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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요즘 미술관 앞에서

강선학

얼마 전 대구미술관엘 갔다. ‘간송미술관’의 소장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고, 입장료를 따로 받고 있었다. 대구미술관의 입장료에 비해 현저하게 높은 가격이었다. 입구에는 간송미술관 아트상품을 파는 매장도 마련되어 있었다.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공간’이 생각났다. 미술관 마당 한 곳에 따로 마련된 독립공간이고, 이우환의 작품만 진열되어 있다. 본관은 무료입장이고 이곳은 유료다. 몇 가지 아트상품이 진열되어 있다. 어찌 보면 둘 다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 둘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다. 한 미술관 안의 다른 살림, 한 지붕 아래 두 세대가 사는 꼴이다. 가장은 한 사람인데. 게다가 이 두 공간은 본관보다 나은 대접을 받으면서 본관의 어떤 행사나 기능을 넘어서는 얼굴 행세를 한다.

이런 인상은 두 미술관 만이 아니다. 어느 미술관에 들르나 이런 무거움을 피하기가 불가피해지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명약관화하다. 미술관도 수익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고, 모든 사회복지, 문화복지마저 유료화함으로 시민에게 무상으로 주는 것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는 현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 복지정책을 서비스로, 축적과 수익성의 영역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자니 미술관의 유명 소장품이나 유명작가의 이름을 타고 대중에게 다가가려 한다. 그 미끼가 될 작가와 작품이 필요한 것이고, 이미 얻은 명성에 기대는 전략이 엉뚱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이를 차별화해서 상품화할 필요성이 생긴다.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갈등을 유발하고 그 갈등은 도리어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세계미술/한국미술, 중앙미술/지방미술, 유명 작가/일반 작가의 차이가 차별로 상품화된다. 차별을 대중에게 은연중 감염시키는 것이다.

그곳은 차이가 아니라 차별을 하나의 방법으로 선택하고 그 차별을 통해 본관과 별관을 차등화하고 특수화해서 대중적 관심을 미술관 전체의 관심으로 끌려는 의도다. 그러나 그런 시너지 효과보다 작품과 작가 평가를 차별하고 그 차별을 고착화하는, 논쟁의 예각을 간과한 느슨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치가 정치인과 대중을 차별하고 그 차별을 계급화하려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차별을 고착화해서 그것을 마치 성공한 사례로 삼으려는 위험하고 아찔한 사건이 미술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화폐는 차이 혹은 차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작품의 가치는 사유의 차이와 시대적 가치가 결합한 것이지 우열의 기준이 아니다. 작품과 작가의 시장 평가를 서열화하려는 미술관의 이런 모양은 빈부가 계급으로 굳어가는 우리 시대의 불온한 의식의 일단은 아닐까. 문화야말로 정치의 속성을 닮는다고 하지 않는가. 볼거리가 넘치는 이 시대에 미술관의 존립 이유가 무엇일까. 온갖 것이 과잉으로 넘칠 때, 과잉이 아닌 숙려의 시간과 공간, 가차 없이 상업적 생산성에서 탈출하는 그게 공공미술관 아닌가.

한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인간의 정신이 어떤 가치인지를 묻는데, 얼마를 벌었으며 몇 명이나 왔는지를 되묻는 것으로 역할과 평가를 가늠하는 대답은 오랜 장마 끝에 닥친 불볕더위 같다. 요즘 미술관 앞에 서면 이런 기분이다. 공공의 기관을 공익적 재산으로 여기면서 이윤생산의 도구로 처분하려 한다는 것이다. 공공자산을 투자재로 삼아 유락 시설화하고 이윤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초점이 있는 것 같다. 사회적인 것을 기업의 기능으로 삼으며 신자유주의가 사회를 통치하는 방법으로 개입하는 것 아닌가. 이런 형태는 “‘기업형식’을 사회체제나 사회조직 내에서 실제적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이고 미술관을‘자기-기업가’의 이미지로 시장에 방출시키는 것이다. 미술관이라는 공공자산의 가치를 너무 안이하게 취급하는 것 같다.

물론 고민은 그곳에 있다. 관람객이 너무 적은, 보지 않는 전시를 두고 정신적 가치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 탓으로 돌리는 것도, 생각 없이 시장판 같은 떠들썩한 반응을 대중에 다가간 사례로 삼기도 무엇하다. 공공자산마저 상품으로 여기는 후기 상업주의의 맹위가 사그라지지 않는 한, 그 둘 사이의 접점이나 화해의 지점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미술관의 상품화, 작가 간의 차별과 계급화는 문화적 요청이 아니다. 차이를 차별로, 부와 상품을 계급화하는 이 욕망의 참화는 미술관이라는 괴물의 ‘자기-폭로’일까.


강선학(1953- ) 부산대 미술학 석사.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 역임. 서울신문 서울문화예술평론상(1990) 수상. 『질문들』 등 다수 평론집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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