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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김인혜


퐁피두센터의 신선한 그림 : 작가들의 아틀리에
(2008, Peinture fraîche : ATELIER DES ARTISTES)전 키즈스튜디오(세부), 
Stéphane Carricondo/Ned/Jerk45/Mambo 2008 ⓒ Landry

올 것 같지 않던 2015년이 왔다. 1년 중 한번 오는 1월, 뭔가 새 마음 새 각오를 다져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드는 때이다. 그런데 나는 왠지 ‘새로움’이라는 말이 점점 싫어진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드니 더 ‘보수적’으로 변하는 탓일까. 지난 학기 어느 대학에서 미술 실기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들과 수업을 가진 적이 있다. 미술관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이론전공자들의 수업을 가끔 맡았을 뿐 ‘실기생’들을 접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작가가 되려는, 적어도 미술과 관련된 일을 계속해 보려는 의지를 지닌 이들과 토론 및 1:1 면담을 진행하면서, 이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극도의 강박증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실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작품은 도대체 새롭지가 않았다. 무엇이,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과, 그런데도 전혀 새롭지 않은 현상을 낳는 것일까. 그것이 나의 질문이었다. 

한국의 20세기 미술사는 세계의 역사 흐름과 잘도 들어맞는다. 제국의 시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한국의 예술가들은 20세기 초 서양의 모더니즘을 일본이라는 채널을 통해 배웠다. 이후 제국의 끝을 드러낸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일제 치하였던 한국은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는 전후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전장(戰場)으로 등장했다. 남쪽에서는 열심히 새로운 시대 즉 ‘현대(現代)’를 외치며 현대미술관, 현대화랑, 현대자동차, 현대유치원, 현대반점 등이 들어섰다. 과거의 시대를 잊어라. 이제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세계와 발맞추어 앞을 향해 전진하자! ‘ 추상’과 ‘실험’으로 대변되는 이들 작품에 ‘아방가르드[전위:前衛]’라는 단어가 따라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실로 싸우는 기분으로 앞을 향해 내달렸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북쪽에서는 미술 자체의 자율성을 부정하며, 미술의 사회적 기능을 그 목적이자 존재근거로 두었다. 미술은 인민을 계몽하고 교육하여야 하며, 인민에게 ‘사용’되지 않는 미술은 아예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미술은 새로울 필요가 별로 없으며, 오히려 흔하고 쉬워서 메시지 전달이 확실해야 할 뿐이다. 북한이나 중국에서 ‘현대미술’이라는 용어가 즐겨 사용되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동시대라는 의미의 ‘당대미술’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언젠가 중국인 미술사가에게 ‘현대미술’이라는 용어를 썼다가 용어의 부적절성에 대해 장광설을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미술의 방향은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그리고 남쪽 내에서 갈래를 나눈 채 참으로 오랫동안 진전되고 논의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미술사에 있어 ‘추상’과 ‘실험’은 ‘민중미술’만큼이나 마찬가지로 냉전(冷戰) 이데올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새로운 상품을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 팔아야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새로움’이 어찌 이데올로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말이다. 세계적인 냉전 체제가 종결된 지도 3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대, 미술을 하겠다는 많은 학도들은 여전히 단지 새롭기 위해 새로워지려는 강박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더 심해졌으니, 그러한 ‘새로움-증후군’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시대를 앞서가거나 시대와 호흡하겠다는 일종의 ‘소명의식’마저도 어쩌면 시대의 산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한 소명의식이든 일종의 강박증이든 이제는 그것들로부터 좀 자유로워도 되지 않을까.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풍부한 사고의 자유를 누리며, 무한한 가능성의 지평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솔로몬의 지혜, 과거 인류의 엄청난 자원(資源)을 들여다보려는 공부하는 자세, ‘부정(不定)’하기 위해 부정하지 않는 겸손한 태도...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의미 있는 물음들을 하나씩 쌓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게 뭐가 좋으냐. 나이가 드니 새해가 오는 것도 반갑지 않다.


- 김인혜(1974-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 독일 본대학 수학.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덕수궁 프로젝트(2012)’, ‘텔미 텔미:한국 호주 현대미술(2011)’, ‘아시아 리얼리즘(2010)’, ‘아시아 큐비즘(2005)’ 등 전시기획. 2012 김복진상 수상. 박사논문「루쉰(魯迅)의 목판화 운동-예술과 정치의 양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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