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51)‘블루칩’유감

김진하

과거 우리 미술계에는 발전적인 논쟁이 있었다. 80년대의 모더니즘과 민중미술간의 논쟁, 90년대의 탈모더니즘 논쟁등이 그것이다. 미술 내적인 이념이나 입장때문이었든, 화단 헤게모니에 관계된 것이든 간에 비교적 생산적인 논쟁이었다고 기억된다. 미술을 바라보는 상대적 시각들의 충돌이었지만 미술내부로 수렴되어 그만큼 작품생산에 도움되는 것이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의 미술계를 보자면 8, 90년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논점이 비엔날레 등을 통한 국제전, 옥션을 통한 고가의 상업성과 시장성 등으로 미술의 외연이나 제도, 자본 등에 관한 정보들이 주를 이룬다. 미술내부로 수렴되는 담론은 별로 없어 보인다. 작가들의 작업태도나 경향이 과거와는 달리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있고 스케일이나 물량이 커져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작업제작 영역밖 요소들인 기획, 저널, 공·사립미술관, 유통, 컬렉터, 기타제도 등이 작품을 역으로 규정하는 구조가 더 공고해져서 그럴 것이다. 그 결과 지난 10년 간은 젊은 작가들의 시장성, 즉 상업성이 단연 두드러지는 시기였다. 대안공간을 통해서 등장한 20-30대 작가들의 옥션이나 상업화랑, 그리고 미술관으로의 직진은 과거에는 좀처럼 열 수 없을 것 같았던 기성 제도권을 활짝 열어 젖힌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미술의 대중화와 국제화, 문화산업화를 견인하는 긍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외연의 확장이 반드시 질높고 깊이있는 작품생산으로 연결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일례로, 미술과 세계에 대한 치열한 고민없이 가벼운 대중적 시각이미지의 범람과 서사의 실종은 비평의 퇴보를 동반하며 오로지 시각적인 아이디얼리즘만을 화단전반에 확산시켰다. 이른바 ‘코리안팝’, ‘지독한 그리기’등의 용어로 표상되는 이러한 경향들은, ‘블루칩’이란 증권가 용어로 이른바 ‘묻지마 투자’를 일으키며 대중들의 미술품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때마침 전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킨 중국미술이 성공적인 모델로 인식되어 이와 유사한 유형의 작가들이 순식간에 미술시장과 각종 전시기획에서 빠지지 않는 총아가 되기도 했다. 신문과 미술잡지들은 국내외의 각종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된 이들을 계속해서 대서특필하면서 뜨거운 상승효과를 이끌었고, 미술관을 비롯한 옥션과 상업화랑들은이 몇 안되는 젊은작가들을 여기저기서 불러들였다.


중견작가들 소외가 심화된 문제

미술품은 ‘비싼것’이 ‘좋은 작품’이란 등식이 성립되는 분위기였다. 비평적 토대나 검증없이 이런 상업적 호황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서구에서 미술사의 공동묘지로 들어가 그 시신조차 없어졌을 팝아트나 하이퍼리얼리즘이 어떻게 한국에서 예수처럼 부활했는지, 그래서 소위 블루칩이라는 증권 용어로 연계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주식시장처럼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노리는 투자층이 여론의 바탕에서 일정한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술고유의 정서적 순기능이 자본에 의해서 길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인으로서는 묘한 씁쓸함이 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지점보다 더 아쉬운 것은 비평이나 저널이 이런 현상을 반성하는 시각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보를 일차적으로 다루는 저널의 속성은 이해하지만그 것을 문화적인 관점에서 분석·보도하는 것이 역할인데, 상당부분의 미술기사는 부박하게 작품 판매가격의 경신에만 초점을 맞추고, 마치 그것이 엄청난 일인 것처럼 떠들었다. 또 이런 사실을 미술내부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비평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저널과 비평의 상업구조에 대한 비판의 실종은 곧 작가로부터 관객에 이르는 소통과정을 너무나 간단한 자본의 투자구조로 대체해서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이와 함께 등장한 심각한 문제는 상업적 신드롬의 유형화와 구조화로 인해서 자기미술에 집중해 온 중견작가들의 소외가 심화된 점이다. 상업구조와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긴 시간동안 다양한 시도와 모색, 형식 실험을 통해 진지하게 자기세계에 천착해 온 이들의 좁았던 설자리가 그나마 더 어렵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의 다양한 제도나 프로그램들의 혜택이 젊은 작가들에게만 집중됨으로 공개적으로 중견 작가들의 소외현상은 더 심해졌다. 이 부분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데, 아직까지도 어떤 논의도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미술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자기주제를 탐구하고 진술하는 문화적 행위다. 상업적 결실은 차후의 문제다. 그만큼 작업에만 몰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자본으로 교환하기 위한 전략이 횡행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서구미술이나 중국미술이 그렇다고 우리까지 거기에 부화뇌동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든다. 미술을 시작할 때를 기억하고, 좀 더 순수한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되돌아보자. 미술은 머리로 하는 것도,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도, 제도에 기생하며 출세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온존하게 세계와 자신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새로운 미술언어로 펼쳐 보이는 정신적 행위다. 거기에 자본주의 구조의 투자방식이 집약된 어휘인 ‘블루칩’이 접두사처럼 붙는 게 뿌듯한 일인지를 적어도 작가들만큼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김진하(1961- ) 홍익대 서양화 학사. 한선갤러리 큐레이터, 대안공간 나무화랑 기획실장 역임. 현 우리미술연구소 품 소장, Namu Artist's Space 대표.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