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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잘 알지도 못하면서 | 김성호의 미술계 팩션(13)

김성호



“다들 죽어. 하여튼 그래”

요절한 후배 평론가 J의 장례식장에서 평론계 선배 나교수가 술잔을 기울이다가 평소 J의 말투를 흉내 내며 내게 말했다. 무슨 뻔한 말?
요지는 “죽으면 땡이니 뭐가 되겠다고 아득바득 살지 말고 적당히 행복하게 살라”는 충고였다. “후배 J가 그리 살았으니 너는 그러지 말라”는 뜻이니 이해는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후배 J는 평론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미술계에서 프리랜서 기획자, 예술감독, 아트 컨설턴트, 아트 딜러라는 다중 명함을 들고 다니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일 중독자였다. 일 중독자? 아니, 젊은 나이에 너무 많은 역할을 하면서 살다 보니 외려 미술계에서 눈흘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뭐 하나 제대로 성과조차 내지 못하고 요절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그녀를 ‘무늬만 평론가인 탈을 쓴 권모술수 형 딜러’라는 악평을 내놓기도 했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가 그녀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 김성호, 2023


후배 J는 원래 조신한 연구자 형 미술평론가였다. 그녀는 박사과정을 밟는 중에 모 기관의 평론 공모에 당선하면서 떠들썩하게 데뷔한 이래, 사회학에 기초한 비평 이론 연구에 매진하면서 간헐적으로 진지한 현장 비평도 병행했던 인재였다. 막연하게 교수를 꿈꾸면서 공부와 일을 함께 해왔던 그녀에게 급속한 변화는 가족을 재정 파탄에 이르게 한 동생의 사업 실패로 촉발되었다. 형사 처분을 받은 동생, 화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부모, 그녀를 버리고 떠난 남편! 그녀는 이혼 후 생계를 책임져야 할 싱글맘 가장의 역할을 다하려고 박사 학위 취득을 미뤄둔 채 미술 현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생업을 도모했다.

그녀는 가끔씩 했던 현장 비평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미술 잡지사, 미술 기관, 평론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현장비평의 시작을 알리는 인사를 다녔다. 전시 평론부터 시작해서 작가들의 카탈로그 서문 청탁을 가리지 않고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평론비가 적다고 선배들이 거절하고 떠넘긴 비평문을 대신 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활동 이후 밀려드는 전국의 미술관, 문화재단, 관련 기관의 심사, 자문, 평론 요청을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서라! 현장 비평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신진 작가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평론비를 깎아달라고 요청하면 겉으로는 멋진 척 수락하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하루 종일 자학에 가까운 자책으로 괴로워했다. 그녀에겐 다달이 봉급이 나오는 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강사법이 시행되자마자 잘린 대학 강사 대신 취업했던 공립미술관 큐레이터 일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미술관에 허락받지 않고 한 아카데미에 강의를 나갔다가 징계를 먹고, 재계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한 사립미술관에 학예실장으로 이직한 후 업무 관련 이견으로 관장과 대판 싸우고 미술관을 떠날 즈음에 그녀는 이미 조신함과 거리가 먼 싸움닭이 되어 있었다.

젠장! 민주적 시스템과 공정은 개에게나 줘라. 그녀는 살기 위해 미술계의 불공정과 더러운 관행에 눈을 감고 불의와 일정 부분 타협하기로 했다. 한 미술제의 감독으로 일하면서 한 용역 업체로부터 ‘뒷돈 아닌 뒷돈’도 받았고, 한 참여 작가에게서 ‘뇌물 아닌 뇌물’도 서슴없이 받았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뒷돈도, 뇌물도 아니라고 스스로 세뇌하면서 말이다.

아트 컨설턴트를 표방한 미술 기획사를 차린 이후에는 각 공모 사업에 지원서를 쓰는 시간 외에는 ‘로비 아닌 로비’를 하느라 분주히 전국을 다녔다. ‘뒷돈 아닌 뒷돈, 뇌물 아닌 뇌물, 로비 아닌 로비’가 어디 있으랴! 그녀는 미술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녀의 삶을 안다면, 그녀의 죄를 미워해도 그녀를 미워하지 마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차라리 그녀를 이렇게 만든 현실을 비난하고, 한국 미술계에 기생하고 있는 음험한 악습과 떨쳐버리지 못한 비루한 관행을 미워하라. 가난을 벗어나고자 아예 아트 딜러로 전업을 선언하면서 아득바득 살던 나의 후배! 그녀가 피곤한 몸을 누였던 한 남행 기차 안에서 뇌출혈로 돌연사했다는 비보가 가슴 먹먹하다. 이제 힘들게 안 살아도 되니 어쩌면 다행일까? 그녀가 습관처럼 읊조렸던 자조 섞인 말이 난청과 이명처럼 남은 자 모두를 괴롭힌다.

“다들 그래. 하여튼 그래”


* 이 글은 팩션(faction)이다.

- 김성호(1966- ) 파리1대학 미학 전공 미학예술학 박사, 유니스트 박사후연구원, 2014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총감독, 2015바다미술제 전시감독, 2016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 총감독, 2018다카르비엔날레 한국특별전 예술감독,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2021강원국제트리엔날레 예술감독 역임. 현재 성신여대 초빙교수, APAP7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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