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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결과보다 과정

류한승

90년대 말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미술경기는 끝없이 추락했지만, 비상업적인 분위기에서 오히려 신진작가들의 실험정신은 현저히 상승하였다. 그리고 2000년대 초중반 그것이 개화하고, 여러 복합적 요인이 더해져 소위 ‘젊은작가 전성시대’를 열었다. 미술시장 활성화와 함께 다양성이 사라지는 시점에 다시 불황이 도래했지만, 이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다시금 새로운 자양분이 미술의 토양에 뿌려지길 바랄 뿐이다. 그런 기대 속에서 최근 젊은 작가들을 살펴보면, 그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전시장에 놓여진 완성된 작업뿐만 아니라 그 제작 과정에도 역점을 두는 작업이 적지않다는 점이다. 


과정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프로세스 아트 혹은 퍼포먼스를 떠올리겠지만, 필자가 말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 인물, 물건, 장소, 내러티브 등 을 자유롭게 재배치하거나, 실제에 가상을 덧보태어 마치 소설처럼 스토리를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미술이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한 무용수를 다룬 전소정, 보성 어부 살인사건을 재해석한 남화연, 어린이가 두려워하는 괴물을 잡는 이서준, 지역신문과 전화번호부로 종이옷을 만든 안강현, 가상의 동물 보카이센을 키우는 박재영, 실종된 프랑스병사를 추적한 나현, 엘리자베스 쇼츠 살인사건을 회화로 표현한 오용석, 폭력성과 식물을 연결시킨 장파 등이 그들이다.(이들보다 좀 더 일찍 활동한 작가로는 박윤영, 박화영, 정연두, 함경아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작업들에는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다. 바로 관객이 작업의 의도와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향은 구체적 사항들을 변형·혼합하기 때문에, 사전 지식이 있어야만 그 내용을 세세히 알 수 있다. 물론 어떤 미술이더라도 작업의 내용을 명확히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창작 과정을 찍은 비디오를 전시장 한 쪽에 놓거나 홈페이지에 그 과정을 담아 놓을 수도 있다. 만약 그 과정을 속속들이 다 보여주면 너무 직설적이라 예술적 흥미가 떨어질 것이고, 반면 조금만 보여준다면 관객은 도무지 알아채지 못 할 것이다. 게다가 비디오, 홈페이지 등의 방법은 이미 많이 시도되어 진부한 느낌을 주며, 이 방법이 모든 작업에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과정을 강조한 미술은, 전시장에서 그 과정을 얼마만큼 보여주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정연두 작품의 사례 

정연두가 2004년 11월과 2006년 5월을 각각 처음 발표한 순간, 예상 밖에 미술계의 반응은 그다지 뜨겁지 못했다. 그러나 전시 개막 후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다소 시차가 있는 반응이었다. 작가는 작업의 안과 밖에 정황증거를 숨겨놓아 이 작업의 제작 과정을 추측하게 하였으며, 나아가 그간 벌어졌던 에피소드를 사람들에게 꾸준히 설명하였고 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였다. 비록 결과물이 같더라도 창작과정이 다르면 전혀 다른 작업이 되듯이 보여주는 방식이 달라지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과거에는 결과물에서의 정체성을 논했다면, 이제는 창작과정과 보여주기에서도 정체성을 구현 할 수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는 정체성이 발생하는 구조가 1항 구조에서 3항 구조로 확장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불어 이런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선 작가가 작업실에서 혼자 작업하기보다는 각종 자료를 찾고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마땅히 작가라는 우월적 위치에서 벗어나 일반인들과 소통해야 하며, 심지어 의도치 않았던 우연적 요소도 수용해야 한다. 전시에서 그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관객이 그 과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전시장을 방문한 감상자를 주인공으로 여기고, 또한 관객이 전시를 보며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느낄 때, 아마도 그 작업은 끈끈한 생명력을 가지게 될 것같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술의 진정한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할 것이다.



류한승(1972- ) 홍익대 예술학과 석사. 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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