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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단색화 담론, 어디까지 왔나

임연기

단색화에 관한 국내외 미술계의 높은 관심으로 지난 몇 년간 꽤 많은 단색화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에 새롭게 쓰인 글들은 과연 과거의 논의를 어떻게 비평하고 어떤 내용을 확장했으며 어떤 새로운 관찰을 제시했나. 이 글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고찰해 보려고 한다.

나는 현재까지 나온 단색화 담론들에는 어느 글이든 몇 가지의 공통된 논지들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본다. 이 논지들은 사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최근에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니고, 단색화 작가들의 70여 년 화업의 세월과 더불어 우리의 화단 현장에 계속 존재해 온 친밀한 이슈들이다. 단지 마치 끝내지 못하고 계속 미루며 쌓아 놓은 숙제처럼 수십 년 비평계를 부유하고 있었던 이야기들이다. 잠시 멈추고 다시 대면해 보자.



박서보 작업실, 1977


첫 번째로 가장 흔하게 출현하는 쟁점은 “한국의/한국적 모더니즘”으로서의 단색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먼저 이 논점을 ‘둘러싼’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자. 이 논점은 여러 이야기가 그 안에 꼬여 있어서 결코 짧게 다룰 수 있는 차원이 아니지만, 흥미 있는 점만 간추리면, 과거의 단색화 평론에는 ‘절대 평면’이라는 개념이 우세했다. 이런 글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94)의 이론을 절대적인 틀로 받아들여 그의 모더니즘론이라는 거울을 통해 국내의 회화를 이해한 것이다. 문제는 그린버그론이 미국 자체 내에서 공격과 비판을 받으면서 비평계에 수정론이 등장했고, 그 수정론의 몇 가지 파장에 다시 발맞춰 국내의 미술 담론도 다시 변화했다. 대다수의 국내 담론은 서구 비평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서구 자체의 풍향이 변화하며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다문화주의/문화다원주의의 출현이다. 즉 비(非)서구권의 미술을 단지 변방에 존재하는 서구의 아류(蛾類) 정도로 여기던 비평 경향이 비서구권의 독자적 차이와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조로 바뀌어, 비서구권의 독자적인 역사, 문화, 정치, 사회적 문맥을 중요시하는 비평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런 논지는 바로 알렉산더 몬로우 같은 이의 글에 나타난다. 이러한 시각은 “지역적 모더니즘”을 거론하며 결국 “한국적 모더니즘”으로의 단색화 담론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세계 미술사에는 하나의 절대적 모더니즘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상황과 문맥에서 벌어지는 복수의 모더니즘이 존재한다는 수정론이다. 뒤늦은 승인에 감사를 표명해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모노하나 한국의 단색화는 이러한 수정론의 풍향이 도와주는 분위기 속에서 세계적인 재조명을 받았다고 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한때 일국적 혹은 민족적 차원에서의 미술 내러티브에 대해 거부하고 심지어는 혐오감마저 미술계에 팽배했지만 그건 다시 퇴색하고 ‘한국적’이라는 개념이 전방으로 튀어 나왔다.

이러한 수정론의 영향으로 득(得)도 있었지만 더욱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한국적 문맥을 거론함에 있어서 어떤 시각에서 어떤 내용의 한국성을 고찰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국내 비평가들이 단색화를 둘러싼 독자적 한국적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1970년대의 사회 정치적 현실이다. 국내외에 소개된 거의 모든 단색화 담론에는 1970년대 정치 상황과 그와 결부된 여러 해악이 단색화를 조명하는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문맥으로 소개된다. 정치적 상황을 예술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는 극단적 예가 바로 베네치아비엔날레 단색화전의 도록 서문에 나오는 이용우의 괴상한 전제이다. 그는 서문 첫 줄에서 “전후의 한국 미술사에서 조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미술은 단색화와 민중 미술이다”라고 주장했다. 하나는 정치 현실에 침묵으로 저항한 미술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에 정치적 언급을 드러낸 미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외 다른 작품들은 어떻게 되는가?

정치적 문맥을 우선시하면 다양한 예술적 목소리들을 결국 배제하게 된다. 예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문맥은 결코 정치적 문맥 하나가 아니라 문화적, 개인적, 예술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합성된 지층이다. 단색화 작가들은 군사 독재 말고도 전쟁의 파멸, 전후의 사회 복구를 향한 공동체적 몰입, 압축된 근대화의 경험, 그 안에서 개인성의 보존을 향한 욕구와 도약이 함축된 현실을 살았다. 그들에게 분명히 존재했던 1970년대 이전의 삶과 경험은 완전히 무시하고 유독 그때의 정치 현실만 단색화의 한국적 문맥으로 선택하였다. 설사 단순히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만 본다 하더라도, 젊은 작가들의 개념예술 실험, 동경 미술계와의 교류, 모노하와의 관계 같은 정황들은 별도의 무관한 사실처럼 기술되고 단색화 형성과 관련된 문맥으로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편협한 문맥 설정은 담론을 빈곤하게 만들 뿐이다.




하종현 작업실, 사진제공: 국제갤러리 / 사진촬영: 김상태


단색화의 한국적 문맥을 구성하는데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용어들이 있다. 노자 장자의 동양 철학, 조선 선비적 절제, 금욕, 동양적 자연관 등이다. 이런 논의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단색화 작가들은 한지가 갖는 감각적 특징을 좋아했고 조선백자의 특징과 추사의 서체, 책가도의 영감을 언급했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들은 과거에 대한 느낌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했다. 그런데 동양의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는 논의는 단색화 작가들을 동양 철학이나 선비 사상 자체를 흠모하는 인문학자들로 둔갑시키려 한다. 또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에는 과거와 현재가 압축되어 융합되어 있다. 그러나 학계는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현대미술 비평은 가장 멀게 잡더라도 해방 전후의 시기 이전에 대해선 큰 흥미가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조선백자를 연구한 학자가 현대 미술 영역에 다가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과거의 흔적이 절묘하게 변화하며 남아 흐르는 가닥을 잡아내고 서술하는 언어적 성취는 학계 자체의 혁신적 내성(內省)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다시 성황을 이루는 단색화 개별 작가론의 부활과 담론과의 관계이다. 단색화에서 재료의 물성과 작업의 관계를 강조했던 것은 사실 단색화 작가들이 1970년대부터 스스로 자신의 작업에 관해 설명해 오던 강령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무수히 많은 작가론을 장식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개별 작가론들과 개별 작품론을 합성하여 개별론을 초월하는 담론을 탄생시키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개별 작가론이나 작품론의 축적이 담론 형성과는 서로 무관하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개별 작가가 개인전을 열고 평론가를 초청하여 글을 받아도, 개인전 서문과 학계에 발표하는 논문과는 설명할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단색화 작가들이 그렇게 반복적으로 강조한 물성과 신체성을 담론에 반영한다면 한국 모더니즘에 관한 독자적인 시각과 이론이 도출될 것이다. 단순한 하나의 예를 들면, 물질과 형태에 대한 전복으로서의 개념 예술과 달리 단색화는 오히려 물성의 발현을 강조했다. 특이한 대비점이다. 어떤 흥미 있는 토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색화 담론에는 개인 작품 세계가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 ‘창의로운 합성’이 부재하다. 많은 평론 글들은 항상 똑같은 소재들을 똑같은 프레임 안에 정렬시키는 안전 착륙을 한다. 단색화 작가들은 ‘회화는 죽었다’, ‘중요한 것은 개념이지 작품의 물리적 형태나 색이 아니다’, ‘예술을 통해 대중이나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비평 이론들 눈치를 보며 연착륙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신대로 작업에 임해 그 70여 년의 결과가 현재에 이어진 것이다. 단색화 담론도 주어진 비평 프레임을 벗어나 작가들의 작품에 초점을 맞춘다면 예술적 도약을 이룰 것으로 생각한다.


- 케이트 림(임연기, 1964- ) 미술 저술가, 큐레이터. 국제미술포럼 ‘Fracturing Conceptual Art: The Asian Turn’(아시아의 반개념예술적 흐름) 주최(2016), 한중일 그룹전 ‘The 5th Neo-Moroism’ 한국 작가 큐레이팅(2018, 베이징), ‘5인의 흰색전:단색화의 첫 국제 데뷔’(전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白)’ 서문, 2018, 도쿄), 영문 『PARK Seo-bo: from Avant-Garde to Ecriture』(BooksActually, Singapore, 2014)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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