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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순수 미술’ 미술관, ‘현대 이전’ 박물관?

황록주

예술가에게 공통된 꿈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곧 삶이 되는 일 일 것이다. 하지만 팍팍한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수치화되는 일반적인 목표가 아닌 것에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면서 깊이 숨어있던 진리와 대면 할 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 예술과 관련한 활동의 기능이라면, 그것이 곧 바로 삶일 수 있는 가능성이란 몇%나 될까? 일찍이 그 둘을 동일한 맥락에서 하나로 엮으려 했던 노력이 100여 년전 바우하우스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신주단지 예술이 아니라 그저 등을 기대고 서도 좋을 친근한 등받이같은 예술말이다. 물론 바우하우스의 철학이 오늘날 조형예술교육현장의 근간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현대미술의 현장은 ‘순수미술’이라고 하는, 뭐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대상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술이 시각예술전반을 일컫는 말이라면, 대체 ‘순수’를 상실하고 삶 속으로 뛰어든 그 수많은 미술장르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경기도 미술관은 ‘크로스 장르’ 전시를 매 해 기획하는데, 올해에는 지난해 ‘건축’에 이어 ‘패션’분야를 준비하고 있다. 필자는 이 전시를 위해 지난해부터 다방면으로 리서치를 해왔는데, 패션전문 큐레이터가 아닌 입장에서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패션관련 자료현황은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문서화 되어있는 연구자료는 예외로 두더라도 근대 이후의 우리나라 복식을 다루는 곳은 사립으로 운영되는 한국 현대의상박물관이 유일했던 것이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는 의상분과가 독립되어 있어 동시대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들에게 의미있는 것들을 소장하고 연구하고 있으며, 교토 복식사박물관의 컬렉션 또한 가장 최근의 작품까지 이어져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복식 컬렉션은 근대 이전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렇다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우리나라 미술관들이 현대의 패션이나 가구, 건축, 디자인등을 별도의 전문분과로 운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분야는 굳이 기존의 맥락에서 보자면 ‘장식미술’이라고 하는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그러니 ‘순수미술’을 다루는 현대미술관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전 시대의 역사적 유물로만 이루어진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물론, 기존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는 생활의 예술들은 대체 어디에서 역사적인 보금자리를 찾아야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보면, 뭔가 빈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대미술은 예술적 기능의 극단을 향해 너무 내달아 온 나머지 생활 속에서 건강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들의 기록과 수집활동에는 소홀했고 특히 그것의 의미를 찾아주는 일에는 냉담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여전히 미술의 영역에서 다루는 그 수많은 형태들 중에, 그나마 공예와 도자 정도는 나름의 맥락을 갖고 있지만 패션이나 건축, 또한 산업현장의 생산물들을 담아낼 공간은 거의 전무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패션분야처럼 가구나 장신구, 디자인분야 역시 뜻있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수집한 작품들을 모아 박물관으로 설립한 사례가 몇있기는 하다. 쇳대박물관, 서울디자인박물관, 한국가구박물관, 근현대디자인박물관 등은 희귀하고도 고마운 사례들이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디자인분야의 연구와 디자이너 교류지원 등, 기대하지 못했던 사업들을 충실히 해오고 있지만, 최근 종로로 옮기면서 예술의전당 시절만큼의 전시공간을 두지못해 그간 진행해오던 전시의 역할은 그나마 축소되었다. 전문적인 디자인컬렉션 또한 이 기관이 ‘뮤지엄’이 아닌 탓에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다. 우리에게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이나 디자인미술관, 호주 파워하우스박물관이나 벨기에 앤트워프의 모드뮤지움 같은 곳을 갈망하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일까? 순수미술의 수집과 전시를 위한 현대미술관에 현대의 모든 시각 예술이 집중해 있는 동안 우리 시대가 의미있게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종류의 시각예술작품은 출처도 기록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최근 의류회사 한섬은 브랜드 런칭 20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기획하면서 그 회사가 만들어 판매한 옷 중 소장가치가 있는 것들을 가져오는 고객에게 당시 구입 가격을 그대로 환불해주는 이벤트를 벌여 2만 7천여 점의 옷을 모았다고 한다. 비용이 얼마나 들었을지는 그저 짐작해 볼 일이지만, 이 이벤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 시대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회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와 역사가 기억하는 우리의 삶이 예술적으로 구현된 사물들을 기록하고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찾아주는 일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활의 필수품에서 예술을 발견하는 일. 아주 잠깐의 틈을 통해 삶의 정수와 만나게 하는 일, 한 시절을 누리는 삶의 소품들이 왜 그들 각자에게 의미있는 것 인지를 시각적으로 밝혀내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 후대에 남겨주는 일은 또 한축의 역사를 살고있는 우리의 의무다. 현재진행형의 생활사를 또 하나의 예술사로 만드는 일,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황록주(1977- ) 홍익대 예술학과 석사.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역임. 현 경기도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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