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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론 : 비전인가 케케묵은 이야기인가

박남걸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학창시절, 당시 미술잡지의 광고를 통해 『개자원화전』이란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재능을 담금질하고자 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변변히 전문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나는 여러 날 동안 그 광고를 읽고 또 읽었다. 특히 원로대가들의 추천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책을 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예전부터 대가들의 서재에는 이 책이 비장되어 왔으나 일반인에게는 입으로만 전해오던 동양화의 보전(寶傳)이라느니, 매우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이 책이 우리화단에 나온 것이 다행이라는 등의 추천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이 책만 있으면 그림, 특히 동양화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그릴 수 있을것만 같았다. 스승이 없어도 그림에 대한 모든 지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 책에 대한 궁금증을 이겨내기 어려워,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책을 사기로 마음먹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생의 입장에서 거금을 들여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때의 희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나는 거의 밤을 새다 시피하여 건성으로나마 꽤 두꺼운 그 책을 훑어 보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그때 적잖이 실망했던 허탈감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이때부터 나는 동양화의 이론과 정신 이른바 화론의 세계를 궁구하고 싶어했다. 하루 빨리 대학에 가서 실기와 이론 두 방면의 욕구를 채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대학에서도 이 욕구는 채워지지 않았다.(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이것은 학교 탓도 스승의 탓도 아니었다) 원전이건 번역서건 보고자 하는 책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욕구가 채워지기는커녕 그 심오한 세계는 더욱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청년시기까지의 나에게 동양예술이론은 다가가고자 해도 접근을 허용치 않는 오지와 같은 존재였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날의 학생들에게도 이러한 사정은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선 번역의 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읽고 싶고 알고 싶어도 번역된 글이 드물다. 화론의 원문을 읽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문자해독의 장벽이 너무 높다. 종종 매스컴으로부터 상식적인 한자도 쓰지 못한다는 조롱을 들어야하는 학생들로서는 한문으로 빼곡한 화론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선뜻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한문으로부터 멀어진 내력은 사실 근 100년이 넘는다. 어림잡아 오원 장승업의 시대부터 시서화 삼절의 전통은 이미 균열이 가 있었다. 오죽했으면 동양화의 6대가로 불리던 청전과 심산이 70년대 초반, 한문소양의 부족을 고백하며 앞으로 자신들의 그림에 화제를 쓰지 않겠다는 공개 발표를 했을까. 지금은 고명하신 두 분의 양식에 경의를 표하지만 어렸던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었다. 이것은 곧 화론의 전통도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또 화론이 번역되었다 하더라도 젊은 미술학도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분명 훌륭한 번역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그것은 아마 현대미술의 주제와 동떨어진 다른 영역의 것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고, 소수의 자들이 누리는 특수영역일 것이라는 소극성도 이유가 될 것 같다. 결국 절실함이 없는 것이다. 이 절실함의 결여는 아이러니하게도 화론을 해독할 수 있었던 전문가의 폐쇄적 자세에서 일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동양적이고 전통적인 것에는 뭔가 차원이 다른 깊이가 있다는 자부심과 자존심을 갖는 것은 허물 할 일이 아니지만, 아무나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이기적 자존심은 적당치 않은 것이다. 화론이 일상적 사유와는 다른, 특히 서구의 정신과는 차원과 경계를 달리하는 고상한 그 무엇쯤으로 여겨지게 하는 데는 성공적이긴 하겠으나 결국 이러한 자세는 그들만의 리그로 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다.


‘전통’, ‘민족’, ‘동양적’, ‘한국적’등의 수식어가 붙는 영역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우리에게만 있다’, ‘서구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거다’라는 등의 말들은 대부분 거짓말이다. 만약 거짓이 아니라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 ‘우리문화의 세계화’라는 구호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문화는 독점보다는 공유할 수 있을 때 빛나는 것이며, 폐쇄적일 때 보다 개방적일 때 생기가 도는 법이다.


화론은 진화해야 한다

<취화선>이라는 영화 속에서 장승업은 ‘일획이 만획이라’는 석도의 화론을 말한다. 실제로는 장승업이 이런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회사후소’, ‘기운생동’, ‘골법용필’, ‘해의반박’ 등등 화론 속에는 생소한 용어들이 많다. 그리고 그 용어의 해석을 놓고 전문가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다. 생소하거나 비일상적인 어휘들이 많은 것이 어디 화론뿐이겠는가. 모든 전문적 글들 속에는 이른바 전문용어들이 가득하다. 미학, 예술철학, 미술사 등의 글속에도 선승의 화두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용어들이 수두룩하다. 문제는 소통이 되느냐의 여부이다. 소통이 된다면 어려워도 흥미를 유발하며 이해하기 위해 애를 쓴다. 소통과 이해가 반복이 된다면 내용이 풍부해지고 깊어진다. 모든 유용한 문화는 그렇게 존재해왔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소통이 되려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화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절실함은 현재의 삶에 기초한다. 지금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화론 역시 그 절실함의 기록들이다. 공자와 노자, 장자, 종병과 사혁, 소동파의 글들과 『역대명화기』, 『필법기』등등의 것들은 모두 그들이 살았던 그때 현재의 절실함을 글로 남긴 것이다. 다만 ‘그때’의 절실함이 ‘지금’시효를 다한 것도 있고 ‘지금’까지 유효한 것도 있을 뿐이다.


모든 이론서가 그렇듯이 화론 역시 창작에 대해 언제나 사후적이며 예술가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론 속에는 가치 있는 정보들이 숨 쉬고 있으며 현재와 소통시킬 각성된 눈을 기다리고 있다. 화론은 비장의 보전도 아니고 폐기된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의 삶에 조응하지 못할 때는 박제화 될 것이고 교감을 하며 끊임없이 논의의 중심에 설 때 생동하는 담론으로 진화해 갈 것이다.



- 박남걸(- ) 세종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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