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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속살 읽기-김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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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장르의 예감

김선두는 2003년 봄 어느 날, 한 고을 태생의 소설가 이청준, 시인 김영남과 고향을 함께 읽어보기로 했다. 그 열매가 이번 전시회의 그림들이다. 그런 만큼 이번 전시회에서는 소설가와 시인이 그들의 장르로 읽은 고향을 화가가 어떻게 자신의 장르인 그림으로 형상화했는가를 주목해서 볼 일이다.

서로 다른 장르에 종사하는 세 예술가의 한 고향읽기에서 김선두의 그림의 존재 양태는 하나가 아니다. 먼저,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색과 선과 구도 등, 그림의 기본요소들을 모두 갖춘 그림으로 존재한다. 이 경우 그것은 김선두의 예전 그림들, 여러 연작들과 관계를 맺으며 더 나아가 한국화 전체와 관련된다. 다음으로, 그의 그림은 소설과 시라는 밑텍스트를 바탕으로 창작된 윗텍스트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소설가 이청준과 시인 김영남의 특정 텍스트와 그것을 토대로 그린 김선두의 그림이 맺는 존재 양태가 있다. 셋째로, 그의 그림은 소설가와 시인의 특정 텍스트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작품에 대한 윗텍스트로 존재한다. 이 경우 장르와 장르 사이의 교류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다. 끝으로, 그의 그림은 세 예술가의 공통항인 고향 '장흥'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경우에도 두 예술가가 각기 그들의 장르로 형상화한 고향에 그가 체험하고 내면화한 고향이 결합되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다양한 존재 양태를 염두에 두고 그의 몇몇 그림을 구체적으로 읽어보자.





해변의 육자배기는 이청준의 소설인 동시에 김선두의 그림이며, 그림에 쓰여진 글이면서 그려진 그림의 일부다. 이처럼 다중 의미를 지닌 <해변의 육자배기> 안에는 네 개의 작은 그림들이 있다. 큰 그림속의 작은 그림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내면 상징도'mise en abyme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내면 상징도'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영화 속의 영화, 그림 속의 그림처럼 한 작품의 내부에 동일한 장르의 작품이, 단순한 포함관계를 넘어 의미체계의 상동을 이루면서 들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반성적이라는 점이다. 내면 요소가 작품을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변의 육자배기>에서 왼쪽 위 둥근 창의 돛단배 그림이 그렇다.
어머니에겐 그 일곱 마지기 밭이랑이 또 하나의 바다였다. 어머니는 그 여름 농사가 어울어진 밭이랑 사이를 한 척의 작은 돛배이듯 무한정 가물가물 떠돌고만 있었다.

김선두의 그림에 쓰여진 이 글은 이청준의 소설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김선두의 그림은 무엇보다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 속에 그려진(쓰여진) 이청준의 글도 그림이다. 그 문자들은 문자의 지시기능 등을 상실한 채 선과 색, 형태로 존재해서 그림 속의 어머니가 매는 콩밭이 된다. 그런데 김선두는 밭을 왜 문자로 형상화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김선두의 그림의 다른 존재 양태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그림 속의 문자가 일차적으로는 그림의 요소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청준의 특정한 소설의 특정한 단락을 전사(轉寫)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한 단락에 따르면 밭이랑은 바다고, 어머니는 바다인 밭이랑 사이를 떠도는 한 척의 작은 돛배다. 그렇다면 거꾸로 돛배가 떠있는 바다의 물결은 문자로 된 밭이 된다. 김선두의 그림에서 문학과 미술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대화한다. 거기에서 끊임없는 의미의 증폭과 확산이 일어난다. 그럴 때 김선두의 그림을 일반적인 그림으로 볼 수 있는가. 그 그림은 예술의 어떤 장르에 속하는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김선두는 이번에 이청준의 「눈길」, 「허기진 연」, 「시인, 화가와 고향 봄길을 가다」(일명 '성가신 봄')와 김영남의 「푸른 밤의 여로-강진에서 마량까지」를 병풍으로 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병풍은 펼쳐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구부려놓고 걸어가면서 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네모난 구도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큰 전체로 연결되는, 마치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네모난 차창으로 보는 풍경의 끝없는 유혹"과 같은 것이다. 병풍에는 연속된 화면의 시간적 조절과 정지하는 장소의 활용에 의한 조화와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병풍그림은 이번 그의 전시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푸른 밤의 여로>를 보자. 김선두는 이번에 밤을 주요 모티프로 삼은 다른 그림 <가을 밤이 되면>과 <여름의 추상>에서도 <푸른 밤의 여로>와 같은 계열의 젖은 듯한 짙은 파랑색을 쓴다. 왜 '푸른' 밤인가. 『한국문화 상징사전』(1992, 동아출판사)에 보면 '파랑'의 상징망은 다음 같다. 먼저 〔역사, 문학〕의 영역에서 파랑은 신선함, 신비, 고향, 죽음, 그리움을 상징하고, 심리적으로는 냉정, 신비로움 등을 느끼게 한다. 다음으로 파랑은 〔신화〕의 영역에서 동쪽, 피안의 빛, 승화를 상징한다. 밤의 여로가 끝나면 해가 떠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김선두의 푸른색은 순수한 공포와 고향을 향한 그리움, 무의식과 꿈의 영역, 그러니까 현실을 벗어난 초현실의 영역을 표현하는 것 같다. 그래서 <푸른 밤의 여로>에서 시간의 흐름은 <눈길>에서 보다 약화된다. 그 약화된 시간성을 김선두는 자기 특유의 그림문자들, 그의 그림에서 시간성을 나타내는 월화수목금토일의 자음들로 복원한다. 그 자음들은 시 「푸른 밤의 여로」를 풀어서 금으로 그린(쓴) 다른 그림문자들과 함께 푸른 밤, 푸른 바다의 물비늘이 된다. 김선두 자신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자면 여로의 푸른 "달빛을 받아 빛나는 시의 물비늘"이 된다.




맑은 황토색의 <허기진 연>에는 점심 끼니를 거를 수밖에 없던 이청준의 어린 시절, 허기를 참고 한없이 날리던 연, 그 허기의 얼굴이 옛 장흥의 황토색 땅위에 떠있다. 헐벗은 옛 땅, 그것은 말간 허기의 또 다른 얼굴이다. <허기진 연>의 풍경이 현재가 아님은 분명하다. 김선두의 다른 그림 <삶으로 맺고 소리로 풀고>에는 <허기진 연>과 동일한 장소가 있다. 그 그림에서 그 땅은 다양한 색에 나무가 무성하고 밭이 많은 풍요로운 곳이다. <허기진 연>은 어떤가. 거기에 나무는 두 그루뿐이고,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맨살을 드러낸 땅에 있는 보리밭 하나, 그 밭 위에서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한 곳을 응시한다.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아들이 띄운 허공의 연에 이른다. 어머니는 연을 통해 아들을 느낀다. 화면 왼쪽에는 어머니를 닮은 큰 나무가 있고 오른쪽엔 연을 날리고 있는 형상의 작은 나무가 있다. 아들이 어린 나무라면 큰 나무는 어머니일 것이다. 어머니와 연, 큰 나무와 작은 나무의 두시선이 화면 중앙에서 만나고 있다. 화면은 비어있는 듯 보이지만 두 시선의 교차에 의해 보이지 않은 긴장감으로 충만하다. <허기진 연>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러면서도 포근하다. 어머니인 큰 나무가 팔을 벌린 듯한 형상으로 그림 전체를 감싸 안기 때문이다. 아픔과 포근함. 그것은 아마 이 그림이 그림으로서 보는 이에게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정서적 감응에서 비롯될 것이다.








김선두의 이번 그림들에는 원재료가 있다. 동향의 소설가 이청준과 시인 김영남이 고향을 노래한 작품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들은 그들의 소설과 시를 단순히 형상화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김선두가 즐겨 그리는 장지화처럼 그의 그림들은 이청준과 김영남의 문학 속으로 스미고 번져, 그로부터 새로운 의미들을 우려낸다. 새로운 장르의 예감을 주는 이 그림들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이윤옥│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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