사가 참으로 많지만, 작가는 ‘꿈을 함께 꾸는 사이’로 묘사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꿈꾸는 사람들, 2020작> 참조)


  무심(無心)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위의 미학’은 역시 우리다움을 보다 명상적으로 추구하는 작가에게 중추적인 것이다. 작가의 주된 작업 모티브가 전통 기와에서 비롯된다. 물론 기와는 많은 모델링 과정에서 감추어지지만, 깨진 파편들은 모종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표정의 얼굴들로 다시 태어난다. 깨진 기왓장에 석고를 덧입혀가면서 성형을 하다 보면 어떤 무작위적 형상들을 만나게 된다. 소조적 성형 후엔 다시 조각적인 다듬질이 가미되면서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마티에르와 색감의 인물상을 빚어간다. 무심한듯하면서도 순수하고 초월적인 감정의 인간형을 창출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순수함과 초월적인 경지를 작가는 ‘무심(無心)’의 개념으로 일구어내고 있다. 작가 작업의 출발점은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즉 무작위적인 모델링에 있다. 기와를 깨서 그것이 우발적으로 주어지는 우연적인 형태로부터 시작한다. 파편과의 대화 및 교감, 영감을 통해 연상과 해석을 도출해내며, 아울러 무의식 속의 욕구나 신화와 교차함으로써 경험적 직조를 수행 한다. 다분히 다다(dada)가 선보였던 방법들과 비슷한 미학적 궤도에 놓여 있으면서도, 신화 등의 공동체 원형이라는 지점에서는 융(K. Jung)의 무의식에 근접해 있기도 하다.


  무엇이 되게 하기 보다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스스로 무언가가 되는 장면, 즉 무언가 새로운 뜻밖의 대상과 조우하는 대목에서 작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희열감을 느낀다. 자신이 전에 만나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어딘지 친근한 ‘오래된 미래’의 존재를 만나는 설렘과 기쁨,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다. 작가들이 특정 인물에 대한 모델링이 아니라면 대체로 작가 자신의 모습과 닮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특정 인물에 대한 초상 작업조차도 작가 모습이 투영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작가의 작업은 결국 자기 안의 ‘또 다른 자기’를 끌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무심’은 제의에 가까운 퍼포먼스와 무의식의 흐름에 따른 성형 등의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만, 그 밖의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두루 발견된다. 형태도 단조롭고 마티에르도 톤도 무덤덤해 보인다. 단순한 형태 외의 조형요소들은 감정이나 기교에 대해 거리와 절제의 기호로 작동한다. 물성 자체가 말하는 그대로를 존중하며 고유의 기교조차도 억제하는 가운데 고요함을 느끼는 함축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이는 다분히 아르카익, 즉 원시적 혹은 고대적인 고졸(古拙)의 미감을 근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작품 자체에서 저절로 우러나도록 한다는 환원주의적 미적 태도는 우리다움이라는 동기도 있지만, 나아가 동시대 사회에 맞서는 일종의 제스츄어이기도 하다. 빅 데이터와 같은 정보의 홍수는 소음의 폭증이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무언가에 쫓기듯 끊임없이 낯설고도 두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동시대인들에게는 자기성찰이라는 정신적 연단이 없다. 따라서 주체와 가치가 표류하는 상황이 가중된다. 이에 대한 예술가의 소명은 모종의 반동적 성향의 정화와 재부팅을 시도하는 것이다. 가중되는 소음을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동시대인들에게 소박한 동기부여를 표방하고 있다. 요컨대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은 사람들을 향한 치유 혹은 격려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작업을 통해 작가가 먼저 치유를 받고 있다는 작가의 고백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이러한 미적 태도는 작가 작업 전체에 흐르는 철학을 엿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조건 속에서 ‘멈춤’ 혹은 ‘쉼’이 어떤 결과 혹은 효과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이 작동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멈춤’이나 ‘쉼’이라는 개념은 정지나 정체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기와의 예에서 보듯 초월적인 데가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해 설명하는 바를 귀담아들어 보자. “날카로움을 꺾고, 묶여있던 것을 풀며(挫其銳, 解其紛 좌기예, 해기분) / 빛을 고르게 하며, 지극히 작은 것과 하나가 되는(和其光, 同其塵 화기광, 동기진)” 쉼의 본질. 차분하고 쉽게 역설하고 있음이다.


이  재  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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