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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드 자키 안와르: 내 그림자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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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here To Go, 2017, Watercolor on paper, 41 x 91 cm, 3 panels



내 그림자의 그림자(My Shadow’s Shadow)전
아흐마드 자키 안와르(Ahmad Zakii Anwar)
말레이시아, 1955~현재
백아트 갤러리 삼청동, 서울
2018년 4월3일 ~ 4월28일

주 최 백아트 서울(BAIK ART, Seoul)


말레이시아의 국민화가로 불리는 아흐마드 자키 안와르(AHMAD ZAKII ANWAR)의 대표작품들이 한국을 찾는다. 백아트(BAIK ART, 대표 수잔 백)는 오는 4월3일부터 4월 28일까지 서울 삼청동에 위치한 백아트 갤러리에서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아흐무드 자키 안와르의 개인전 ‘내 그림자의 그림자(My Shadow’s Shadow)’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무슬림이면서도 종교에 편향되거나 현대미술의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25년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꾸준히 지켜오고 있는 자키 안와르의 첫 한국 개인전이다. 자키 안와르는 인체의 누드, 종교적으로 금기시되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소재로 작업한다. 또한 예술이라는 여정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굴하며 이를 그려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페인팅 작품 15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자키에게 있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그의 예술적 여정의 지표가 되었다. 그의 끝나지 않은 여정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구독했던 <라이프(LIFE)>지에 실린 한 르네상스 시대 거장의 누드화를 통해 미술에 대해 알기 시작했던 것부터 시작한다. 학창 시절 종교적,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해 과감히 의문을 제기해온 그의 이런 성향은 그의 작업에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이슬람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힌두교의 신, 혹은 돼지를 그리는 것처럼 저항적이면서도 순수하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들, <말 할 게 없다 Nothing To Say>, <볼 게 없다 Nothing To See>, <갈 데가 없다 Nowhere To Go>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얼굴은 모두 담배 연기로 가려져 있다. 작가에게는 담배에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1995년 싱가포르에서 친구의 차를 빌려 운전하면서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친구와 크게 싸운 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후로 <고마운 흡연 1, 2 Thank you for smoking>, <익명 Anonymous>이라는 작품이 탄생했고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연 작인<흡연자들 The Smokers>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가 그린 마지막 수채화는<Nothing to See>이다. 세 개의 화면에 각각 그려져 있는 담배 연기로 얼굴이 가려져 있는 남자의 모습과, 성냥개비, TV는 일종의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성냥개비는 마치 화살표처럼 사물과 인물을 매개해 주는 중간역할을 해주 는 동시에 불을 매개한다. 탈 것이 없다면 불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연결시켜 준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다. 타버린 성냥개비가 갖는 은유는 이 연작을 해석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자키는 “미술가는 산파(midwife)와 같으며, 이미지는 이미 그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가 해야 할 일은 그 이미지를 구슬리고 달래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그리는 모든 이미지는 내면성(interiority)를 암시하며, 그가 단서나 의미를 찾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탐색을 행하는 곳에 존재한다. 이렇듯 그에게 그림은 일종의 시각적인 일기로서(a visual diary) 인생을 살아가며 그의 생각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그의 신념, 삶에 대한 이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슬람 종교를 가진 신도로 살면서 “신을 알기 전에 예술을 통해 내면을 들여 다보고 자신에 대해 먼저 탐구하고자 (Know yourself before you getto know your God.)” 하는 아흐마드 자키 안와르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I Am Not Home, 2017, Watercolor & acrylic on paper, 41 x 91 cm, 3 panels



아흐마드 자키 안와르(Ahmad Zakii Anwar)는 1955년 말레이시아의 조호루 바루(Johor Bahru)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살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자키는 중학교 졸업 후 마라 예술디자인 학교(MARA Institute Technology Malaysia)에 입학했다. 자키는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작가 캐리어를 시작했고, 이 당시 제작한 광고 그래픽들로 인해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자키는 디자인에서 순수미술(Fine Art)로 작업을 전환했고, 세계적으로 그의 명성을 쌓아나가게 되었다. 자키의 작업은 초기에, 목탄에서부터 오일까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극사실주의(photo-realism) 정물화와 초상화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자키는 도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자신의 캔버스에 도입하면서 컨템퍼러리 작가로 변신했다. 그는 단지 도시 자체에 대한 모티프와 도시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에 숨어있는 심리적 측면과 영화적인 특성을 포착해서 미술로 표현해 낸 것으로 추앙받고 있다. 자키가 아이콘이나 기호 및 우화들을 그의 작품에 사용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도시생활의 영적 또는 형이상학적 측면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그의 작품세계의 특징이다.




Faith & Doubt, 2017, Watercolor, charcoal, acrylic & colour pencil on paper, 61 x 107 cm, 4 panels




먼저 <말할 게 없다>를 보자. 둥근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전화기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가운데 막 사용한 성냥개비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을 보는 나의 시선은 습관적으로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수평적 이동을 한다. 세 개의 화면이 한 눈에 포착되므로 시선의 방향은 상관없을 수 있다. 그런데 전화기는 왜 저기에 놓여 있을까? 그것은 과연 울리기나 하는 것일까? 전선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언젠가는 반가운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올지 모른다. 그런데 오른편의 남자는 왜 담배를 피우며 전화기가 놓인 방향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을까? 게다가 그의 얼굴은 담배연기에 의해 가려져 있다. 연기는 이 인물의 얼굴은 물론 표정조차 숨기고자 하는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일종의 위장막일 수 있다. 이 위장은 화면 속 남자의 성격과 감정 상태를 숨기는 장치이자 그의 고립을 강화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내게 일종의 심리적 풍경으로 비쳐진다. 사실적인 재현에 충실하지만 가라앉은 색조에의해 고립과 단절이 강조되고 있는 이 작품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이 작품 가운데 놓인 저 성냥개비,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대상 사이에 놓인 이미 타버린 성냥개비의 역할이 궁금해진다. 이 성냥은 전화기와 연기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인물을 매개하고 있는가, 아니면 두대상 사이의 분리를 확정하는 오브제인가.

작가노트에 따르면 담배에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고 한다. 1995년 싱가포르에서 친구의 차를 운전할 때 무심결에 피운 담배 때문에 나중에 그 친구와 격렬하게 싸운 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1995년에 제작한 <익명>을 보면 두 남자가 서로 방향을 달리한 채 흡연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배경을 거의 모노톤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인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어린 시절 봤던 영화로부터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부여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의 영화에서 두 인물이 서로 대결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만드는 여백, 즉 심리적 긴장을 유발하는 빈 공간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 인물 사이에는 마치 영화의 시퀀스처럼 어느 정도의 시간이 존재하며 그 시간의 흐름 가운데로 서사(narrative)가 틈입한다. 말하자면 이 빈 공간은 그냥 텅 빈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거주하는 장소인 것이다.

2017년에 그린 <담배 피우는 남자>는 홀로 서있거나 소파에 앉아있다. 이 인물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가 하면 프레임을 꽉 채우고 있기 때문에 앞의 <익명>에서와 같은 서사가 거주할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화면으로부터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다른 화면으로 밀려나며 새로운 서사구조를 형성한다. 전화기, 텔레비전, 벽에 걸린 셔츠, 닫힌 문은 모두 말하기, 보기, 휴식, 은폐나 자기보호를 연상하게 만든다. 담배연기에 가려진 각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향해 응시한다. 그 응시하는 눈은 외부세계가 아니라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이 모델을 동원해 그린 것이라고 할지라도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앞에서 이 작품들에 대해 심리적 풍경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화면의 가운데 놓인 성냥개비는 사물과 인물 사이를 매개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분리시키는 틈을 암시한다. 매개는 사물과 인물 사이에서 일어난 또는 일어날 것같은 사건에 대한 상징적 연상을 의미하며 이 매개에 의해 작품은 서사구조를 형성한다. 이 경우 성냥개비는 놓인 위치에 따라 마치 화살표처럼 사물과 인물을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세 개의 화면이 하나의 은유에 의해 연결되면서 작품은 문학성을 획득하지만 동시에 제한된 이야기에 갇힐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냥개비를 사물과 인물을 분리시키는 틈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야기 속에 갇히도록 만드는 함정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시선을 교란시키는 장치인 것이다.

이 틈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아래(infra)와 얇음(mince)이란 단어를 결합해 만들어낸 개념인 ‘앵프라맹스(inframince)’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미세한 차이를 의미한다. 뒤샹은 “앵프라맹스에 대해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예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예컨대 이것은 물리적 차원에서의 매우 얇은 막이자 틈이며 또한 그림자의 두께이기도 하다. 이 틈은 상상이 형성되는 가상의 장소이자 열린 잠재성의 영역이다. 따라서 닫힌 문과 뒤돌아선 남자 사이를 수평으로 연결하는 성냥개비는 <나는 집에 없다>는 제목에서처럼 부재를 지시하거나 암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 대해 상상하기를 유도한다. 너무나 얇기 때문에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심리의 층위가 불현듯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영역에 위치한 성냥개비는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연상의 경계를 해체하며 우리의 습관적인 해석조차 해체한다. 말하자면 <내 머리 속에 누군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에서 7개의 조약돌을 그리스도교의 천지창조, 일주일, 북두칠성 등과 연결시키는 것이 습관적인 해석이라고 한다면 그 관계를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앵프라맹스가 비로소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대부분의 재현은 유사(resemblance)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즉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원본과 복제의 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similitude)의 원리는 복제들 사이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해석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글에서 제기한 유명한 주장이기도 하다. 성냥개비를 닮은 형상은 성냥개비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성냥개비는 재현의 공간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 위에 부유하고 있다. 그것은 <혈족(Bloodlines)>에서의 8마리의 벌이나 <내 머리 속에 누군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에서의 7개의 조약돌처럼 원본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이다.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열등한 가짜가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잠재적 존재이다. 실재와 가상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들게 만드는 것은 시선이 아니라 응시하는 눈이다.

성모마리아와 인도신화 속의 신상(神像), 삭발을 한 채 머리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그린 <믿음과 의심>은 종교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시선에 의해 포착된 일차원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시선 너머에 응시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저 띠는 무엇일까. 그것은 왜 흑백의 공간을 예리하게 분리시키는 것일까. 명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는 이 인물은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반복적인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와 같은 존재일까.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돌덩어리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노고를 인간의 삶에 비유한다면 그럴 수 도 있다. 이럴 때 작품은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며 화면 속 인물은 거울에 비친 자화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고뇌하는 자아를 가두는 영혼의 감옥이자 우리의 시선을 유혹하는 나르키소스의 연못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지가 걸어놓은 마술이나 최면에 감금되거나 빨려 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해석으로 향해 우리의 의식이 집중할수록 의미의 폭은 제한될 수밖에 없지만 화면과 화면사이의 틈, 이미지와 표면 사이의 막, 그려진 것과 여백 사이에 놓인 공간, 한없이 얇도록 압축된 표면에 놓인 두께에 대해 질문할 때 이 작품들이 재현 너머의 많은 것에 대해 상상하도록 만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키의 삼면화 또는 사면화에서 형상이 그려진 화면 사이에 놓인 여백의 공간, 그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그냥 텅 빈 화면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재현된 이미지의 마력에 함몰되지 않고 표면의 깊이를 보도록 유도한다. 그림자는 두께를 가지지 않지만 그것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한없이 얇은 표면의 깊이에 대해 상상할 때 이 작품들이 뜻밖에도 실재와 가상, 원본과 복제의 경계에서 진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최태만 Choi Tae Man/미술평론가






백아트(BAIK ART, 대표 Susan Baik)는 로스앤젤레스의 La Cienega Blvd. 예술지구에 위치해 있다.
백아트는 미술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및 동북아시아의 미술에 오래 전부터 관심을 두어 이미 14년간 현지 작가들과 작업을 해오고 있다. 갤러리로서는 드물게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작가들과의 긴밀한 소통을 중시하여 일반 상업 갤러리와는 차별화된 행보를 걷고 있다. 2016년에는 서울에 갤러리를 열어 다국적의 소속 작가들과 로스앤젤레스의 지역 작가들이 보다 원활하게 상호 교류할 수 있도록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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