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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VR과 오래된 미학적 질문들의 만남: 새로운 매체는 어떻게 나아가는가?

고동연

* 온라인 전문게재



VR과 오래된 미학적 질문들의 만남: 새로운 매체는 어떻게 나아가는가?

문화역 서울284 ‘가상정거장’

 

고동연| 미술비평가 dykoh@yahoo.com







코로나가 장기화되자 최근 주요 미술관에서 VR관련 영상전시가 대세가 되고 있다.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공연예술처럼 전시 예약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감상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온라인 전시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VR전시는 기록이나 단순 유통 수단이 아니라 내용의 측면에서 디지털을 활용한 예술의 진일보된 형태를 보여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번 문화역284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가상정거장’은 단순히게 보자면, VR영상이 어떻게 다양한 인접 예술 장르나 분야와 만나고 있는지를 다각도에서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물론 VR이라는 특정 매체가 문화예술 분야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발전될지 그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활동사진’이 ‘영화’나 기타 영상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기존 예술매체나 장르와 어떻게 결합해가느냐에 따라 새로운 매체의 미래가 점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의 여가를 위해,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기념품의 부분으로 사용되었던 활동사진이 ‘영화’나 기타 영상물로 발전해가는 과정은 엄밀히 말해서 ‘영화’라는 매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가는 과정이었다기보다는 영화를 중심으로 여타의 매체들이 결합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보드 빌 쇼, 오페라, 1920년 재즈 클럽의 밴드 음악· 토키, 1930-40년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독일 영화산업의 기술적 발전에 힘입어 영화는 이야기·소리·음악·편집·조명의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고 이를 통하여 현대 영화언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에 필자는 VR이나 AR과 같은 매체가 현대미술·연극·건축·영화나 기타 영상 및 디지털 문화와 만나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졌다. 이번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가상정거장’에서 VR이 어떻게 기존의 예술 장르나 매체를 활용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예를 들어 절찬리에 상영된 고이즈미 메이로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VR의 몰입경험이 어떻게 관객으로 하여금 영상 속 루게릭 환자의 신체적인 어려움에 훨씬 동화되고 공감(emphatic)해가는지를 보여준다. 잘 알려진 임상실험에 따르면, 심각한 화상 환자는 VR을 사용한 몰입경험을 통해 뇌의 착란 현상을 겪게 되고 실제로 신체적인 고통이 완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VR은 관객으로 하여금 신체를 통한 공감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무심한 관객을 어떻게 몸으로 함께 느끼는 ‘공감어린’ 관객으로 변모시킬 것인가의 명제는 현대 연극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다.

건축적 공간과의 연관성을 연상시키는 서현석의 <()>로부터 퍼스널 비디오를 연상시키는 김희천의 <사랑과 영혼>, 서바이벌 게임의 양식을 취한 <에란겔: 불가능한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가상정거장’에 선보인 VR 영상들이 다루는 방식, 소재나 매체적인 특성은 신선하기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개인의 친밀한 공간, 자연, 전쟁터의 소재와 같이 평소에 잘 경험할 수 없는 광경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VR은 훔쳐보는 구멍(peeping hole)으로부터 스펙터클한 광경으로의 창에 이르기까지 카메라의 고전적인 역할과 시점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건축적 공간성, 핸드헬드 카메라에 이어 핸드헬드 핸드폰이 찍어내는 디지털 영상이 지닌 즉각성이나 침투력과 결합하여 VR이 더 강력하고 개별화된 감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VR이 기존의 장르나 매체를 훨씬 유연하게 흡수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미학적 가능성이 다방면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밍량, 폐허 ⓒ HTC VIVE ORIGINALS, Photo_Chang Jhong-Yuan


기존 매체와의 연관성 측면에서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본 영상은 차이밍량 <폐허(영어 제목 Deserted)>였다. VR 덕분에 영화에서의 편집이 지닌 의미, 영상과 관객의 관계가 한껏 달라질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거주지에서 실제 감독의 오랜 파트너이자 뮤즈인 이강생을 따라가는 차이밍량의 최근 영화들은 극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주의 영화감독 차이밍량이 대만의 버려진 외곽 지역의 거리를 통째로 거주지로 삼아서 개조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진 터라 사실과 극의 경계는 보는 이에게 더욱 혼동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폐허>를 바라보는 관객은 유명 영화감독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공간 내부로 초대된다는 데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덤으로 얻게 된다.

특히 VR은 언제든지 관객이 배우에게 등을 질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 예를 들어 주로 감독 어머니의 혼령으로 표현되는 노파가 불현듯 외부로 나가서 사라지는 동안 관객의 시선은 그녀를 쫓는 대신 유명작가가 거주하는 ‘버려진’ 공간을 탐색하는데 에너지를 쏟을 수도 있다. 덕분에 사건의 앞과 뒤를 연결해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상업영화의 방식을 부정해온 차이밍량의 영화를 더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관객이 주인공을 등질 수 있다는 것은 관객의 관심을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이나 대상에 집중하도록 구성되어온 영화의 편집방식과 필요성을 무력화시킨다. 반드시 집중해야 할 영화적 장면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차이밍량의 <폐허>에 집중한 것은 실험영화가 역사적으로 해방하고자 했던 “자유로운” 관객의 탄생이 VR을 통해 적극적으로, 그리고 앞당겨져서 구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VR은 사용자에 따라 개별화된 경험이 가능하다. 하지만 챠이밍량의 영화는 특정 장면을 마음대로 골라서 볼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영화적 경험의 구조적 위계질서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더 의미 있다. VR이 실험영화의 영상 언어를 계승하면서도 관객의 자율적인 위치에 대한 영화이론의 오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셈이다. 오래된 이야기와 새로운 수단 사이의 긴장관계, 그리고 끝없는 합종연횡(合從連衡)을 통해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이 발굴된다는 오래된 진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 고동연 
국내외 아트 레지던시 멘토, 운영위원, 비평가로 활동해오고 있으며, 최근 저서로는 『소프트파워에서 굿즈까지: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현대미술과 예술대중화 전략들』(2018)과 『The Korean War and Post-memory Generation: The Arts and FIlms in South Korea(한국 전쟁과 후-기억 세대: 한국 동시대미술과 영화)』(런던, 러틀리지, 202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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