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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박문종, 농사꾼의 심성으로 그리고 사는 화가

박영택

얼마 전 전남 담양 담빛예술창고에서 열린 박문종의 전시(8.5-10.2)를 보러 다녀왔다. 하루 동안의 짧은 여정에서 나는 전시도 보고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갖고 이후 지역 술집에서 그곳 문화계 인사들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박문종, 모내기(일부), 2022, 한지에 먹, 흙, 모종판 트레이


박문종(1957- )은 1997년 담양 수북면에 작업실을 마련해 지금까지 그곳에서 그림 그리고 농사지으며 산다. 자신의 한 해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작은 규모지만 그에게 매우 중요한 노동이고 삶이며 작업의 중요한 뼈대가 된다. 이번에 선보인 작업은 플라스틱 모종판 트레이를 이용해 그 안에 한지를 넣어 붙이고 먹과 흙을 사용해 논과 농사짓는 이들의 모습을 픽토그램처럼 간략하게 그리거나 종이에 구멍을 숭숭 뚫은 것이다. 그것은 전시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거나 쌓여있다. 시골집 창고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종판이나 흩어진 모종판 그대로다. 모종판 자체가 화면/용기가 되어 그 안에 그림을 담고 농사짓는 현장을 떠내고 흙을 그대로 굳혀 놓았다. 보는 이는 바닥에 놓인 모종판을 내려다보면서 실제 논을 보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그 사이를 거닐고 있는 듯한 환시에 시달린다. 작업 일부는 그림을 천장에 빨래처럼 매달거나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로 걸었다. 정면으로만 보는 데서 벗어나 여러 시점, 몸의 이동과 흐름에 따라 그림을 보라는 것이다. 박문종은 일찍이 “농촌에 살며 그림 그리며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1993)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농촌을 고향으로 둔 이이기에 자기 그림의 정서 또한 농촌에 두고 있다. 동시에 이를 확장해 땅을 매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이를 그림으로 형상화한다. 그는 이런 작업이 이 땅에서 숨 쉬는 자로서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런 연유로 그는 오래전에 담양으로 내려와 농사지으며 ‘농사꾼의 심성을 가진 화가’로 산다. 그러니 농군으로서 생활하며 그 정서 안에서 그림 그리며 사는 일은 작업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그림 그리는 일을 농사짓는 일, 땅에 작물을 심어 가꾸고 거두어들이는 일과 동일시한다. 오랜 세월 살아온 사람들의 궤적이 담양의 강가와 들판, 산과 논과 밭에 촘촘히 새겨져 있다고 보는 그는 그 구조와 흔적을 압축하고 풀어서 그려낸다. 그래서 그는 농부가 논 일하고 밭 일하는 행위/노동에서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조응하고 접촉이 이뤄지는지를 생각하면서 이를 그림과 접목한다. 그것이 모내기하는 행위를 그림으로 형상화하거나 종이 바탕을 점으로 찍고 뚫는 작업으로 나온다. 그는 한지, 골판지, 신문지나 파지 등을 이어붙인 젖은 종이를 펼치고 먹과 흙으로 그리고 붓과 꼬챙이 혹은 막대나 손가락을 사용하여 그 종이 위로 점을 찍거나 구멍을 뚫는 식으로 작업하는데 이는 논에 모를 심은 행위, 작물을 심는 일과 동일시된다. 이처럼 그이의 그림은 미술 이전의 원초적인 흔적, 기록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기존의 정형화되거나 일정한 미술적 개념에 의해 도출되고 가공된 것과는 다르다. 인문/철학적 개념으로 조탁된 미술언어나 세련되거나 잘 그렸거나 기술적인 완성도가 높거나 매체를 다루는 연마의 솜씨가 물씬거리는 내음이 쏘옥 빠진 상태에서 이 땅에 자리 잡고 살았던 이들이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기록한 절실한 이미지에 유사하다. 미술 이전에 자리 잡아 서식했고 지식과 문화 이전에 원초적인 생의 지혜로 부려졌던 혜안의 놀림을 연상시킨다.

나는 그런 어눌하고 소박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 맛과 먹의 활용이 좋다. 기존 미술계에서 통상적으로 유통되고 생산되는 그림과는 현저한 차이를 지닌다. 박문종의 미술 언어와 그 어법은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무척 생소한 그림이다. 그이의 어법은 그대로 농사를 짓는 사람의 말투와 몸놀림과 노동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현장에서 나오는 생생한 힘이다. 마치 농부가 작대기로 논바닥에 쓱쓱 그어댄 자국 같기도 하고 달력 종이나 봉투 등에 숫자나 문자, 기호를 무심히 적어놓은 것도 같다. 형언하기 어려운 어눌하면서도 기묘한 경지가 있다. 전적으로 땅과의 교감의 산물에서 나온 그림이다. 새삼 그림이란 그리고자 하는 것과의 진정한 교감 없이는 가능치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지역작가를 우리는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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