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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작가 서운해의 내용 증명 | 김성호의 미술계 팩션(12)

김성호

이해할 만하다. 배신을 당했다니까. 변호사 최승소는 30년 지기 친구인 작가 서운해가 한 갤러리에 소송하기 위한 전 단계로 보낼 내용 증명과 관련하여 상담했다. 최승소는 법적 용어로 다듬어 줄 테니 내용 증명에 들어갈 대략의 내용을 서운해에게 써달라고 했는데, 오늘 그것이 메일로 ‘띡’하고 왔다.
아래는 서운해가 보내온 서간체의 글.



ⓒ김성호, 2022


···
대표님!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저를 전속작가로 불러주시고, 여러 가르침을 주신 세월이 어언 20년이 되었습니다. 저도 어느덧 이름이 알려진 중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가끔 서운했던 일들은 참을 만했습니다. 전시 카탈로그 대신 엽서만 찍자고 하셨을 때도, 가끔 작품 운송비용을 제게 부담시키실 때도, 개인전 카탈로그에 실을 평론가의 서문 비용을 제게 당연한 듯이 떠넘기실 때도, 제가 평론을 받고 싶어 하는 평론가를 끝내 거부하시고 대표님과 친분이 있는 모 평론가를 추천해 주실 때도, 컬렉터와 명함을 주고받았다고 호통을 치실 때도, 그랬습니다.

신진 작가로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가했을 때, 초대 작가 중에 제게만 부스비 일부를 내게 하셔서 섭섭했지만, 당시 갤러리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해외 아트페어에 참가할 때마다 비록 러시아를 거쳐 가는 저가 항공이지만, 대표님께서 늘 왕복 항공료를 지원해 주셨고, 작품도 잘 팔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간혹 판매 작품의 대금 결제가 늦어도 대개는 해를 넘기지 않고 꼬박 챙겨주셨죠. 신진 때 없던 계약서도 5년 전부터 기꺼이 챙겨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때부터였던가요? 저의 늦장가를 축하해주시면서 아무 조건도 없이 “창작과 생활에 보태 쓰라”고 매달 3백만 원씩 입금도 해 주셨으니, 눈물이 날 만큼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대표님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아니 당신을 미워합니다. 돈 가지고 장난을 치셨으니까요. 재작년 해외 아트페어에 나갔을 때, 판매 금액을 낮추어 파셨다고 그 금액을 반으로 나눠 주셨는데, 실제로는 원래 저의 작품가보다 조금 더 높게 파셨더군요. 한 기업과의 콜라보 프로젝트가 대박이 났을 때도 저한테는 저작권료 개념으로 몇백만 원을 받은 것이 전부였는데, 저작권료가 정말 그런 건가요? 제 작품의 이미지를 한 회사가 무단 도용했을 때, 저작권 관련 소송을 준비해 주셨음에는 감사합니다만, 소송 전에 합의로 마무리하시고 제게 떼어 주셨던 금액을 알고 보니, 그 합의금의 코딱지만큼도 안 되는 돈이었더군요. 속상합니다.

최근, 대표님께서 5년 전부터 주셨던 생활비와 창작비를 갚는 비용으로 작품을 달라고 하셨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나중에 되돌려받을 생각이었다면 미리 말씀하셨어야 하지 않나요? 그것도 충격인데, 요청하신 작품들의 가격을 모두 합하면 지금껏 제게 5년간 주셨던 금액의 3배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정말 이럴 수는 없습니다.

대표님! 저는 이제 대표님과의 전속 계약을 해지하겠습니다. 신뢰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불투명하게 진행되는 대표님과의 일들이 못내 힘듭니다. 대표님을 통해서 성공했으나, 대표님과의 모든 일은 정당한 협력이 아니었습니다. 배신과 낭패감으로부터 헤어 나올 길이 없습니다. 특별히 손해배상은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제게 주셨던 5년 동안의 금액에 부합하는 작품은 대표님의 요청대로 드리고 떠나겠습니다. 다만 곧 판매될 거라고 제게 안 돌려주시고 10년 넘게 가지고 계시는 작품들로 갈음하겠습니다. 그 작품값만 해도 지금껏 제게 지원해 주신 생활비를 갚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거친 내용이지만, 제 상황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하며 이만 줄입니다. 총총

* 이 글은 팩션(faction)이다.



- 김성호(1966- ) 파리1대학 미학 전공 미학예술학 박사, 유니스트 박사후연구원, 201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전시총감독, 2015바다미술제 전시감독, 2016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 총감독, 2018다카르비엔날레 한국특별전 예술감독,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2021강원국제트리엔날레 예술감독 역임. 현재 2023APAP7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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