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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단색화와 미술시장

윤진섭

바야흐로 ‘단색화(Dansaekhwa)’가 뜨고 있다. 한국현대미술사의 지난한 도정에서 1970년대와 80년대를 점유한 바 있는 그것은 90년대 초반에서 오늘에 이르는 긴 시간의 침묵을 깨고 서서히 재도약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것은 마치 서가에 꽂힌 채 먼지를 뒤집어 쓴 책을 뽑아 펼쳐든 것과도 같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과연 무엇이 우리의 미술로 하여금 철지난 의상을 갖춰 입고 다시 세상을 활보하게끔 만든 것일까? 더구나 지금은 인터넷과 디지털 환경으로 대변되는 시뮬라크라의 이미지 시대가 아닌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디지털과는 정반대의 대표적인 아날로그회화 양식인 단색화가 재조명되기에 이른 것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미술시장의 수요를 넘어서 이 시대의 미술 현상에 대해 그 나름의 발언을 재개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최근의 언론 보도에 의하면 단색화가 옥션을 비롯한 해외 미술시장에서 각광을 받으면서 국내 화랑들의 단색화 작품에 대한 과열된 확보 경쟁이 나타나는 등 이상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고 한다. 한때 국내의 미술시장이 팝아트와 극사실주의 등 소위 인기상품에 편중됐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단색화에 대해 그런 쏠림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20세기 초엽, 불세출의 전위 시인이자 미술품 컬렉터이며, 동시에 당대 문화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거트루드 스타인은 “컬렉터는 같은 세대의 작가들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티스나 피카소와 같은 20세기 서구 미술계 거장들의 작품을 컬렉션하는 한편, 자신의 집을 예술가들을 위한 사교의 장으로 기꺼이 제공한 그녀의 통찰력과 문화적 마인드가 20세기 서구 모더니즘의 형성에 중요한 견인차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단색화, 관심과 우려

그렇다면 국내외 상황은 과연 어떠한가? 단색화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를 바라보는 국내 화상들의 문화적 안목이나 마인드는 피상적이며 단견에 가깝다. 심지어는 평소에 단색화에 관심을 기울이기는커녕, 한국 단색화의 기념비적 전시로 간주되는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한국의 단색화’(2012년)전을 관람조차 하지 않은 사람이 특정 단색화 원로 작가의 작품을 독점하는 등 화상으로서의 기본 자질도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어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


폭넓은 의미에서 문화, 좁게 말해서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문화예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의식의 저변에 깔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건 나의 행위가 우리의 문화예술 발전에 보탬이 된다는 자부심이야말로 고통스런 창조행위를 지속시키는 동인이다. 이는 화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상행위가 장차 우리의 미술 발전을 위한 하나의 초석이 되리라는 문화 의식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에 칸바일러가 있었고 미국에 레오 카스텔리와 같은 전설적인 화상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김문호라는 인물이 있었다. 60-70년대에 명동화랑을 운영하면서 돈이 되는 그림보다는 비상업적인 현대미술에 눈을 떠 권진규를 비롯하여 박서보, 윤형근, 하종현 등 훗날 단색화의 대가가 되는 작가들을 후원했던 그는 끝내 가난 속에 세상을 떴다. 


왼쪽 故 김문호 명동화랑 대표


단색화에 대한 화랑가의 이상 과열 현상을 지켜보면서 나는 가칭 ‘김문호 상’을 제정할 것을 건의한다. 건전한 미술시장의 풍토 진작과 발전의 토대를 위해 매년 모범이 되는 화상을 선정하여 시상한다면 우리의 미술계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모처럼 활기를 되찾은 단색화를 세계 미술사에 등재시키려면 비단 미술평론가나 미술사가들만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 아트페어나 옥션 등 미술시장에 막강한 힘을 지닌 화상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할 때 우리의 단색화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긴 행보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윤진섭(1955-) 홍익대 회화과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호주 웨스턴시드니대 대학원 철학박사. 1995 국무총리 표창, 1996 대통령 표창. 2008 제8회 하종현미술상 평론가상 수상. 호남대 미술학과 교수 역임.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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