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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선구자의 글을 다시 읽으며 : 이상과 전망과 귀한 뜻으로 지은 글은 영원하다

임근준

지난 7월 5일에, 팟캐스트 프로그램 ‘말하는 미술’을 진행하는 김동규 작가가 도움을 청하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25회의 주제가 “미술과 글쓰기”라서, 다양한 미술인들로부터 “마음을 움직인 미술계의 명문(明文)을 추천”받는 중이라 했다. 하지만, ‘명문’이나 ‘마음의 움직임’에 별 관심이 없는 내 입장에선, 다소 방향을 틀어서 요청을 재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한반도의 미술에 관한 글로서 정형된, 선구자 세대의 비전과 귀한 뜻에 감사해본 일은 적잖았기 때문이다.

유달리 기억에 남았거나, 두고두고 숙고하게 됐던 책이나 글을 크게 둘로 나눠 꼽을 수 있었다. 한 가지는, 한국미술사 연구와 한국미술의 특질에 대한 탐구와 논의에서 위대한 초석을 놓은 선구자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한국현대미술의 당대성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비평적 가늠자 노릇을 했던 선구자에 대한 것이었다.

오세창, 국역 근역서화징, 시공사, 1998


내가 첫 번째로 꼽은 책은『 근역서화징』이었다. 후대가 본격적으로 근역의 미술사 연구를 전개할 수 있기를 바랐던 오세창이었기에, 이 자료집에서 학술적 가설이나, 거창한 장광설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인’(서문에 해당)과 ‘범례’의 짧은 글을 읽노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니, 이제 나도 나이가 조금 들긴 든 모양이다.


고유섭, 고유섭 전집, 열화당, 2013


두 번째로 꼽은 책은『 고유섭 전집』이다. 그중 고유섭의「 조선 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을 추천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미론을 극복하고자 했던 고유섭의 포석은 지금 보면 어수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심은 씨앗이 김용준 등의 새로운 조선미론으로 자라났고, 더 나아가 김용준의 미론이 북조선의 주체미술론의 근간으로, 또한, 한국의 전후 모더니즘 미술의 논리로까지 활용됐다는 점을 상기하자면, 실로 황당하면서도 감개무량한 면이 없지 않다.

마찬가지로, 한국현대미술의 당대성이 배태되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한 책과 글들을 여럿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꼭 언급하고 싶었던 책 가운데 하나는 홍가이의『 현대미술·문화비평』(1987)이고, 다른 하나는 이영철의『 상황과 인식』(1993)이다.

홍가이 선생은 198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격론이 일었을 때, 속된 말로, “거의 유일하게 말이 되는 소리를 했던” 논자였다. 『현대미술·문화비평』에 재수록된 “한국 현대미술을 보는 한 관점”(본디『계간미술』 1987년 여름호에 실렸던 글)은 지금 다시 읽어도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나는 상상해본다, 동명의 제목으로, 해당 글의 형식에 화답해, 오늘의 한국/현대/미술을 진단하는 비평적 시각을 제시하는 상황을.

반면, 이영철 선생은 1980년대 후반만 해도 교조적 좌파의 논리를 따르던 평자였지만, 1989년 봄에 창립됐던 미술비평연구회에서의 활동을 거치며, 비평가로서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수정-업데이트한 바 있었다. 바로『 상황과 인식』이 그러한 개안의 성과를 총정리한 보고서였다. 지금 다시 봐도 재밌는 글은, “주변부 문화와 한국 현대미술의 아이덴티티”다.
이 글을 통해 그가, 포스트-민중미술의 성립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상과 전망과 귀한 뜻으로 지은 글의 가치는 영원하다. 도널드 프레지오시가 엮은 앤솔로지『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과 비평 40선』이 한국어로 번역돼 널리 읽히는 모습을 볼 때면, 왜 한국의 미술이론과 비평으로는 그런 작업이 실행되지 않는지 의구심을 품게 된다. 한국미술의 역사를 공부하려는 청년들을 위해,『한국미술사의 이해를 위한 예술이론과 비평 40선』을 편집-출간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 임근준(1971- , 필명: 이정우) LGBTQ 운동가(1995-2000), DT네트워크 동인 (1999-2013)으로 활동. 계간『 공예와 문화 편집장』,『 한국미술연구소/시공아트』 편집장,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등 역임.『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여섯 빛깔 무지개』(2015)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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