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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랑미술 vs 공공미술

김병수

2011마을미술프로젝트를 둘러보는 아트투어를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가졌다. 2009년 심사위원 및 공공미술의 진로에 관한 발제자(「‘미학도시’에서 ‘일상의 공공미술’을 위하여」), 2010년 심사 및 평가위원으로 관여했고 그리고 세 번째에는 ‘기쁨두배 프로젝트’를 살펴보는 임무를 맡았다. 일행들과 여러 곳을 바쁘게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역시 현장의 소리는 우리 이론가들을 당혹케하는 경우가 많다. 마을미술은 공공미술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3년 이어지면서 그 나름의 진화를 이룩한 성취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 그 이전의 이른바 ‘한국적 공공미술’과는 차별화를 꾀하려는 듯하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지금쯤은 공공미술에 대한 심각하고 진지한 물음이 다시 물어져야할 것 같다. 도대체 공공미술은 어떤 미술인가? 그것은 여전히 미술이기는 한 것인가? 굳이 미술일 필요가 있을까? 유사한듯하지만 전혀 다른 성질들의 질문들이 발생한다.


혹시 순수미술을 기억하는가? 그것만이 오롯이 미술이던 시절이 있었다. 파인아트(Fine Art)가 그것이다. 이 근대의 역사적 유물은 작업실미술(Studio Art)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미술시장 환경의 변화와 함께 지금은 화랑미술(Gallery Art)이라고 개명했다. 이에 대응하는 개념이 공공미술(Public Art)이다. 둘의 변별성은 장소성인가? 작품이 보여지는 장소의 차이가 전혀 의미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미적 커뮤니케이션과 그에 따르는 경제인류학적 차원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공공미술이 기존의 미술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주장된 적이 있다. 기득권을 지닌 ‘화랑미술’ 종사자와는 다른 ‘새로운’ 공공미술의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려는 듯했다. 그 논리를 따라가면 지속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을 할 뿐 무엇이 다르고, 왜 달라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미끄럼질 속에서 다른 ‘속셈’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또 일정부분은 정치적 판단이 강하게 작동했었다. 여전히 미학은 정치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미술계가 적극적으로 정치를 사유해서 공공미술이 발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미술계라는 판을 흔들기 위해 일부러 고안된 것이 공공미술인 것 같지는 않다. 현재 화랑미술 관계자와 공공미술 관계자가 불가분의 관계이거나 최소한 전자가 여전히 후자의 영역에 간섭하는 것을 보면 둘은 분명 무슨 관계가 있다.



아니쉬 카푸어 작품사례

이때 갑자기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시카고에 설치된 작품이 떠오른다. 형태적 특성 때문에 ‘콩(Bean)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구름 문(Cloud Gate)>이라는 명제의 시카고(Chicago) 밀레니엄공원(Millennium Park) 내에 있는 스테인리스 조각 작품이 그것이다. 그의 작업은 화랑미술에 속하는가, 공공미술에 속하는가? 처음에 우려했던 조각조각 이어붙인 철판의 이음매를 완전히 없앴고 그로 인해 표면이 매끄러운 대형 거울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되었는데 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 시카고의 하늘과 빌딩 등의 배경과 보는 사람이 다른 형태로 일그러져 보여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그 가운데에는 3.7m 높이로 움푹 팬 공간이 있어 관람객이 조형물을 통과하는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 인터랙티브의 모범이다. 관람객과 조형물이 다양한 방법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여적인 예술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니멀 이후의 미니멀 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생태적인 작품이다. 생태적인 것이 꼭 산과 내의 자연만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유치하다. 도시의 환경을 비춰내는 것이야말로 현대적 생태의 한 국면이다. 또한 그의 작업은 자신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 경우 공공미술의 ‘폭력성’에 대한 우려는 많이 상쇄된다. 기념비와 같은 일방적인 강요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화랑미술과 공공미술의 관계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다 읽은 구절. “많은 작품은 그들 자신의 체계에서만 ‘더 뛰어날 수’ 있으나, 어떤 작품은 그들의 미학적 경계를 초월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그리스올드의 문화 권력 개념을 끌어와 다음과 같이 제안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 즉 서로 다른 체계에 한정되지 않는 다채롭고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작품일지도 모른다.”(빅토리아 D. 알렉산더, 『예술 사회학』, p.553)



김병수(1963-) 홍익대 미학과 석사. 미술평단 평론상 수상.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출판위원장 역임. 현 경기대 미술디자인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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