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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실재의 귀환과 예술

이선영

현대인이 몸담고 있는 디지털 생태계는 실재(實在)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킨다. 리얼리즘을 대체한다고 믿어지던 시뮬레이션 이론은 요즘 초미의 관심사가 된 NFT에도 적용된다. 그것은 미술작품의 유통에도 적용되는 가상 현실의 힘을 예시한다. 어이없는 ‘작품’에 천문학적인 낙찰가가 붙는 경우도 많아서 그 자체가 뉴스거리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은 새로운 기술로 별도의 고유한 인식 값을 부여한 가상자산으로 정의되고 있다. 최초의 발행자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위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기계복제에 의해 예술작품 고유의 아우라가 사라진다는 발터 벤야민의 예언이 무색하게, 복제 기술은 예술작품의 중요한 특징인 유일성을 가상 세계로 귀착시킨 것이다. 경쟁력 있는 상품은 가상의 몫을 키운 것을 말한다. NFT는 내용과 무관하게 희소성 그 자체를 물신화한다. 물신은 물질로 된 것이든 아니든 가상적이다. 이 가상 물신은 접속만 가능하다면 ‘원본’으로 인정된 누군가의 소유를 향유할 수 있다. 만인이 인정하고 참여하는 코드의 게임에 예술품 또한 포함되어 간다. 어떤 평론가는 궁극적으로는 보수주의에 안착될 위험이 있는 좌표 없는 현실에 대항하여 ‘실재의 귀환’을 말하기도 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리얼리즘은 비판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을 기치로 내세우며 명분을 쌓았지만, 정보혁명을 거친 21세기에 실재는 표상하기 힘들다. 


김지은, 화성 풍경- 이루세요 내 집 마련의 꿈, 2021, 리넨에 유채, 145.5×227.3cm
우리 몸의 연장이자 현실인 집은 자본에 휘둘리는 상품이 되어 스펙터클화된 혹성 같은 낯섦으로 회귀한다.


그런데 아직 진행 중인 코로나 국면은 희미해진 실재에 대한 느낌을 강화했다. 여기에 얼마 전에 터진 전쟁 또한 아무 기준이 없어 보이던 현실을 각성하게 했다. 실재의 지표가 된 것은 죽음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것 중에서 식량과 관련된 재앙은 지역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준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매월 발표하는 세계 식량가격지수(FPI)라는 것이 있다. 식량가격지수는 ‘곡물·육류·식물성유지·유제품·설탕 등 5개 품목군의 국제가격 동향을 조사하고 집계해서 발표하는 수치’다. 지금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는 푸른 하늘 아래에 노랗게 익은 곡식을 상징하는 두 색으로 이루어진 국기를 가진 풍요로운 곡창지대였다. 하지만 전쟁에 자국민조차도 굶주리는 형편이다. 원자재와 곡물의 수급불균형은 소비자 물가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이는 가난한 나라나 계층에 더 큰 타격을 준다.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 대열에 속하지만, 자원이나 기술 대신에 무역으로 이룬 성과이다 보니 세계화의 그늘도 함께 한다. 한국의 경우 곡물 자급률은 20%에 불과해 식량의 무기화에 취약하다. 5월의 [후후월드](중앙일보) 기사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 추이가 88%까지 올라간 것을 전쟁 도발과 연결하여 분석한다. 그는 전쟁을 통해 ‘서방에 맞선 강한 지도자’로 각인됐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상의 적을 상정하여 내부 결속을 꾀하는 독재자의 전술이다. 심지어 푸틴은 주변 약소국에 대한 침략을 히틀러 같은 파시즘 세력으로부터 해방 전쟁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상황이다. 러시아에는 양심적인 반전 세력도 있지만, 종신집권을 꾀하는 현대판 차르의 지지기반은 국민의 허위의식, 즉 가상인 셈이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은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기로 경제제재로 맞섰다. 식량과 자원 면에서 자족할 수 있다는 물질적 기반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결합, 그리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는 서방의 금융자본주의의 충돌이다. 금본위제가 사라지면서 화폐라는 기호는 지시 대상을 상실했고, 결국 기준은 서방이든 반(反)서방이든 패권이 되었다. 물질과 에너지(힘, 권력)는 상호전화는 과학적 진리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 그러하듯. 예술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대중소비문화로 대표되는 현대의 문화가 코드에 기초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화인 예술은 실재와 상호작용한다. 그것은 현상이라는 허구적 대세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추동한다. 몸과 물질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노동마저도 추상화되는 현대에 미술은 이러한 직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몇 안되는 영역에 존재한다. 자본의 농간이나 전쟁이 낳은 죽음과 굶주림 같은 비참한 현실은 실재에 뿌리내린 예술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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