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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온 국민화가 박수근 특별전

  • 전시분류

    개인

  • 전시기간

    2017-05-02 ~ 2017-08-31

  • 참여작가

    박수근

  • 전시 장소

    경주솔거미술관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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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개요
전  시  명 신라에 온 국민화가 박수근 특별전
장      소 경주솔거미술관 (경상북도 경주시 경감로 614) 
일      시 2017. 5. 2 (화) – 2017. 8. 31(목) (총 122일간) 
주      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재)가나문화재단
총      괄 윤범모 전시총감독
오  프  닝 미정
출품  작품 유화, 드로잉, 판화 탁본, 옵셋 판화 등 약 100여점


전시 내용

 가나문화재단과 경주솔거미술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은 세 기관의 공동주최로 향토적이고 소박하며 가장 한국적인 작가로 평가 받는 국민화가 박수근[朴壽根, 1914-1965] 화백의 전시를 개최하고자 한다.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한 박수근 화백은 진학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고, 작가가 이룩한 회화 세계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을 가장 잘 표현한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박수근은 생전, 신라 문화에 관심이 많아 자주 경주를 왕래하였고, 특히 경주 남산의 자연풍경에 심취되어 화강암 속 마애불과 석탑에서 본인만의 작품기법을 연구하였다. 신라토기와 석물조각들을 탁본하고, 프로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화강암의 질감을 구사해 입체감을 부조(浮彫) 시킨 방법들이 작가 자신만의 예술적 모태가 되었다.

박수근의 유화 작품 중 작품 표면에 나타나는 거칠고 까끌한 마티에르의 질감표현은 판화, 드로잉, 탁본 등 대부분의 장르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독특한 질감 형성을 위한 숙련과정이 경주에서 이루어 졌으며, 작가가 남긴 탁본과 프로타주가 이를 표현하고 있다.

이에 3자는 이번 <신라에 온 국민화가 박수근 특별전>을 통해, 독자적인 작품 기법을 확립한 화가 박수근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미학의 근본을 둔 도시, 경주 현지에서 박수근의 예술적 혼과 흔적을 찾고 작가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금강역사,27x20cm,Oil on paper 1954



박수근 (朴壽根, 1914-1965) 
1914 2월 21일(음력 1월 28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현재 양구읍) 정림리에서 박형지와 
윤복주의 1남 3녀 중 삼대 독자로 출생

1927 (13세) 강원도 양구공립보통학교 졸업 
1935 (21세) 어머니 유방암 별세. 아버지 금강산 칩거. 본격적 미술독학 
1940 (26세) 금성 감리교회에서 김복순(18세)과 결혼
평남 도청 사회과 취직, 평양 이주
1942 (28세) 첫 아들 성소成沼 출생
1944 (30세) 첫 딸 인숙仁淑 출생
1945 (31세) 8.15 해방. 금성에서 중학교 미술교사 부임 
1947 (33세) 차남 성남成男 출생
1948 (34세) 장남 성소 뇌염으로 사망
1949 (35세) 3남 성인成仁 출생
1950 (36세) 6.25전쟁 단독 월남, 3남 성인 사망
1952 (38세) 공산치하의 금성에서 처자 월남하여 극적 상봉 
1953 (39세) 막내 아들 성민成民 출생
미군 CID(범죄수사대)와 미8군 PX(현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초상화 화가 생활, 창신동 가옥 마련
1963 (49세) 과음으로 신장과 간 악화, 백내장 재수술과정에서 한쪽 눈 실명
1965 (51세) 간경화와 응혈증 악화로 5월 6일 새벽 1시 사망 

개인전 
1962 개인전 (오산 주한미공군사령부)
1965 유작전 (국립중앙공보관)
1970 유작 소품전 (현대화랑)
1975 박수근 10주기 기념전 (문헌화랑)
1985 박수근 20주기 기념전 (현대화랑)
1995 박수근 30주기 기념전 (갤러리현대)
2002 한국의 화가 박수근전 (갤러리현대)
2002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개관전 
2003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 
2005 박수근 40주기 기념전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2010 박수근 45주기 기념전 (갤러리현대) 문화체육관광부 후원
2014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가나인사아트센터)
2017 신라에 온 국민화가 박수근 특별전 (경주솔거미술관)

단체전 
1932 제11회 조선미전(朝鮮美展) 서양화부에 첫 입선 
1936-39 제15-18회 조선미전 입선 
1941-43 제20-22회 조선미전 입선 
1940-44 ‘주호회珠壺會’ 동인전
1953-56 제2-5회 국전國展 서양화부에 입선
1955-56 대한미협전
1958 동서미술전(샌프란시스코),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
한국현대회화전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
1959-64 제8-13회 국전
1961 국제자유미술전 (일본 도쿄) 
1962 박수근 특별초대전 (주한미공군사령부(USAFK) 도서관)
한국현대미술전 (마닐라)
1965 제14회 국전 유작 전시

기타
1955 대한미협전 국회문교위원장상 
1980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추서 받음
2002 문화체육관광부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
1990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비봉공원에 동상 세움
2002 강원도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개관



풍경,17x30cm,Oil on hardboard 1960s





<신라에 온 국민화가 박수근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윤범모 /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전시총감독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 어록中)

경주 솔거미술관에서 여는 ‘신라에 온 박수근’ 특별전은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영남지역에서 본격적인 박수근 전시도 처음이지만,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의 소장품 관외 전시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박수근을 두고 ‘국민화가’라고 부른다. 달리 표현하면, 한국 최고의 화가라는 뜻이다. 박수근 그림은 고향의 이야기 같고 또 어머니의 모습 같다. 그래서 한국인은 박수근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는 

박수근은 6.25 전쟁 시기에 월남했다. 때문에 전쟁 이전의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실향민으로서의 서울 생활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그는 전후 복구기에 어려운 생활을 꾸려가면서도 주옥과 같은 작품을 그렸다. 본격적인 제작생활은 기껏해야 10년가량에 불과하다. 궁핍함은 그의 일상이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눈이 멀어도 병원비조차 제대로 조달할 수 없었다. 미술시장이 형성되기 이전, 당시의 화가생활은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 그래도 몇몇 눈 밝은 외국인들이 작품을 사주어 전업화가의 길을 고집할 수 있었다. 

박수근 작품의 특징은 캔버스의 화면 질감과 특정 소재에서 찾을 수 있다. 회색조의 우툴두툴한 화면 질감은 화강암의 느낌을 자아낸다. 석조 마애불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다. 이런 화면 바탕에 선묘(線描) 중심으로 대상을 단순하게 처리했다. 무채색의 화면과 거의 직선에 가까운 선으로 단순하게 표현된 소재들은 박수근 화풍의 특징이다. 이와 같은 기법은 ‘박수근표’로 특화시킬 수 있다. 그런 화면 바탕에 박수근은 도시 변두리나 농촌의 정경을 소재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았다. 생활을 담보하고 있는 아낙네들은 내일을 기약하게 한다. 박수근 그림 속에는 노동력이 있는 청장년층의 남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전쟁 이후의 가장(家長) 부재 사회를 암시한다. 물론 <청소부> 같은 예외는 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낙네 이외에도 노인이나 아이들이 주종을 이룬다. 바로 전쟁이 할퀴고 간 사회의 단면을 말한다. 더불어 박수근은 나무 그리기를 좋아했다. 나무 가운데도 나목(裸木)을 그렸다. 박수근표 나무는 심하게 절지(折枝)되었거나 굽어 있다. 정상 발육된 수직적 나무가 아니다. 굴절과 갈등 그리고 절단으로 나목의 표정이 새겨진다. 게다가 이파리 하나 허용하지 않는 싸늘한 겨울 풍경이다. 이는 당시 궁핍한 사회의 표상이다. 얼마나 궁했으면 나무에 푸르른 이파리 하나 허용되지 않았는가. 색깔도 없고, 이파리 하나도 없는 나무, 박수근은 이런 풍경을 정감 어리게 표현했다. 곧게 자라지 못한 나무, 그 곁에 광주리를 이고 걸어가는 아낙네의 정경은 바로 우리 민족의 어려웠던 시절의 정서를 상징한 도상이다.

왜 신라에 온 박수근인가. 박수근은 신라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우리나라의 석조미술품에서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석탑이나 석불을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화실에서 화강암 조각을 어루만지면서 의도적으로 바위의 질감을 표현하려고 한 그의 노력은 박수근표 질감을 탄생시켰다. 이런 질감의 원형은 바로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와도 연결된다. 실제로 박수근은 경주를 답사하면서 신라문화를 연구했고, 그것의 구체적 증거는 그가 직접 찍은 탁본에서 보여진다. 박수근은 경주에서 손수 찍은 탁본을 미국인 애호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현재 박수근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박수근의 탁본과 프로타주 작품 60여 점은 경주와의 연관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는 신라에 온 박수근의 상징적 흔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박수근 예술의 원형과 그 표현방법은 신라문화와의 친연성과 더불어 신라의 석조미술과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 경주에서의 박수근 특별전은 박수근 예술의 새로운 해석의 길을 열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명작은 다양한 각도에서의 해석을 가능하게하기 때문이다. 신라문화와 박수근 예술, 이 같은 연결고리에 대한 본격적 탐구 여행, 이제 출발하고자 한다. 



좌판,19x24cm,Oil on hardboard 1960s



박수근 특별전의 경주 개최에 붙여

김형국 / 가나문화재단 이사장

‘국민화가’ 박수근 
현대한국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는 박수근이 제일 앞자리일 것이다. ‘국민화가’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애칭이 붙게 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 사람이 겪었던 전(前)시대의 정서를 생생하게 그려보여 주었음이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불과 반세기전에 절대가난의 농촌시대를 겪었고, 뒤이어 민관이 합심했던 덕분에 나라가 고도성장하는 산업시대에 접어들었던가 하면, 어느새 컴퓨터, 스마트폰이 일상생활을 압도하는 정보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 이전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했다. 19세기말에 세워진 철제(鐵製) 에펠탑이 그랬다. 그때 쇳덩어리가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아오르자 유명 문필가 모파상은 시내를 걸을 때도 그게 안 보이는 골목을 찾아 걸었을 정도로 혐오 조형물이었다. 

그랬던 것이 정보시대로 접어들자 이전의 산업시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프랑스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랜드마크로 우뚝 솟았다. 마찬가지로 현대한국도 고도산업사회로 진입하자 농촌 그리고 그곳 자연환경에 대한 그리움이 폭발하고 있음인데, 명절 때 메어터지는 귀성행렬이 그 지경을 잘 말해준다. 

박수근 그림은 바로 절대가난의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현대인들이 살만해지자 그 시절의 가난까지도 추억으로 삼는다. 멀쩡한 도시사람이 절대가난 보리고개의 상징인 보리비빔밥을 먹고 희희낙락하듯, 지난 시대의 생생한 기록인 박수근의 그림에서 친근감,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

박수근 그림의 사회적 발언
그림 자체로도 이 시대의 애호가들에게 교육이 되고 있음은 박수근 그림의 매력이다. 지금의 미술교육은 어떤지 몰라도 내같은 구세대가 배웠던 그때 미술교육은 신라화가 솔거(率居)의 신화가 핵심 골자였다.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에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를 강조해주었다.

현대에도 여젼히 극사실(極寫實)그림은 유효하다. 그러나 이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이란 화가의 대(對)사회적 발언이고, 그래서 화가의 의도가 강조되는 만큼 그림에 추상주의가 대폭 도입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그림은 실재를 그대로 그리는 사실(寫實)만이 능사가 아니라 화가의 뜻이나 감정을 그리는 사의(寫意)가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한 덕목이 되는 시대에 진작 접어들었다. 그런 점에서 박수근 그림은 바로 사실이 아닌 작가의 인생관, 세계관, 미술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매체가 되고 있다. 

그림이 뭐냐를 두고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갖고 있다.”했다. 그렇게 애호가들, 나아가서 국민들의 정서 순화에다 그림의 뜻을 크게 두었으니 그래서 국민화가라 부르는 것이다. 

한국인 자존심을 그렸다
나는 박수근을 볼 때마다 그림 속의 서민들이 비록 가난하고 남루한 그 갈피에서도 자존을 지키려던 주인공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좌판(坐板)을 앞에 두고 앉은 여인들을 그린 <소금장수>, <시장사람들> 같은 박수근 그림을 볼 때마다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일화가 생각나곤 했다. 

정릉에 살 때라 했으니 1980년 이전 일이었다. 외출했다가 귀가 길에서 살펴보니 참외를 몇 개 올려놓은 좌판과 노파가 있었다. 그걸 사려다가 다시 바라보니 과일 신선도가 떨어진 것 같아 단념하고 돌아서다가, 고쳐 생각하니 참외 몇 개로 호구지책을 삼는 노파가 안타까웠다. 그 길로 되돌아가서 몇 개 담아 달라 했다. 
노파는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일없다”며 팔지 않는다고. 

그렇다. 가난은 불편할 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했고, 남의 동정을 사면서까지 억지로 참외를 팔 심경이 아니라는 나름의 자존심 표출이었다. 자존심 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질 수 없었던 작가가 그 노파의 거동을 높이 사면서도 한편으로 남의 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했음에 대한 자괴심으로 가슴아파했다. 

문학도 박수근 미술을 빛냈다 
박수근이 국민화가로 추앙받는 데는 한국문단의 여류로 이름이 높았던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소설 『나목(裸木)』도 한몫했다. 가정주부로 있다가 뒤늦게 1970년 <여성동아>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그 길로 작가와 화가의 이름을 함께 끌어올린 ‘문화예술계의 일대사건’이었다. 생전에 한 번도 가진 적 없었던 개인전이 유작소품전이란 이름으로 처음 열린 것도 소설이 나왔던 1970년이었다. 우리 시대 대표 화랑 ‘현대화랑’의 창업 기념 전시였다. 

나중에 말했던 작가의 집필 변은 이랬다. “한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놓지 않으면 견디어낼 수 없었던 일사후퇴후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 취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도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미술이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을 만난 것은 굳이 견주자면 후기 인상파 거장 폴 고갱의 일대를 소설로 옮긴 영국 작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와 한 계열이라 하겠다. 고갱과 박수근이 둘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음을 기억한다면 타고난 화가라는 사실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림 임대가 쉽지 않았던, 그래서 귀한 전시
그 사이 좋은 전시회는 하나같이 서울 중심이었는데 이번에, 신라 천년의 수도이긴 했어도 지금은 지방도시 하나에 불과한, 경주에서 박수근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은 지방문화발전을 위해서도 참 뜻 깊은 거사가 아닐 수 없다. 
경주에서 박수근 전시회가 열리게 된 데는 단지 신라 고도라는 역사성 때문만이 아니다. 박씨 성의 많은 종파가 모두 계림의 박혁거세로부터 비롯했다는 점에서 뿌리 찾기의 전시회라고 말한다면 이 나라가 씨족사회에서 벋어난 지 언제인데 그런 말을 하느냐는 핀잔을 들을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박수근 작가의 작품성향 구축에서 신라의 돌조각 문화가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작풍(作風)의 근거지로 그의 예술적 성과가 귀향한다면 경주시민의 자부심은 말할 것 없고 박수근에게 새삼 그 공덕을 돌리는 경배(敬拜)라고 생각한다. 

박수근은 신라의 문화에 매료되어 불탑과 불상이 즐비한 남산도 올랐다 한다. 거기에 신라 석공이 떡 주무르듯 했던 돌조각이 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돌피부가 “바람에 닳기고 비에 씻겨나간” 풍마우세(風磨雨洗)로 말미암아 아주 독특한 표면효과가 되었음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그림 바탕으로 삼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걸 미술전문용어로는 프로타쥬(frottage)기법이라 한다지만 내 생각은 그 당시 그의 형편에 경주 나들이 여행이 만만치 않을 터였음에도 오갔다는 사실이 경주의 돌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을 크기를 잘 말해준다 싶다. 

이번 행사는 참 귀한 전시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작가의 그림은 엄청난 시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소장자에게서 그림을 빌린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치사 같은 말이지만 가나문화재단의 모체인 가나화랑이 오랫동안 작품을 직접 거래해왔고, 이 연장으로 소장자들과 함께 좋은 인연을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번 전시는 가나문화재단의 설립취지가 미술문화의 소외지대에 대한 배려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성사된 일이다. 여기에 경주 솔거미술관 그리고 양구 박수근미술관이 공동주최자로서 참여했다. 덕분에 이처럼 귀한 전시회가 개최될 수 있었다. 두루 감사할 일이다. 


무제,31.5x25.5cm,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19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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