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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분열, 또는 뜻밖의 행운

이선영

미술계 현장에서 활동하며 작품만큼이나 작가가 쓴 글을 많이 본다. 아니, 시각예술 부문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글을 더 많이 본다. 예술 또한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텍스트는 객관적 판단의 근거처럼 간주되기 마련이다. 글의 비중은 다른 관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전처럼 어느 한 지역에 전시공간이 몰려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여기저기 흩어진 수많은 장소 중의 몇 곳을 가게 되고, 선택의 기준에 전시/작가 정보 읽기가 있기 때문이다. 평면 작품처럼 한 컷의 자료 사진에 작품의 전모가 파악되지 않는 설치나 영상작품 같은 경우, 주어진 시각 정보의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효과적 수단이 문자적 텍스트다. 다른 전시, 또는 작가와 계속 비교되는 과정에서 작품만큼이나 관문이 되는 글쓰기는 부담스러운 문턱이다. 공공영역에 걸쳐있는 예술에서 글쓰기는 필요악이 됐다. 주로 문자적 형식으로 소통하는 이에게는 머리 쭈뼛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보충물 없이 오직 외줄 타기처럼 그 기준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시각예술이라는 공간적 형식은 시간성을 축으로 하는 문자적 소통에서 불리한 지점이 있다. 물론 시각예술에도 문자나 말 등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지만, 서사적 방식, 가령 영화관이나 도서관이 아닌 미술관에서 길게는 몇십 분 간 계속되는 영상이나 두툼한 책자를 끝까지 보게 하려면 여기에도 엄청난 유인책이 필요하다.
최재훈, sysmon-angel with torn wings, 2021, 105×129.24cm
프라모델에 있는 갖가지 무기의 상징을 계속 녹여 붙인 이 단색의 괴물은 명확한 경계 없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기이하게도 여기에는 현실을 초탈한 부처의 실루엣이 보인다.


문자라는 선형적 질서에 익숙지 못한 때문인지 작가의 의도/기획이 적힌 글은 쓰기도 읽기도 힘들다. 자신의 매체처럼 공간적으로 여러 겹 꼬여있는 문장만큼이나 괴로운 것은 상투적 화법이다. 작품은 작가별로 다 특이한데, 관련 텍스트는 왜 그리 비슷할까. 작가의 의도나 기획의 목적 등이 담긴 글들이 포토샵으로 보정한 증명사진처럼 비슷한 얼굴이 되는 것은 왜일까. 채워져야 하는 서류의 빈칸이 유도하는 방식에 따라 천편일률적인 결과가 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의식의 감시망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전통과 현대, 소통과 치유, 예술과 사회, 융복합과 협업 등등, 보편적이지만 자신의 작품/기획에 특화하기에 어려운 일반적 개념들의 과포화 속에 정작 자기 목소리는 작아진다, 아니 사라진다. 관념으로 다양한 작품/기획들이 포장되면서 비슷한 메시지로 수렴되는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장황한 예술철학을 논하는 것은 상투성으로 직행하는 길이다. 해당 기간 내에 실현 가능한 목표인가를 의심하게 하는 원대한 계획은 다음부터는 열심히 해야지 하는 식의 아이 일기처럼 비슷한 당위적 결심으로 마무리된다. 의도가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개념미술을 제외한다면, 작가의 의도와 작품이라는 결과 사이에 차이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굳이 봉합될 필요는 없다. 분열의 위험은 있지만 이 틈새들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이기 때문이다.


민재영, 달밤, 2007, 한지에 수묵채색, 55×75cm
수많은 차이의 입자로 지글거리는 분열적 정체성을 가진 얼굴이다.


자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소재가 좋다고 훌륭한 작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듯이, 많은 자료가 의미 있는 텍스트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작업은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문제가 아니다. 작품은 생성이다. 작품이 완성될 즈음 오히려 처음의 의도가 명확해지는 생성의 과정이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때 작업은 이전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김빠진 것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질 때마다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는 흥미진진한 게임이 된다. 이러한 과정에 붙여진 이름이 실험이다. 정처 없이 출발했지만, 우연과 필연이 복합되어 도착한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과정이 작업이다. 그때의 바람과 한 번의 호흡이 더 독특한 텍스트/작품을 낳을 수 있다. 의식의 산물인 가필은 대개 실패한다. 쓰다 보면 정리가 되면 좋을 것이다. 개념의 정리는 작업과 함께 가능할 뿐이다. 작업의 과정에서만 생성될 수 있는 구체적 발상들만이 가치 있다. 한번 읽고 소비되는 것을 넘어서 볼 때마다 읽을 때마다 들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많은 겹을 가지는 작품/텍스트가 매력적이다. 그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비슷한 논조로 환원되는 관념주의에 대한 호쾌한 복수이자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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