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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자기표절(Self-Plagiarism) | 김성호의 미술계 팩션(2)

김성호

20대, 남, 설치미술

멘붕이다! 군대를 다녀와 대학 졸업을 간신히 하고 현장에 나왔더니, 그동안 만화만 줄곧 그려대던 후배 삼순이가 기업과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으로 한 방에 떠 있었다. 전시현장은 물론이고 이곳저곳 아트페어에 불려다니느라 잠잘 틈도 없단다. 게다가 성형으로 연예인 닮은꼴을 하더니 미술잡지보다 대중문화잡지에 단골로 등장 중이다. 기자들 왈, 얘가 60년대의 팝아트를 한국 스타일로 재해석한 미술계 샛별이라나? 패러디 만화 안에 한국 위인들 구겨 넣는 시리즈를 무수히 배설하듯이 만든 것을 보고 일부 평자들은 ‘현대 속 전통’을 냉소적 시선으로 재해석한 이 시대의 통렬한 비평적 작업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아! 그동안 전념해왔던 설치, 퍼포먼스 같은 돈 안 되는 작업들을 때려치워야 하나? 도대체 난 무슨 시리즈물을 만들어야 할까? 젠장! ‘맨땅에 헤딩’일세. 고민 중. 

 

30대, 여, 미술비평

평론가라고 잘난 척하는 한 선배의 거들먹거림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해서 나도 이 길에 들어섰는데, 요즘에 그를 지켜보는 내 상태가 ‘심란’ 그 자체이다. 나로선 전시비평 하나 쓰는 것도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그 선배는 무슨 ‘글 쓰는 기계’인가? 그런데 아는 사람은 안다. 그가 이 잡지, 저 잡지에 쏟아내는 비평들이 비평 대상만 다를 뿐, 했던 말 다시 써먹기와 자기표절의 무한 반복임을 말이다. 게다가 벤야민과 프리드를 왜 그리도 들먹대는가? 그런 그가 최근 아기 분유값 걱정으로 자기 논문 이리저리 잘라서 석사논문 대필을 몇 번 해주고 검은 떼돈을 벌더니만, 최근에는 비평계를 활성화시킨다며 온라인에 너절한 글들을 올리고 댓글로 블로거들과 쌈질하느라 정신없다. 다른 선배들은? 정도만 다를 뿐 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순수를 앞세우지만, 최소한의 윤리마저 사라진 이곳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최근 나는 아예 비순수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영화비평으로 전업할까 고심 중이다. 

 

40대, 여, 전시기획

요즘 미술계가 힘들다고 난리인데, 뭐 꼭 그렇지만도 않다. 미술시장이 얼어붙으면 정부가 돈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문화예술 프로젝트에 지원해 ‘눈먼 돈’을 찾아 먹는 일에서는 나는 이제 선수가 되었다. 대개는 소외 지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커뮤니티아트가 답이다. 이러한 기획에 뭐 특별한 게 있나? 그동안 기획 건으로 구축해놓은 자료에다 동문이 운영하는 컨설팅회사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들을 짜깁기하니 일주일 만에 400페이지 분량의 멋진 기획서 하나는 뚝딱 나온다. 게다가 정부나 지자체가 벌이는 엑스포나 한류 관련 프로젝트에 입찰하는 업체들에 전문가로 투입되어서 짜깁기 기획서 몇 번 내밀고 받는 돈도 쏠쏠하다. 게다가 입찰에 성공할 때 성공 사례비로 챙기는 몫이란 거의 대박 수준이다. 그런데 어제 기획자 모임의 동료 하나가 내게 딴죽을 건다. 기획서 짜깁기를 언제까지 할 거냐고..., 아! 짜증 나. 

 

60대, 남, 회화

대학 정년퇴직 이후 작업시간이 늘어나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론 고통스럽다. 지난한 노동으로 신체의 흔적을 남겨온 내 작업들이 이제 부쩍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나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 그간의 내 작업을 송두리째 매도한 한 평론가의 글을 보게 된 것. 내가 자기표절로 작업세계를 일관했단다. 그의 글에 따르면, 학자가 출전을 밝히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이전 텍스트를 재발표하는 ‘중복 게재’를 자기표절이라 하듯이, 화가인 내가 오랫동안 이전의 창작물을 ‘스스로 모방하고 중복 재생산’했기 때문에 자기표절이란다. 오랜 자기 훈련과 예술실험을 통해 오늘에 이른 내게 이러한 능욕을 하다니! 이것은 내 시리즈 작업 자체에 대한 오판일 뿐 아니라, 그간 내 모든 성과들에 대한 모함에 다름 아니다. 아니, 그렇다면 일관된 작업세계를 펼쳐온 서세옥, 김창열, 박서보, 이우환 같은 대가들의 작업들 또한 자기표절이란 말인가? 자기표절의 개념도 모르는 이 우매한 자의 비판에 어찌 슬기롭게 대처할지 목하 고심 중이다.  

 

* 이 글은 팩션(Faction)이다.



- 김성호(1966- ) DEA파리1대학 미학예술학(미학 전공) 박사. 96미술세계 평론상(1997) 수상. 모란미술관 큐레이터,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기금 심의위원 역임. 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전시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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