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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미술의 포퓰리즘을 벗어라

전영백

요즘 작가들은 좋겠다. 얼마나 자유로운 때인가. 작품의 개념에 따라 매체 선택의 자유가 있고, 장르를 넘나드는 유연성은 각자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구나 첨단 미디어의 테크놀로지는 그들의 언어를 무한히 넓혀줄 수 있고, 대중문화는 그들이 손쉽게 쓸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이젠 장르며 기술이며 또 표현이 중요하다기 보다, 개념이며 아이디어가 승부를 결정한다. 젊은 그들은 참 좋겠다. 1970년 이후 출생 한국의 젊은 작가들(yKa?)에 대한 적절한 명칭은 없는 듯하여, ‘포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국적없는 영어표기나, ‘X세대 이후 세대 작가들’이라는 아리송하게 묘한 이름이 따라 붙는다. 이 이름은 복합적이고,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의 작품과 닮아있다. 그래도 요즘 젊은 작가들은 얼마나 좋을까. 장르의 해체와 혼합에서 과감한 그들은 멋지게 보인다. 말하는 것도 가끔 쿨하게 들린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듯, 괴짜스런 패션과 가끔씩 던지는 짧은 문장들은 뭔가 ‘있어’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작가를 보면 대리만족도 느낀다. 젊은 그들-. 자유로운 사회에서 무언들 못하리. 그들의 신선한 충격을 내심 기다리고 있다.


사실, ‘충격가치(shock value)’는 영국의 젊은 작가들(yBa)로 인해 90년대부터 세계화단에 자주 등장하던 단어이다. 개념미술을 근거로 근본적 리얼리즘으로 무장한 이들의 과감하고 때론 엽기적인 작품들에 미술계는 환호했다. 그 당시 그 충격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그들의 작업은 ‘감각주의(sensationalism)’라는 말로 비판받기 시작한다. 초심에서 보여주었던 개념적 충격은 상품화, 대중화에 편승해 점차 표면적, 말초적 충격으로 얇아졌다. 이젠 작품보다 작품의 가격이 더 충격적이다. 이들보다는 내면의 소통을 꾀하는 심도있는 작가들, 이를테면 곰리, 화이트리드 그리고 카푸어 등이 오늘날의 미술을 이끌고 가는데, 이들 작가들이 주는 정신적 충격은 상품성과는 거리가 멀다. 미술에서 상품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비싼 작품들의 가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제 다시 우리의 젊은 작가들로 돌아와 둘러본다. 요즈음엔 사회, 문화적 이슈에 민감하고 그 기호를 작품화할 수 있는 순발력을 갖고 있는 작가들도 눈에 띈다. 그 관점을 개인적인 경험에 두기에 자기 입장도 견고한 작가들이다. 테크놀로지와 미디어 대한 통찰력을 가진 작가들 또한 꼽을 수 있다. 더불어 요즈음에는 이야기(story-telling)이 강세여서 동영상과 더불어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의 작가들은 손기술이 뛰어나기에 구상과 극사실에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한다. 이것도 그대로 발전시키면 좋을 영역이다. 다만, 그것이 걸릴 덫인 형식주의와 소재주의를 피할 수 있어야 한다. 회화의 영역에 대해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작품 같지도 않은 작품으로 장사판을 벌리는 일부 중국작가들에 비해 월등하게 좋은 우리 작가들의 작품을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회화적’인 표현으로 완성도를 살리면서 현실과 이상향을 교차시키는 것도 요즘의 신선한 방식이라 여기고 있다. 


상업주의에 포획되는 젊은 작가 

이러한 다양한 영역에서 국내 작가들의 성장은 희망적인 것 같다. 그런데 얇은 단층을 걸어가듯 얄팍한 면이 느껴질 때도 많다. 특히 이전에 비해 쉽게 상업주의에 포획되는 점은 젊은 작가들에 결정적인 ‘독’인데, 너무 일찍 알려져 상업주의의 매너리즘에 갇히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비판해야 할 작가는 누구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작가”이다. 대중의 취향에 맞추고 유명세만을 추구하다 보니 작품의 개념을 잃어버린 채, 사회의 고정관념과 클리쉐를 복제하고 퍼트린다. 한 마디로 바이러스 역할의 작가들이다. 대중매체와 연관된 포퓰리즘이 문제인데, 정치권에서 인기영합주의·대중영합주의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술에서의 포퓰리즘은 추하기까지 하다. 일반 대중을 예술적으로 이끌어야 할 작가가 도리어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좋아하는 말초적 자극을 자초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특히 ‘K-Pop’이니 대중소비사회의 모티프를 작품에서 적극 다루는 작가들 중, 자신이 그러한 사회양상을 비 판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편승하는지 전혀 개념이 없는 작가가 있다. 


최악의 경우는 작가 자신이 연예인이나 스타처럼 행동하는 작가인데, 이는 자본주의가 가진 병폐를 비판할 의식조차 없이, 그저 그 표피적인 소비욕망, 상품화된 여성상을 복제하고는 스스로 상품이 되어버린다. 작가는 그런 줄도 모른다. 그리고 대중은 이들을 솔직하다느니, 대담하다느니 치켜 세운다. 이들은 직설적이고 단순하고 말초적이다. 여기에 약간의 불량기가 가미되면 더욱 뜬다. 작가뿐 아니다. 자칭 ‘불량 큐레이터’는 또 무언가. 뭔가 삐뚤막하면 ‘쿨’한 줄 착각하나보다. 이런 저급한 감각주의는 오늘도 소리 없이 노력하며 자기세계를 쌓아가는 ‘좋은’작가들을 좌절시키는 ‘나쁜’ 이들이다. 미술에서 좋고 나쁜 것이 어디 있냐고?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이상한’ 이들이다.



전영백(1965- ) 홍익대 미술사학 석사. 마포 문화재단 이사 역임. 현 홍익대 미술대학 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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