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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폐허에서의 기억과 지각

이선영

문화와 예술은 삶으로부터 나오지만, 삶에서 당장 꺼내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터전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를 에워싼 자연이 아름답거나 유서 깊은 장소일 때 그곳은 재조명될 수 있다. 웬만한 것들이 다 소비의 대상이 되는 현대사회에서 독특한 지역으로의 여행은 매력적인 문화상품이다. 문화보다 강도가 높은 예술은 일시적으로나마 한 장소를 의미가 발생하는 사건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태백시 철암역 근처의 옛 마을에서 열리고 있는 ‘2018 강원 레지던스, 흐르는 땅 태백’전은 거의 생활사 박물관으로 남다시피 한 오래된 마을(의 터)에서의 현대미술 전시로, 장소와 잘 짜여진 것이 특징이다. 거의 모든 것을 웹상에서 소비하고 있는 현대에 실제의 장소가 내뿜는 아우라는 강력하다. 여기에 놓이는 예술작품이나 사물은 코드의 소비에 익숙해진 눈에 야생적으로 다가온다. 




광부 작가 전제훈, 37-2, 사진 제공: 태백탄광문화연구소


이 전시의 작가들은 2-3층 높이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 일부를 보존하고 있는 탄광촌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서 장소특정적인 현대미술 작품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던 전성기 때, 생활공간을 늘리기 위해 지하까지 확장된 공간을 활용하는 전시장은 방(집)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집합적 형태의 단편들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산업 시대의 동력인 석탄생산의 중심지였다가 산업화의 시기를 지나고 폐광의 수순을 밟으면서 석탄산업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유지되었던 마을 또한 사라졌다. 

그러나 거의 유적지와 다를 바 없는 폐허는 독특한 심미적 체험을 낳는다. 세계 시장화로 먼저 선두를 치고 나가,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 된 제국의 동력도 결국은 석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문명과 물질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압축적인 성장을 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성기는 불과 몇십 년,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시 리플렛 표지 이미지처럼 뜨거운 연탄처럼 삶의 온기를 지켜왔다. 몇몇 가게는 아직도 있지만, 거주민이 빠진 그곳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 세트장처럼 횅하다.




김기동, 365개의 검은 장화, 설치, 사진 제공: 태백탄광문화연구소


2000년대 이후, 인적이 드물어지는 재래시장이나 학교 등은 공공미술의 장으로서, 때로는 레지던스의 장소로써 활용되는 흐름이 있다. 이 연극적 무대에서 펼친 작업은 역사를 호출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철암역 인근 동네는 이미 관광객을 상대로 한 생활사 박물관이나 안내 사무소 등이 있다. 가령 산업화 시기에 전성기를 맞은 그곳은 두 집 걸러 하나씩 술집이 있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그런 가게를 재현해 놓은 식이다. 방문자는 그러한 재현물에서 정보를 얻어갈 것이다. 작가들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정보를 읽고 가는 스타일을 넘어서고자 했다. 장소와 관련된 충격을 재연하는 작품들은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사건의 현장이다. 일시적인 시공간만을 점유한 후 사라질 예술작품은 터전의 운명과 같다. 이 일시적인 작품들은 역사의 현장을 기념하는 반(反) 기념비이다. 아무것도 없고 채집된 소리만 울려오는 작품이나 노동자 없이 기계만 돌아가는 기괴한 작품들은 부재의 흔적들이다. 전성기의 그곳을 알려주는 거대한 금고나 광부들의 시커먼 장화는 현대 미술에서의 사물의 위치를 잘 알려준다. 

이 전시는 태백 철암탄광역사촌아트하우스에서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사업으로, 올해도 17군데의 장소에서 16명의 작가의 전시가 열렸고, 행사의 베이스캠프라 할만한 장소인 한양다방에서는 24명이 참여하는 단체전도 오픈했다. 한 장소당 한 작가가 담당하기 때문에 거의 개인전급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특히 장소가 주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활용한 현대 미술작품들은 불편한 교통 여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이곳에 와서 봐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실제적인 삶의 터전이 그 용도를 다하고 예술의 공간으로 거듭난 경우는 적지 않다. 예술은 삶 이후에 오지만, 다음 삶을 예견한다. 철암탄광촌 또한 폐허 또는 유적지 같은 느낌을 주는 장소로,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의 기원이, 관람객 및 관광객들에게는 지역과 연관된 색다른 문화 콘텐츠가 되고 있다.


이선영(1965- ) 웹진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1996-2006), 『미술평단』 편집장(2003-05) 역임.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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