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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일 : 성광성냥공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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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의 글

사진기록에 잠재하고 있는 가치는 여러 가지의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진기록은 혼란하고 불안했던 역사의 격동기를 증명하기도 한다. 신뢰성과 무결성을 담보로 하는 사진기록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역사의 증거가 된다. 이는 이미지라는 수단을 통해서 문자로는 표현하기 힘든 섬세한 정보와 가끔은 의도와는 달리 전혀 예상치 못한 귀중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나는 2019년 홍콩의 민주화운동을 사진으로 기록했었다. 그해 1027일 새벽 몽콕에서 경찰들이 쏜 최루탄을 피해 시위대와 함께 정신없이 골목 사이로 도망쳤고, 나는 마치 홍콩우산의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에도 부산 사하구의 무지개 공단건설로 사라져가는 홍티마을, 오랜 세월 동안 음지에서 편견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던 경주 천북의 한센인 집단마을, 대전 소제동 일대에 산재해있는 중요한 근대문화유산인 철도관사마을, 경북 안계면의 지역소멸을 극복하기 위한 이웃사촌 청년시범마을 사업 등의 기록들이다. 성냥은 근대의 획기적인 발명품 중의 하나이며, 이번에는 근대산업유산인 의성군의 성광성냥공업사에 주목한다.


성냥은 20세기 초반부터는 실용화되면서 대중에게 보급되었고, 우리나라에 성냥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1880년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1917년에는 인천에 일본인에 의해 성냥공장이 들어섰고,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42월에 실향민인 양태훈과 김하성에 의해서 성광성냥공업사(성광성냥)가 만들어졌다. 성광(城光)은 의성을 빛낸다는 의미로 점점 성장하여 경상도 전역과 강원도의 동해안 일대까지 널리 퍼졌다. 이후 창업 초기에 직공으로 입사한 손진국씨가 대표로서 공장을 이끌어왔으며, 1970년대만 해도 종업원 160여 명에 하루 15,000갑의 성냥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성광성냥의 확장세에는 성냥개비의 머리에 바르는 두약에 그을음을 섞어서 습기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1회용 가스라이터가 생산되고 이후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20135월 경상북도는 성광성냥을 향토뿌리기업으로 선정하기도 하였으나 특별한 지원은 없었고, 결국은 그해 11월 공장의 가동을 멈추고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20207월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되었고, 1124일 최종 폐업신고 절차를 마쳤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도 정지한 시간 속에 잠겨있는 장소에 대해 증언하면서 미래를 예언하는 묵시론적인 실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폐업한 공장 내부는 예전의 정취를 보여주는 찌그러진 양철 대문들, 위험해 보이는 변압기, 멈춰버린 벽시계와 손목시계, 공장 시멘트 바닥에 비집고 자란 알 수 없는 들풀, 성냥의 두약으로 사용했을 굳어져 버린 화학약품들, 당시의 일상들이 점점이 박힌 샛별 같은 따스한 온기 그리고 멈춰버린 수 없이 많은 녹슨 기계들이다. 나는 카메라를 증인으로 공간과 시간을 목격하면서 공간의 빛과 시간의 빛을 담아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장소의 지표들을 만든다. 증인으로서의 사진과 기록으로서의 사진은 다시 조율될 수 있는 원천의 자료가 되길 희망한다.


이제 영원히 돌아갈 것만 같던 공장의 기계들은 폐업과 함께 적막의 장소로 변했고, 나는 시선의 바깥으로 내몰린 공간을 다가올 가능성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흩어진 이미지를 모아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고, 우리가 만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사진은 대상의 무엇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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