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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장기화되고 있는 민폐

이선영

이민휘/ 최윤, 오염된 혀, 2018,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54초


작년 가을 무렵부터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길 사이의 구간이 집회로 주말마다 몸살을 앓으면서 인사동은 물론 사간동, 삼청동, 통의동, 동숭동까지 일대의 미술 관련 행사나 전시에 가는 일이 고역이 되었다. 광화문 광장과 청와대 앞길이 일반인에게 개방된 것은 민주주의의 승리였는데, 그 결과가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일부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 민폐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불편함이 최소한 석 달은 넘은 것 같다. 자체 학습과 검열에 의해 그 근처에서의 사적 만남은 아예 배제하고 있다. 어쩌다 거기에 가 있어도 빨리 용무를 끝내고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불법과 탈법의 백화점이라 할 만한 주동자가 얼마 전 구속 위기에서 벗어나자 ‘뭘 더 해야 구속이 되는 것인가’라는 네티즌의 말이 공감을 얻기도 했다. 19세기의 한 진보적 정치경제학자의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이고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언명이 요즘 너무나 실감 난다. 첫 번째 역사를 흉내 내는 두 번째 ‘역사’는 첫 번째 역사가 극복했다고 믿어졌던 것들인데, 이 유령들이 산자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들의 장기화된 소란은 인근 주민과 학교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무분별한 집회에 대한 학부모들의 대응 집회’가 열리게 했으며,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다!”(『조선일보』 1월 4일 자)라는 단말마적 외침을 낳게 했다. 근처에 맹학교를 비롯한 학교만 8개 있는 동네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범투쟁 본부’에 대해 주민들은 ‘제발 스피커 방향이라도 다른 쪽으로 해달라’고 하소연하는가 하면, ‘그들이 크게 틀어 놓는 애국가를 듣다 보면 애국하겠다는 마음이 싹 사라진다’고 한 뉴스 방송 인터뷰에서 말한다. 

오래된 예술의 거리인 인사동 일대는 특별한 일 없이 그냥 왔다 갔다만 해도 문화예술의 분위기에 젖는 듯한 여유로움이 좋았는데, 갈 때마다 아무 공감도 가지 않는 핏발선 구호 소리에 현실에 대한 불쾌한 각성이 생긴다. 그곳은 이제 ‘현실원리로부터 쾌락 원리로의 도피’(프로이트)가 가능한 예술의 자리이기에는 너무 번잡해졌다.

일상에서 찾기 힘든 의미와 감성을 찾아 예술의 거리를 소요해 온 수십 년 이상의 작은 행복이 침해되면서, 소중한 것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상실감이 크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인사동 일대는 여전히 많은 미술인에게 친숙한 곳이며 근처의 문화유산 때문에 관광객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혼란이 장기간 방치되고 있는가. 집회 주최 측은 그들이 생각하는 적대 세력에게 결정적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이제 그들 스스로뿐 아니라 다수에게 피로감을 주는 민폐를 거두어야 한다. 
청와대 방면으로 가는 고즈넉한 거리의 갤러리 중에는 주말에 아예 문을 닫는 곳도 생겨났으며, 깃발을 배낭에 꽂은 채 갤러리에 들이닥쳐 화장실 찾는 ‘태극기 부대’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곳도 있다. 태극기와 이스라엘기, 성조기라는 초현실적 조합은 최근 일촉즉발의 전쟁이 염려되는 중동의 국제정세를 떠올리면 예언자적이다.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외치면서, 차도의 반을 차지하고 밤낮으로 예배형식의 집회를 열며, 확성기로 애국가와 찬송가를 틀어대면서 인근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표현의 자유’로 이해될 수 있을까? 어거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표현이 아니며,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기회주의적인 정치권들의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들은 국회가 아닌 장외를 활동 무대로 택함으로써 무의미한 소란에 가세한다. 몸이나 시간으로 때우기(필리버스터), 고소·고발의 남발 등으로 나타나는 무분별한 행태는 정치 자체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낳는다. 반대를 위한 반대, 투쟁을 위한 투쟁은 결국 아전인수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유튜브 가짜 뉴스로 단단히 의식화된 사람들이 함부로 쏟아놓는 말들은 논리적인 설득력은 물론이고, 광장에서 거리에서 다수를 향해 무엇인가 외치는 이라면 가지고 있을 절박함이 없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광장을 주제로 한 야심 찬 전시가 열리기도 했지만, ‘광장’을 장기적으로 독점한 정치집단들은 이제는 조용한 곳에서의 자성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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