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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조영남 개념미술가설

우정아

2017년 10월 18일, 가수 조영남은 화가 송기창과 회화 전공 대학원생 오 모 씨에게 의뢰하여 그린 그림을 자신이 직접 그린 것으로 판매한바, 사기 혐의로 피소되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조영남 대작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2018년 6월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재판정에서 조영남 측은 그의 작품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회화’가 아니라 현대 미술의 한 장르인 ‘팝아트’ 또는 ‘개념미술’의 성격”이 강한데, “팝아트나 개념미술에서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아이디어’나 ‘개념(concept)’이고, 이를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실행행위’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여 누구에 의하여 그 실행행위가 이루어졌는지는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처럼 ‘조수’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대 미술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 판매에서 이를 알릴 의무가 있음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 즉 의도적으로 피해자들을 기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법원은 조영남에 대해 “자신이 추구하는 현대미술인 팝아트나 개념미술과는 모순된 예술관이나 이념적 성향에서, 오히려 내심으로는 개념미술에서의 ‘작가’라기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화가’로서 그 전문성이나 예술성을 높게 평가받기 원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대중 앞에 선 연예인 조영남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화가”처럼 행동했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데도 그림을 잘 그렸던 게 “순전히 피와 혈통 때문”이었다는 그는 한 미술잡지에 실린 회고에서 “면 대표 초등학교 미술선수”를 필두로, 고등학교 미술반장, 서울음대 오페라의 무대 미술 등을 거쳐 군대에서 당시 서울대학 서양화과에 재학중이던 가수 김민기를 만나 서울미대 실습실을 둘러본 후 “저 정도쯤이야 발가락으로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캔버스와 물감을 사 들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 온종일 합창실 구석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림을 그려대기 시작했다”고 했다. 가수가 된 이후로도 마치 “마약 같은 현대 미술”에 이끌려 “진정한 애착과 열정”을 갖고 그림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자필 회고와 인터뷰를 타고 끊임없이 대중에 노출됐다. 이처럼 스스로를 ‘화수(畵手),’ 즉 ‘그림 그리는 가수’라고 칭했던 조영남은 타고난 재능, 자유분방한 영혼, 독특한 내면세계를 가진 천재적 예술가로 살았고, 이를 방패삼아 사회 통념을 거스르는 즉흥적 언행을 일삼았다. 어쩌면 일반인과 다른 정신세계, 이해하기 힘든 괴벽과 제멋대로의 방만한 삶이야말로 그가 지금껏 연예인으로서 자기를 차별화했던 ‘콘셉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콘셉트’과 거대한 이젤과 화구를 펼쳐 놓고 격식 없는 옷차림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파격적인 미술가 조영남의 이미지는 더할 나위 없는 시너지를 냈다. 그림을 구입한 구매자들은 무명 화가가 헐값을 받고 대량 생산한 그림이 아니라, 조영남이 직접 그린 그림, 즉 타고난 그의 천재성이 그만의 몸을 통해 표출된 물리적 결과물을 원했을 것이다. 
 
미학자이자 유명 정치 논객으로 활동 중인 진중권은 ‘조영남 개념미술 가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하며, 법원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조영남을 옹호했다. 그는 일차적으로 “현대미술의 규칙을 왜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제정하려 드는가?”를 문제 삼았고, ‘작가의 거짓말,’ 즉 조영남이 남이 그린 것을 자기가 그린 것처럼 속인 것은 거짓말이지만 “이것이 ‘예술계’라 불리는 세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도 강변했다. 그러면서 조영남 사건이 “이 사회에 통용되는 예술의 관념이 대체로 19세기-20세기 초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보여줬다고 했으나, 이처럼 “예술 고유의 영토”를 주장하며 치외법권과 면책특권을 외치는 진중권이 그 누구보다도 더 19세기스럽게 들린다. 
진중권은 20세기 미술의 ‘개념적 전회’를 통해 미술의 본질이 ‘솜씨’나 ‘손재주’로부터 ‘개념’ 즉 ‘콘셉트’로 전이되었다고 강조하며,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송 작가가 조영남보다 뛰어난 그림을 그려 시장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을 텐데 그 이유는 ‘콘셉트’가 없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언론에 실린 그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콘셉트만으로 작가가 된다니 참 쉽죠, 잉?’ 댓글에다 이렇게 비아냥댄 바보들에게. 쉬우면 직접 해보시라. 변기에 ‘사인’해 미술관에 들고 가보라. 받아줄까? 당연히 안 받아준다. 왜? 그 행위가 미술사적 의미를 가지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1916년이면 뒤샹보다 1년 앞서니, 그때는 아마 그 행위가 미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되는가? 아직 아니다. 아직 그 변기가 왜 작품인지 설명하며 그 논리를 미술계에 설득시키는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 진중권, 「유시민도 모르는 ‘조영남 사건’의 본질 - 조영남 사건에 관하여 ②」, 오마이뉴스(인터넷판 2016년 7월 7일)에서 인용.  

그러나 1917년, 뒤샹이 처음 변기에 사인했을 때도 미술관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의 사인은 뒤샹이 아닌, 그가 만들어 낸 허구의 무명 미술가 리처드 머트의 것이었고, 머트가 뒤샹이였다는 사실도 오랫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뒤샹의 <샘>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샘>으로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뒤샹이 미술이라는 제도적 장치 안에서 굳건하게 쌓아 올린 ‘저자성(authorship/authority)’의 권력이었다. 

개념미술의 진정한 성취는 미술의 가치와 의미가 미적 ‘취향’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임을 지속해서 드러냈다는 데 있다. 1960년대의 개념미술가들은 고독한 천재라는 예술가의 신화, 그 신화를 업고 견고한 제도이자 권력이 된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고 도전했다. 그들이 대량 생산 혹은 대리 생산이 가능하도록 작품의 도상과 매체 모두를 최대한 기계적이고 몰개성적으로 선택했던 이유는, 바로 그 생산 방식, 즉 단순 노동의 고용과 경영 및 관리의 영역에 존재하는 생산의 위계질서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진중권은 “예술, 개나 소나 해도 된다. 거기에 무슨 자격이 필요한 거 아니다. 그걸 보여주려고 뒤샹은 변기에 사인하고, 워홀은 회화에 찌라시 기술을 도입했던 것”이라면서도, 여전히 조영남은 되고 송기창은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술은 개나 소가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지 않는가. 그걸 보여주려고 뒤샹은 자기 이름이 아닌 허구의 이름으로 변기에 사인을 하고 보란 듯이 퇴짜를 맞았다. 예술은 ‘화수’ 조영남처럼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아는 유명인인 데다가 ‘천재적이며 반사회적인 일탈형 인간형’이라는 ‘예술의 속물적 개념’을 철저하게 연기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송기창은 안되고, 조영남이 되는 이유는, 송기창이 조영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 우정아(1974-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UCLA 미술사학과 1960년대의 개념미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늘, 그림이 말했다』(2018, 휴머니스트),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2015, 휴머니스트), 『명작, 역사를 만나다』(2012, 아트북스) 등이 지음. 조선일보 매주 칼럼 <우정아의 아트스토리> 연재.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 미술의 반-기념비적 흐름에 대한 연구서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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