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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원로작가들의 너무 큰 전시, 공허한 전시

박영택

이미지 제공: 박영택 ⓒ 2015


근래 부산 조현화랑 분점에서 열린 김종학 전시를 보았다. 그곳에 작가의 신작 한 점이 압도적인 크기로 걸려있었다. 세로 2m, 가로 7.8m의 대형작품은 분홍 물감만으로 그려낸 꽃 그림이다. 연한 핑크빛 물감으로 바탕칠을 한 후 그 위에 바탕보다는 조금 진한 색으로 꽃, 꽃잎, 원형 혹은 웃는 얼굴을 몇 번의 붓질로 마감한 그림이었다. 붓과 더불어 손가락을 사용해 즉흥적이고 빠르게 그려냈다. 이 신작이 걸린 벽 뒤로는 몇 개의 소품들이 있었는데 구작을 포함하고 있었다. 어느 미술잡지에 실린 리뷰를 보니 “이번에 선보인 대형 꽃 그림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 도전의 결과물이다 … 작가 특유의 자유로운 정신은 조금도 늙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왔기에 가능했던 걸까”라고 쓰고 있었다. 

1974년 이래 지속하여온 <접합> 시리즈를 선보인 하종현은 최근 국제갤러리 전시를 통해 단색에서 다색으로, 수많은 나무판자에 일일이 헝겊을 씌우고 가로로 켜켜이 판자를 쌓거나 세로로 누르고 그 사이사이로 갖가지 물감을 넣고 눌러 만든 작품을 선보였다. 올이 굵은 마포 뒷면에 두꺼운 물감을 바른 다음,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특유의 배압법도 여전하며 물성에 대한 일관된 천착도 그렇다. 한 평론가는 “80대 후반에 이른 원로 작가의 뜨거운 예술 열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작품을 필요로 하는 대작 중심의 전시를 준비한 작가로서는 작품 제작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출품작들이 그 열정과 에너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적고 있다.  

신체를 제한한 상황에서 간단한 선 긋기 동작을 수행하며 화면에 흔적을 남기는 이건용의 작업은 이미 1970년대에 선보인 작업인데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얼마 전부터 미술시장에서도 블루칩 작가로 부상하며 판매가 뜨거운 편이다. 한국의 개념미술과 행위예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그의 근작이 지난해 10월에 열렸는데 작품이 완판되었다고 한다. 회화의 가장 기초적인 언어인 선 긋기를 ‘신체의 지각과 존재의 확인’이라는 철학적 사유로 확장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최근작은 특히 1976년도에 발표했던, 방향을 바꿔 반복해서 양팔의 움직임에 의해 자연스럽게 하트 모양의 선이 화면 위에 남겨진 것이 주를 이루었다. 마치 자동차의 와이퍼가 왕복 운동하듯 해서 만든 듯한 완곡한 곡선을 이룬 작업으로 조금씩 다른 차이를 지닌 하트 형태인데 물론 이 어긋남은 이건용 작업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하여간 ‘그린다는 행위를 혁신적으로 전환한 작가, 화면을 보지 않고 신체의 제약을 통해 그려진 선으로 구성된 혁신적 회화를 선보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 외에도 최근 원로 작가들의 야심 찬 근작들을 자주 접하고 있다. 80이 넘는 나이까지 지속적으로 작업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대단하지만 엄청난 양의 작업량을 자랑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오랜 작업들을 부단히 자기 복제하고 있으며 시장의 요구에 순응해 마치 찍어내듯이 반복해서 작업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격을 염두에 두어서인지 한결같이 거대한 화면을 영혼 없이, 공허하게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기력은 없어서 붓의 탄력이나 물감의 농밀한 밀도와 조형의 맛도 죄다 소진된 상태에서 그저 저 커다란 화면을 맹목적으로 끼적이며 분홍 꽃으로 채우고 있는 그림을 보고 있으니 슬프기까지 했다. 또는 유사한 작업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도열해 놓은 것을 보면 그간 자신의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을 해온 이력을 한순간에 부정해 놓는 것만 같았다. 이런 현상은 작가 자신의 노욕의 결과물일까? 아니면 자본에 굴복한 안타까운 작가상일까? 작가가 끝까지 좋은 작업을 지속해갈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때의 소중한 작업을 노년에 부정하거나 실망하게 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자신의 삶과 작업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새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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